슬기로운 부부생활
남편이 헝가리로 출장을 갔다. 대리, 과장 때도 잘 안 다니던 출장을 부장이 되니 조금 더 자주 다닌다.
한번 출장을 가면 보통 일주일이나 열흘 씩 있다가 돌아오곤 했는데, 이번 출장은 거의 3주 일정이라고 했다. 나는 그냥 "이번엔 좀 오래 걸리네."라고 하면서 출장 당일 새벽 공항버스 타는 곳까지 남편을 데려다주었다. 남편은 이른 새벽부터 마누라 고생한다며 대단히 미안해했다.
"나 때문에 자기가 고생이다. 고맙다. 잘 다녀올게. 심심하더라도 참고 잘 견디고 있어."
남편은 애절한 눈을 하며 버스에 오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결혼한 지 27년 차 부부이다. 남들은 신혼 초에 서로 다른 생활 습관 때문에 열심히 싸우고 다투고 한다던데 우리의 신혼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신혼 기간이 끝나고 나니 서로의 단점들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남편보단 내 눈에 남편의 단점이 보였다는 게 맞겠다-잔소리를 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내가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면 남편은 아이유/임슬옹의 노래를 외쳐 불러대고 했다.
"그만하~자! 그만하~자!"
X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고 했던가. 잔소리와 말다툼에도 서로 합의가 되지 않는 생활 습관에 나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많은 부분을 포기했다. (물론 남편도 일정 부분에서는 그랬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러는 사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것들이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남편이 출장 간 지 2주가 지났다. 아이들도 학교 기숙사에서 돌아오지 않는 지금, 우리 집은 내 집이 되었다. 그동안 합의되지 못했던 소소한 집안의 일들이 내 뜻대로 되고 있다.
우선 택배가 줄었다. 나는 쇼핑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나 식재료는 당장 하루이틀 정도 필요한 것만 가까운 마트에서 사는 것을 선호한다. 냉장고와 냉동고가 그득 차 있는 것을 보면 마치 소주가 가득히 채워진 소주잔을 빨리 비우고 싶은 것처럼 조급증이 생긴다. '가득 찬 냉장고를 비워야 하는데...'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음식물로(특히 냉동식품으로 가득 찬 냉동고) 꽉 채워진 냉장고 안을 보면 내 마음이 돌로 가득 채워진 것만 같다.
그런데, 남편은 인터넷으로 대량으로 구매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싸다며, 어는 날부턴가 식품 쇼핑을 자기가 하기 시작했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쟁여 두면 언젠가 먹을 거니 쌀 때 사두어야 한다며, 온갖 온라인 쇼핑몰 앱을 깔더니 특가세일 알림이 울릴 때마다 뭔가를 하나씩 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웬만한 신제품은 다 먼저 시식해 보게 되었고(신제품은 출시되면 항상 특가 세일을 한다), 배송비를 아끼기 위해서 매번 대용량으로 식재료를 구매하게 되었다. 돼지고기는 삼겹살이나 목살보다 앞다리가 싸고 건강하다며 늘 앞다리살만 샀는데 배송된 물건은 늘 1kg가 넘었다. 우리 집 냉장고는 앞다리살이 끊일 날이 없다.
고기만 사는 게 아니다. 라면(팔도에서 어묵라면이 새로 출시되었다며 특가 세일로 사서 지금 집에 20봉이 있다), 유동골뱅이(작년에 너무 많이 산 골뱅이가 죽지도 않고 아직 수납장에 살아있다), 즉석밥(재고가 20개 이하로 떨어지만 항상 발주를 넣는다), 스프, 카레는 수납장에 꽉 차 있다.
각종 즉석식품들(즉석 순대국밥, 즉석 주꾸미볶음, 즉석 떡볶이, 즉석 오뎅탕, 즉석 핫도그, 찹쌀떡, 비비고만두...)은 냉동고에 자리 잡은 재 줄지 않고 닭장 속 병아리들처럼 낑겨 있다.
인터넷으로 사면 항상 무더기로 사야 하니, 원치 않는 음식일 때는 억지로 먹어서 치워야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집은 음식을 해 먹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먹고 해치우는 것이 되었다. 아이들이나 내가 고만 좀 사라고 온갖 말을 다 해도 싸게 합리적으로 샀다고 자부심에 그저 자랑뿐이다.
