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과 반목의 역사 - 창덕궁 <정청>
선조임금 대에 김효원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김효원은 명종임금님 시절 과거에 급제를 한 사람입니다. 김효원은 과거 급제를 하기 전에 윤원형의 집에서 기거를 하고 숙식을 하며 공부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윤원형이 누구냐? 그는 명종의 삼촌이고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동생이었는데 누이의 아들인 명종이 임금이 되고 누이가 수렴청정으로 권력을 쥐자 누이의 권세를 등에 업고 조선 시대를 타락과 부패의 시대로 빠져들게한 장본인 중 한 명입니다.
또 한사람, 심의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심의겸은 명종의 부인인 인순왕후의 동생이었습니다. 심의겸은 김효원이 공부하던 시절 윤원형의 집에서 공부할 때 윤원형의 집엘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 김효원이 윤원형의 집에서 기거하며 생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윤원형은 부정부패한 인물이어서 그의 집을 드나드는 김효원을 심의겸은 별로 좋게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던 김효원이 마침내 과제에 급제하였고 관직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문정왕후가 죽고 그의 오빠 윤원형의 죄를 논하는 때가 왔는데 이 때 윤원형에 대한 상소문을 짓는 일을 맡은 사람이 김효원이었습니다. 이것을 심의겸이 알고서 친구에게,
"김효원이 윤원형의 집에 출입하였으니 그의 사정을 잘 알 것이어서 그를 위해 상소를 잘 지을 것이다"
라고 말하며, 김효원을 상소문을 짓는 사람에서 제외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퍼지게 되어 김효원과 심의겸을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조 임금이 왕위에 있던 시절, 김효원은 요직 중에 요직 <이조전랑>에 천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김효원의 사람됨을 의심했던 심의겸은,
“김효원은 윤 대감 집에 드나들면서 권세에 아부하던 사람입니다. 하오니, 이조전랑의 막중한 책임을 맡기기 불가한 줄로 아뢰오.”
라며 강력히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조전랑>에 천거되었을 때 심의겸의 강력한 반대로 김효원은 <이조전랑>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2년 뒤 김효원은 이조전랑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조전랑>으로 일하고 일년 뒤 김효원은 다른 자리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김효원의 후임 <이조전랑>으로 이번에는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 후임으로 천거가 되었습니다. 심의겸이 누구입니까? 김효원이 처음 <이조전랑>으로 천거가 되었을 때 그의 사람됨을 의심하며 강력히 반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2년 뒤 김효원이 <이조전랑>이 되긴 했지만 자신을 반대했던 심의겸에게 김효원은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전임자였던 김효원은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으로 적당하지 않다며 적극적으로 반대를 표하였습니다. 김효원은 인사권을 좌우하는 이조전랑 자리에 외척이 앉는 것은 부당한 일며 당연히 외척인 심충겸은 <이조전랑>자리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조전랑>직을 둘러싸고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은 한동안 지속되며 정국의 대립과 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당시의 관리들은 이 논쟁에 너도 나도 의견을 보태거나 표명하며 찬성과 반대를 하였습니다. 벼슬아치들은 급기야 두 편으로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두 편으로 갈라서게 된 이들은 나중에 정치적 이념적 성격을 띤 붕당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외척이었던 심의겸의 집은 경복궁을 기준으로 서쪽 정동에 있어서 서인이 되었고, 심의겸의 반대파였던 김효원은 경복궁을 기준으로 동쪽 건천동에 집이 있었기에 동인으로 불렸습니다.
바야흐로 조선후기 몇 백년을 지배했던 당쟁의 서막이 열린 것이었는데, 시작은 김효원의 동인, 심의겸의 서인이었습니다.
이것이 점차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쳐서 조선 후기는 여러 개의 붕당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정청: 이조와 병조의 정무를 보는 관청으로 인재를 뽑는 일을 맡아보던 관원인 전관이 일하던 곳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서로 치열하게 다투었던 이유는...
<이조전랑>은 이조의 좌랑과 정랑을 합한 말입니다. <이조전랑>은 관원을 추천하고 뽑는, 요즘으로 치면 중앙부처 인사부의 요직으로 '대통령인사비서관'정도의 직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문관의 관직은 이조에서, 무관의 관직은 병조에서 맡아보았습니다. 임진왜란이후 조선 후기는 학문이 더욱 숭상되던 때였던터라, 주요 관직은 문관이 차지했으므로 이조의 전관이 더 요직이었습니다. 이조의 권한이 커지고 이로 인한 전횡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조선의 주요 언론 간쟁 기구였던 삼사, 즉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관원 선발은 이조 판서가 아닌 <이조전랑>선에서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이조전랑>은 삼사의 관원 중에서 명망이 높고 학식이 깊으며 인품이 보장된 사람으로 추천이 되었습니다.
이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의 후임을 자기가 천거한 사람으로 추천하고 선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사권으로 인하여 막강한 파워를 가질 수 있는 핵심 요직이었습니다. 세력을 키우기 위하여 <이조전랑>은 반드시 획득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보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놓고 '붕당'과 '당쟁'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