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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Jun 13. 2024

일제가 경복궁 서쪽 담을 넘던 그 날

침략과 저항의 이야기 - 경복궁 영추문

1894년 7월 23일 자정이 지난 늦은 밤 경복궁의 서쪽문인 영추문에 수상해 보이는 군인들이 은밀히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쩍쩍. 빡빡. 콰광.

수상한 군인들은 수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손에 도끼와 폭탄을 들고 어떤 이는 영추문을 도끼로 내려찍고 있었고 어떤 이는 폭탄을 설치하고는 터트리고 있었습니다. 이들 뒤에는 또 다른 이들이 손에 총을 들고서 경계를 바짝 세우고 있었습니다. 수상한 군인들은 일본이 며칠 전 보낸 일본 군인들이었습니다.


일본군이 영추문을 열기 위해 문을 도끼로 내려치고 폭탄을 터트리자 그 소리를 듣고 경복궁 안에 있는 조선의 군사들이 잽싸게 영추문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경복궁에는 궁을 방위하는 장위영, 경리청 그리고 평양의 정예군 등 수 백 명이 한양도성과 경복궁 주변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도끼와 폭탄으로 영추문을 여는 것이 실패하자 대나무 장대를 영추문 밖에 급히 설치하였습니다. 일본 군사들은 조선 군사들이 더 많이 몰려오기 전에 영추문 담을 넘고 경복궁 안으로 쳐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일본 군사들은 대나무 장대를 타고 영추문을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조선의 군사들은 이상한 낌새에 급히 달려왔지만 다수의 일본군사들이 이미 궐담을 넘은 상태였습니다. 조선군은 남아있던 일본군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같은 시각 일본군은 경복궁의 동쪽문인 건춘문 밖에도 나타났습니다. 궁궐 경계를 서고 있던 조선의 군사들은 건춘문에 있던 일본군과는 더욱더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한편, 영추문에서 장대를 타고 궁궐 안으로 들어갔던 일본의 군인들은 광화문을 열어 밖에서 대기하던 일본 군인들을 궁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이제 경복궁은 일본과 조선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터가 되어버렸습니다.


총격전이 한창일 때 재빠른 일본 군사 몇몇이 고종이 기거하던 경복궁 함화당으로 내달려 갔습니다. 함화당 안으로 총과 칼을 차고 들어간 일본군이 들고 있는 칼을 고종의 목에 갖다 대고는 이렇게 협박했습니다.

“'대한제국 조정을 대신해 일본이 청군을 물리쳐달라 ‘는 문서를 써라. 그 문서를 쓰지 않으면 당신의 목숨을 보장하지 못한다."


여러 해 전부터 일본은 대륙을 차지하고 식민지를 만들려는 야욕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의 땅이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청나라와 아직 가까운 사이였고 청나라가 있는 한, 일본은 멋대로 조선을 집어삼킬 수 없었습니다. 대륙으로 나아가기 위해 조선을 발판으로 삼으려면 청나라를 굴복시켜야 했습니다.

일본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조선이 청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일본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국력을 잃어가던 조선은 일본의 만행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복궁 안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던 조선군에게 '무기를 버리라'는 고종의 명령이 내려지자 조선의 군인들은 통한의 눈물과 격분을 참으며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이때 고종의 명령이 친일 대신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경복궁을 점령하고 대원군을 앞세운 일본의 무력과 힘 앞에 고종은 힘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의 권력을 장악한 일본은 친일 대신들을 앞세워 친일 내각을 만들었고 허울 좋은 개혁안을 제시하며 실천을 강행하였습니다. 이것이 갑오개혁이라고 불리는 개혁이며 갑오개혁은 신설된 군국기무처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군국기무처라는 이름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직접 내린 이름이었습니다.


조선의 권력을 장악한 일본, 고종을 굴복시켜 조선에서 청나라를 물러나게 하라는 말을 들은 일본은 경복궁을 난입한 지 이틀 뒤인 1894년 7월 25일 청나라의 물자 수송선 2척을 안산 풍도 앞바다에서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하였습니다. 일본의 대륙 침략의 야욕이 서서히 본격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청일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고종과 명성왕후가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한 까닭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이 도화선이 되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동학혁명이 일어난 초기에 동학군은 파죽지세로 전주성까지 밀고 올라갈 정도로 세력이 강했습니다. 반면에 조선 조정은 백성들의 항쟁에 올바르게 대응할 만큼 전략도 부재했고 동학군을 바라보는 시선도 올곧지 못했습니다.

지방관의 과도한 세금 수취와 폭정 때문에 그동안 억눌려 있던 불만이 폭발하여 혁명으로까지 발전한 백성들의 마음을 조정은 다독여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억눌린 민심을 반란으로 취급하고 왕과 왕비의 지위를 잃을까 불안한 나머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외세를 이 땅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조정 일부에서는 동학군의 개혁에 대한 제안을 검토해 보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명성왕후는 절대 반대를 하면서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해 5월 충남 아산에 약  28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청나라의 군대가 충남 아산만에 도착하였습니다. 청의 군대가 우리 땅을 밟자마자 일본은 8000명이 넘는 군사를 한양 용산으로 주둔시켰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맺어진 텐진조약으로 인하여 청/일 두 나라 중 한나라라도 조선 땅에 들어오면 다른 한 나라는 자동적으로 조선 땅에 들어오도록 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일본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죠. 청나라보다 훨씬 더 많은 군사를 이끌고 청나라 군대가 주둔한 아산이 아닌 임금님이 계시는 한양, 그것도 경복궁의 근처인 용산에 군대를 주둔시킨 겁니다.


청나라와 일본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간섭을 하려는 것을 보고  동학군은 외세의 개입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급히 조정과 동학군(전봉준)은 화의를 맺고 동학군은 자진해산합니다.

동학군의 자진해산으로 청군과 일본군은 철수해야 마땅하나 전쟁의 기회를 보고 있던 일본군은 모처럼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사건을 하나 일으키는데 그것이  바로 경복궁 난입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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