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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Apr 15. 2024

십 년 동안 맺힌 여자의 한이 복수의 서리로 내리다

궁궐의 여인 - 덕수궁 석어당 이야기

옛날 옛날에 지금으로부터 약 420년 전에 조선의 왕은 선조였습니다. 선조 임금님 시절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선조는 전쟁을 피해 멀리 청나라 국경지대까지 피난을 갔었습니다.  

전쟁이 한풀 꺾이자 선조는 한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전쟁통에 모든 궁궐이 다 불타 버렸답니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도 이궁인 창덕궁도 여인들이 주로 살았던 창경궁도 모두모두 불에 타 버리고 없어져 버렸습니다. 선조는 돌아갈 집이 없어져 버렸지요. 


선조는 어쩔 수 없이 그나마 멀쩡했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뻘인 월산대군 가족이 살던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월산대군은 7대 임금인 세조의 손자였습니다. 월산대군의 집은 이때부터 정릉동 행궁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행궁 중에서 선조는 2층짜리 검소한 집에 짐에 풀고 생활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완전히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선조의 첫 번째 부인인 의인왕후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1600년). 

부인의 3년상이 끝나자마자 선조는 바로 새 장가를 들었습니다(1602년). 새 왕비로 맞이한 여인은 김제남의 딸 19살 어여쁜 처녀였습니다. 

결혼할 당시 선조는 나이가 51살이었는데도 아주 건강했나 봅니다. 선조는 새 왕비에게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았습니다. 첫째는 딸이었고 둘째는 아들이었습니다. 나중에 첫째는 정명공주라 하고 둘째는 영창대군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창대군은 정식 왕비에서 난 적자였지만 이미 선조에게는 후궁에게서 얻은 많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광해군은 10년 전에 이미 세자로 책봉이 되어있었습니다. 선조는 광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터지고 나라가 불안해지자 어서 빨리 세자를 책봉하라는 대신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광해를 세자로 책봉했지요. 광해는 임진왜란 때에 활약도 많이 하여서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신망도 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비가 적자인 왕자를 낳자 선조의 마음이 슬그머니 변했습니다. 영창을 세자로 삼고 후계자로 정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왕이라도 눈치가 보였지 않겠어요? 선조는 속마음을 내비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고 그 사이 그만 큰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세자를 바꾸기엔 이미 늦었다고 판단한 선조는 유영경이라는 신하에게 나이 어린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살고 있던 정릉동 행궁의 2층짜리 집에서 승하하시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이 조선의 15대 임금이 되었습니다. 

임금이 된 광해는 새로이 창덕궁과 창경궁, 경희궁을 지었고 정릉동 행궁을 확장 수리하여 경운궁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임금이 되었지만 적자인 동생 영창대군이 있으니 광해는 왕위가 찬탈될까 대단히 불안해했습니다. 게다가 광해군이 세자였던 시절부터 그를 도왔던 이이첨은 광해의 불안을 더 부추기는 언행을 해서 광해를 더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이첨은 틈만 나면 구실을 만들어  영창대군을 몰아내려고 술수를 부렸습니다. 이이첨의 말을 믿었던  광해는 동생 영창대군과 그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하나 터졌습니다. 문경새재에서 강도 7명이 소금장수, 나무장수로 행세하다가 문경새재를 넘는 상인을 죽이고 금품을 뺏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7인의 강도에게 목숨을 빼앗긴 장사치의 노비가 어찌어찌 도망을 쳤고 이어 포도청에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출동한 포도청 군사들은 강도 7명이 일망타진했는데 알고 보니 강도 7명은 양반 댁 서자들이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이 서자들은 내로라하는 집의 서자들이었는데 그중엔 영의정 집 아들도 있었습니다. 이들 7명은 스스로 '강변칠우' 혹은 '죽림칠현'이라고 불렀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이 강살인 사건은 며칠 뒤 역모사건으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이이첨이 영창대군을 몰아내기 위해서 계략을 꾸민 것이었습니다. 

