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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11시간전

용의 기운을 타고 난 조선의 왕자

창경궁 경춘전 - 정조의 탄생

악...음으음...악...

마마 좀 더 힘을 주시옵소서. 좀 더 힘을.

으으으..악...!


산실청 의녀는 세자빈에게 좀 더 힘을 내라고 응원을 말을 수시로 하였지만 세자빈에겐 의녀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두 번째 출산이었건만 큰 아들을 잃었던 때의 슬픔이 고통으로 변모하여서 그런지 출산의 고통은 두 번의 경험이라고 숙련되기는커녕 배가되기만 했다. 


"산실청에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는 게냐?"

"예, 저하"

"도대체 의녀와 도제조는 무얼 하는 사람인게냐? 세자빈이 두 번째 출산인데 이리 힘든 건 그들이 제 임무를 다하지 못함이 아닌가"

"마마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주상전하를 비롯 온 나라가 기원하는 원자마마가 아니옵니까? 그 어느 때보다 의관들과 의녀들은 제 성심을 다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그런데 왜 아직 소식이 없는 것이냐? 세자빈이 얼마나 힘들겠느냐 말이다!"


세자는 한시도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앉았다 일어났다, 나갔다 들어왔다는 반복 하며 초조함을 드러냈다. 첫아들을 일찍 여읜 슬픔은 둘째의 탄생을 앞두고 기쁨으로 승화되지 못했다. 불안과 초조와 긴장이 세자의 가슴에 더 깊이 자리를 잡을 뿐이었다. 


"저하, 곧 기쁜 소식이 올 것이옵니다. 너무 걱정 마시옵소서."

"그래 그렇겠지, 그럴 거야. 그런데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구나"

"저하, 지난겨울 저하께서 꾼 그 꿈을 떠올려보시오소서. 저에게 길한 꿈을 꾸었다며 얼마나 자랑을 하셨사옵니까? 그 꿈이 필시 이번에 태어나시는 아기씨의 태몽일 거라시며 아주 기뻐하시지 않았나이까. 아주 무사히 건강하고 훌륭한 원손마마가 태어나실 것이옵니다. 마마의 꿈을 믿으시옵소서."


세자는 내관의 말에 지난 겨울밤 세자빈과 합방한 그즈음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그래 그 꿈은 정말 생생하고 영롱했어. 내 살면서 그렇게 신기하고 생생한 꿈은 처음이었어. 


용은 경춘전 전체를 덮을 만큼 컸다. 하늘의 신기를 그대로 받은 듯 푸르른 빛을 띤 빛나는 신룡(神龍)이었다. 용이 경춘전을 한 바퀴 휘감고 나더니 문이 저절로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리부리한 눈에 커다란 흰 수염 긴 코에서는 연신 따스한 바람이 나오고 있었다. 기다랗게 째진 입이 다물지 않고 벌리고 있었다.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나. 세자는 용의 벌린 입을 보고 순간 무섬증이 돋았다. 꾸물꾸물 기듯 날듯 용이 드디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용은 입을 마냥 벌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커다랗고 반짝거리는 구슬을 입에 물고 있었다. 아, 이것이 선인들이 말하던 여의주라는 건가. 세자는 무섬증은 어디로 사라지고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구슬이 탐이 났다. 세자는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의주를 문 용은 이건 어차피 네 거야,라는 듯 안심시키는 웃는 것 같았다. 미소를 띤 용은 방 안을 한 바퀴 돌더니 세자의 침상 속으로 들어왔다. 


세자는 열 달이나 지난 꿈이었지만 바로 어제 용을 본 듯이 용의 모습과 여의주가 생생했다. 누가 지금 그 모습을 그리라고 하면 바로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용을 그리자. 세자빈이 출산의 고통을 견디는 동안 나는 용을 그리는 거다.

세자는 내관에게 지필묵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세자는 비단에 붓으로 꿈에서 본 신룡(神龍)을 그려나갔다. 용을 그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상상화가 아니라 실제로 본 것을 그리기 때문에 한붓에 그릴 수 있었다. 용의 뿔은 하늘이라도 찌를 듯 뾰족했고 온몸을 덮은 비늘은 금방 물에서 튀어나온 듯 촉촉하고 활기가 있었다. 용의 눈에 마지막 방점을 막 찍었을 때 내관 하나가 달려와 고했다. 

"저하, 방금 세자빈마마께서 순산을 하셨다 하옵니다. 원손 아기씨라고 하옵니다. 저하, 원손 아기씨 탄생을 감축드리옵니다."


세자는 태어날 아기가 공주가 아닌 왕자임을 진작 알고 있었다. 신룡이, 여의주가 미리 말해주었었다. 그리고 오늘 태어난 왕자가 이 나라 조선을 구할 위대한 왕이 될 것도 알고 있었다. 비록 자신은 아바마마 눈 밖에 벗어나 한 치 앞을 모를 운명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세자는 묵으로 그린 용그림을 들고 경춘전으로 달려갔다. 경춘전, 햇볕 따스한 봄이라는 뜻의 전각. 봄의 전각에서 새 봄보다 더 신성한 왕자가 태어났다. 


사도세자가 그린 묵룡도는 아들이 태어난 경춘전 한쪽 벽에 걸렸다. 태어난 아이를 보니 세자가 그린 그림 속 용과 닮은 것도 같았다. 아이야 어서 커라. 쑥쑥 커라. 네가 나와 아바마마 사이를 기름칠해 줄 것 같구나. 네가 이 못난 아비 대신 아바마마를 기쁘게 해 줄 것 같구나. 네가 이 나라 조선을 영화롭게 할 줄 것 같구나. 그렇지 아가? 세자는 그림을 걸면서 빌고 또 빌었다. 



푸른 용의 기운을 타고난 아이는 24년 뒤 조선의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조선의 22대 왕 정조대왕이다. 

사도세자가 묵으로 그린 묵룡도는 정조가 임금이 된 후에도 경춘전 벽에 걸렸다. 아들 정조는 그림을 때마다 뒤주에 갇혀 돌아기신 아버지 생각을 하였다. 


"지금 보아도 먹물이 젖은 듯하고, 용의 뿔과 비늘이 움직이는 것 같아 내 그 필적을 볼 때마다 감회가 극에 달해 눈물이 쏟아지곤 하는 것이다!"


사도세자가 그린 용은 그림 속에서만 아니라 실제로 조선의 하나뿐이 용이 되었다. 그 용은 아비의 소원대로 조선의 하반기를 영화롭게 하였다. 사도세자의 소원은 이뤄진 게 아닐까?



창경궁 경춘전

성종 때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다시 지었다. 주로 여성들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 숙종의 정비 인현왕후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 씨가 이곳에서 머물렀다. 혜경궁 홍 씨는 경춘전에서 죽었다. 정조와 순조는 경춘전을 <탄생전>이라고도 하면서 이곳을 되게 아꼈다. 현판은 순조의 글씨이다. 사도세자가 그렸다는 신룡도는 1830년 화재 때 불타서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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