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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Feb 02. 2024

적군처럼 진주해온 안개를 물리칠 아침을 기다리며...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고


유명하다, 좋다, 필독이다,

말은 많이 들었는데 아직도 읽지 못한 소설, 무진기행.


하긴 내가 유명하고 좋고 필독인 책 중에서 못 읽은 게 '무진기행'뿐이겠나마는, 그래도 한국 문학 중에서 꽤나 고전이라고 하는 책인데 나잇살이나 먹어서 아직도 안 읽어봤다는 사실이 쪽팔려 더 늦기 전에 쪽팔림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자각이 들었다. 새해 첫 책으로 '무진기행'을 추천하게 된 이유다. 

(여기서는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보다 쪽팔림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무진기행은 짧은 책이어서 단독으로 출간된 것은 없고 김승옥의 단편소설을 한데 묶어 나왔다. 여러 출판사의 여러 책 중에서 2014년에 출간된 문학동네의 김승옥 대표중단편선인 <생명연습>을 골랐다. 


총 10편의 중단편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알려진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 두 편만 읽었다. 속물티가 물씬 난다. 어쩔 수 없다. 50대 중반이 된 사람이 속물티가 너무 없어도 안된다는 핑계를 대본다. 


무진기행은 첫 문장도 유명하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里程碑)를 보았다. 


소설 속 무진은 상상 속의 도시이다. 

혹자는 김승옥의 고향인 순천이 무진일 거라고 하는데, 그건 '혹자'들의 생각일 뿐이고 진실은 작가만이 알고 있겠지. 무진이 실제로 어디인지, 그건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다. 그냥 무진(霧津)은 안개 자욱한 포구라는 글자 그대로 뭔가 몽환적이고 확실하지 않을 것 같은 먼 기억 속 도시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안개를 밤사이 진주해온 적군으로 비유한 김승옥의 필력은, 소설 속 곳곳에 그 영롱한 자태를 빛내고 있다. 

김승옥의 스승인 이어령 교수는 김승옥을 호텔방에 가둬놓고 무조건 장편을 쓰라고 했다던데, 천재적인 글쓰기 재능이 얼마나 탁월하면 이런 일화가 생길까? 끝내 장편을 못 쓰고 단편을 쓰고 달아나바렸는데 그 단편이 제1회 이상문학상을 타버렸단다. 


'무진기행'이라는 작품 속 주인공 윤희중과 주변 인물들-하인숙, 박, 조, 자살한 여자, 미친 여자, 부인, 장인 영감, 어머니-사이의 얽힌 이야기나 뜻하는 것들을 읽다가도 작가가 쓴 주옥같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책을 읽다 말고 문구와 단어와 은유와 비유에 한참을 머무르다 아뿔싸! 앞에 내용이 뭐였더라,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분명 김승옥은 남자인데, '무진기행은' 인생을 좀 살았다고 생각되는 중년의 여성이 쓴 것 같다. 문체는 순수하고, 단어는 감수성이 넘치고, 표현은 감각적이다. 그래서 김승옥이 처음 문단에 등장했을 때 '감수성의 혁명'이니 '전후문학의 기적'이니 따위의 찬사가 남발되었나 보다. 


소설은 겨우 18장 반 분량밖에 안된다. 이런 짧은 소설을 여태 안 읽고 있었다니! 또 한 번 쪽팔림이 찾아온다. 

윤희중이라는 남자가 고향 무진에 부인의 권유로 휴가를 와서 하인숙이라는 여자를 만나 외도를 하였다. 하인숙을 서울로 데려간다는 약속을 했으나, 빨리 서울로 오라는 부인의 전보를 받고 하인숙과의 약속을 내팽개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는 것이 18장 반에 담긴 줄거리이다. 


소설에 나오는 남자들은 힘이 없다. 아주 곱게 자란, 손이 하얗고 손가락이 기다란 유약한 도련님 같다. 윤희중도 그렇고 희중의 후배 '박'도 그렇다. 하인숙도 그렇다. 성악을 전공한 푸치니의 '어떤 개인 날'을 졸업 작품에서 불렀던 여자이지만, 학교 음악선생인데도 돈 많은 세무서장이 부탁하면 '목포의 눈물'도 간드러지게 부를 수 있다. 의지박약이고 스스로 일을 도모하지 못한다. 그저 남자에게 의지하고 기대어 자신의 꿈을 이루려 한다. 


윤희중이나 하인숙이나, 나약하고 허무적인 인간처럼 보인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남이 만들어주는 대로 이끌려 가는 삶을 사는 사람들.

1960년대 초에 4.19라는 대대적 사건으로 민주를 쟁취했건만, 어디서 툭 튀어나온 군인들이 민주를 강탈하고 다시 일제의 헌병 같은 서슬 퍼런 반동의 세월이 시작되었다. 대학을 나온 좀 배웠다는 지식인, 예술인은 역사의 뒤 걸음질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거나 혹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라는 것을 체득하여 피기도 전에 스스로를 땅에 묻어버린 게 아닐까?


같이 읽은 '서울, 1964년 겨울'에서도 윤희중과 하인숙처럼 힘없고 단조로운 남자 셋이 나온다. 뜬금없이 파리를 좋아하느냐는 둥, 꿈틀거리는 것을 좋아하느냐는 둥 인생에 크게 도움 안 될 말들만 뺕어내는 남자들이다. 


젊은 남자들이 그저 입에서 나오는 의식의 흐름 같은 말만 뱉어내는 것을 보자니, 아 이 사람들은 삶에 지쳤구나,는 생각이 들었는데, 1964년 겨울에 서울이라는 공간을 그것도 남자들이 어찌하다 걸어간 남영동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또 드는 것이다. 


이런 허무의 인간은 김승옥의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허무의 인간은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느닷없이 또다시 등장한 군인 무리로 인해 또 생겨났다. 그리고 1987년 여름이 지닌 후 치른 13대 대통령 선거 이후에도 많이 생겨났다. 


 이런 역사의 뒷걸음질과 허무의 인간의 등장이 멈췄으면 좋았으련만. 

2017년 촛불이라는 거국적인 행위 이후 이제 전진하는 대한민국, 씩씩한 사람이 주무대로 나올 거라 기대했는데, 2024년 1월 현재,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다시 우리의 역사는 뒤로 향해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김승옥의 남자들처럼, 2024년 서울 겨울을 지내고 있는 우리들도 나약함과 허무에 빠져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분노가 보이지 않는다. 자꾸 어떤 누군가가 해결해 주기를 하인숙처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옆에서 눈치 보고 있는 나 역시 한 명의 윤희중일 수 있으며, 또한 세속에서 잇속만 챙기는 세무서장 '조'일 수도 있겠다. 


고전은 읽는 시기마다 보이는 게 다르고 새롭다고 하더니, 1960년대에 쓴 소설을 보면서 자꾸 2024년 현재의 우리가 보인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자꾸 역사가 뒤걸음질을 쳐서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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