"나 만큼 싸게 사는 사람 없을 걸!"
거의 매일 우리 집 현관에는 택배 박스가 2~3개씩은 깔려 있었다. 외출했다 집에 돌아와 맨 먼저 택배 상자부터 보이면 가슴이 턱턱 막힌다. 냉장고에 공간을 만들어 채우는 것도 일이지만, 다용도실에 쌓여가는 종이 상자, 스티로품 상자를 보면 이게 집인가, 물류 창고인가 싶다. 재활용 쓰레기는 일주일에 한 번만 버리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상자 쓰레기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쓰다 보니 아, 스트레스.
그런데, 남편 출장 후 택배가 싹 없어졌다. 쓰레기가 줄었다. 집안이 깔끔해졌다. 냉장고는 조금씩 여유를 찾아간다. 다용도실을 열어보아도, 냉장고를 열어보아도 가슴이 답답하지 않다. 그래 이게 집이지!
그리고 또 집안 잡동사니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남편은 물건이 눈에 보여야 한다. 한번 꺼내서 쓴 물건은 쓴 자리에 그대로 두는 습관이 있다. 그러다 보니 집에 있는 온갖 테이블 위는 남편의 물건이나 남편이 쓰다 내버려둔 물건들이 불규칙적으로 어질러져 있다. 거실 테이블 위엔, 남편이 한번 쓰고 놔둔 혈압계, 어깨 안마기, 풋크림, 바셀린, 무좀연고, 건전지, 각종 우편물 종이, 본인 otp, 아령, 악력기, 귀이개, 손톱깎기가 아무렇게나 자리 잡고 있다. 치우려고 하면, 내일이나 모레 또 쓸건데 왜 치우냐고 한다. 거실테이블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 '꼬라지'가 보기 싫어서 내 물건을 두는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절대 다른 물건이 침입하지 못하게 약속을 받았다.
남편이 떠나고 모든 테이블을 정리했다. 물건들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테이블은 깔끔해졌다. 내 마음도 묵은 때를 벗기고 막 목욕탕에서 나온 것처럼 상쾌하고 편안해졌다
현관에 들어오면, 신발이 열 켤레 정도 무질서하게 널브러져 있었는데, 필요한 신발 너덧개만 빼고 다 신발장에 넣었다. 신발도 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줄 세워 놓았다. 예쁘다. 매일 저녁 신발을 정리할 필요가 없다. 매번 이렇게 살면 매일이 얼마나 예쁠까, 생각이 든다.
남편이 퇴근함과 동시에 유튜브 소리로 집안이 시끄러워었는데 소음이 없어졌다. 집이 조용해졌다. 남편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또 폰으로 유튜브도 틀어놓고 듀얼로 시청을 했다. "하나는 끄지?"하면 두 개 다 본단다.
보름 째 집이 깔끔해지고 조용해졌다. 내 기분도 깔끔해지고 평온해졌다. 퇴근하고 집에 오는 것이 행복하다. 집안에 있는 것이 분위기 좋은 커피숍에 가는 것보다 더 기분이 좋다.
내가 먹고 싶은 데로 먹었다. 은은한 조명 하나만 켜 두고 책을 보다가, 눈이 아프면 유튜브로 본다. 커피를 내려 천천히 마시면서 드라마도 본다. 매트를 깔고 신나게 홈트도 하고 춤도 춰본다. 뭐든지 내 맘대로다.
친구는 '남편은 로또와 같아서 안 맞아도 안 맞아도 이렇게나 안 맞을 수가 없다'라고 했다. 너무도 적확한 표현에 공감의 박수를 쳤다. 같이 27년을 살았고 앞으로 더 긴 세월을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언젠가 한 번은 이 로또가 맞는 날이 올 수 있겠지, 하는 말에 친구는 "꿈 깨라"라고 한다. 같이 웃었다.
이 행복이 이제 일주일 남았다. 유효기간이 있는 짧은 행복이라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일주일 동안 맘껏 행복을 즐기겠다.
그래도 일주일 뒤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오면, 고생했다고 당신이 없어서 너무 외로웠다고 말을 해주련다. 여러 단점을 커버할 몇 개의 장점을 가진 남편이 기쁘면 나도 가끔(?) 같이 기쁘기 때문이다.
제발, 이 글을 남편은 못 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