그 계략은, 잡힌 서자의 아버지인 영의정 박응서가 역모를 자백하는 편지를 써서 광해군에게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편지에 적힌 역모의 내용은,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후 광해군을 쫓아내고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역모의 자백이 나오자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졌습니다. 이이첨 일파는 고문을 해서 더 많은 자백을 받아내었는데,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던 역모의 우두머리는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김제남은 이제 큰일 났습니다. 조선시대에서 역모는 3족을 멸하는 무서운 죄이니까요. 

고변이 일어나자, 인목대비의 아버지, 오빠들, 동생들, 심지어 조카들까지 집안이 박살이 났습니다. 모두들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들 영창대군은 역모의 주인공이라 하여 강화도로 쫓겨가 연금되었습니다. 연금만 당했을까요? 

연금당한 지 일 년 뒤, 광해군은 이이첨 등의 연속되는 요청을 마지못해 듣는 듯하며 동생을 방에 가두고 방에 불을 계속 때게 하였습니다. 방의 온도가 계속 높아지니 영창대군은 증기에 질식해 그만 죽어 버렸습니다. 


아홉 살 난 어린 왕자의 질식사 소식에 엄마인 인목대비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인목대비는 왕비의 가족을 몰살시키다 못해 자신의 친동생까지 질식사시켜 버리는 광해군을 너무너무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 상황이면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요? 온 가족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인목대비는 복수의 칼날을 갈았습니다. 


광해는 동생은 비록 죽었지만 인목대비는 여전히 살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목대비가 자신의 왕위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목대비를 왕비도 아닌 평범한 여인으로 강등시키고 경운궁(서궁, 지금의 덕수궁)에 가택연금을 시켜버렸습니다. 인목대비가 유폐된 곳은 자신의 남편 선조가 생활을 하던 2층짜리 바로 그 집이었습니다. 남편이 생활하던 곳에서 감금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서궁에 소복만 입고 유폐된 인목대비,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정명공주와 나인 몇몇을 데리고 쓸쓸히 살았습니다. 광해군은 먹는 것, 입는 것 모두를 철저히 감시했습니다. 식량도 아주 조금씩만 들여보내주고 죽지 않을 만큼만 주었습니다. 광해는 인목대비마저 죽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엔가 정명공주와 인목대비를 죽이려고 자객을 들여보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자객이 들어올 것을 염려한 영의정의 방어 덕분에 인목대비와 정명공주는 다행히 죽임을 면했습니다. 인목대비와 정명공주는 하루하루 불안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광해에 대한 미움은 끝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서궁에 유폐된 지 5년 만에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쫓아내고 임금에 올랐습니다. 새 임금은 광해를 끌고 인목대비가 유폐되어 있던 2층집 앞에 갔습니다. 집 앞에 광해를 꿇어 앉혔습니다. 

유폐 생활을 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던 인목대비. 그는 무릎을 꿇고 있는 광해를 향해 폐위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울분에 찬 목소리로 읊었습니다. 


"내 일국의 국모가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광해는 간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품 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주었다. 

그리고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두 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 공사를 10년 동안 그치지 않아, 부역이 번다하고 가렴주구는 한이 없어 백성들은 그 학정을 견디지 못하여 도탄에서 울부짖으므로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은 마치 가느다란 실끈과 같았다.

이것뿐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백여 년이라,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선왕께서 40년 동안 재위하시면서 지성으로 섬기어 평생에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광해는 배은 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어, 기미년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사해에 펼쳐지게 하였다.

죄악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어떻게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에게 군림하면서 조종조의 천위(天位)를 누리고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겠는가. 이에 광해를 폐위하고자 한다."


인목대비는 이로써 원한에 대한 복수를 한 셈이 되었습니다. 



서궁이란, 창덕궁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궁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덕수궁입니다. 

선조가 살았고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2층집은 이후에 영조가 '석어당'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석어당'이란, '옛날 임금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옛날 임금이란, 선조를 말합니다. 


*그림출처: KBS역사저널 그날 유튜브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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