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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Dec 19. 2024

엄마의 정원

엄마는 오늘도 옥상으로 올라갑니다.

옥상에는 엄마가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서 파릇파릇하고 토실토실하게 자라고 있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고추, 토마토, 가지, 상추, 부추 등이 그것입니다. 여기에다가 올해는 들깨까지 심었습니다.

처음에 아이스박스 하나로 시작했던 농작물 키우기는 해를 갈수록 더해져서 지금은 커다란 아이스박스 열 개에 육박합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엄마, 자꾸 저렇게 옥상에 흙 퍼다 놓으면 이 집 무너져요. 이 집 무너지면 엄마는 어디서 살려고요? 이제 고만해요."

엄마는 대답합니다.

"겨우 이것 좀 올려놓는다고 설마 집이 무너질까...."

우리가 엄마가 누리는 일상의 기쁨을 못하게 하려는 수작쯤으로 여기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틈만 나면 엄마에게 꾸짖습니다. 마치 부모가 여덟 살 배기 아이에게 훈육하는 것처럼요.

우리의 성화에 견디다 못한 엄마는 옥상의 아이스박스에 담긴 식물 몇 개를 옮기기로 결심합니다. 없애는 게 아니라,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겁니다. 현관 앞에 있는 마당입니다.

좁고 오래된 시멘트가 벗겨져 누추한 앞마당에 기어이 아이스박스를 새로 갖다 놓습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작물이 심기고 어디서 받아온 꽃씨도 심깁니다.

옮겨온 옥상의 텃밭은 그러나 줄어들지 않습니다. 엄마는 앞마당에 새로운 아이스박스를 갔다 놓았지만 옥상에 있는 아이스박스는 끝끝내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옥상에 있던 아이스박스 하나에 심어놓은 고춧대를 다 뽑아버린 적이 있습니다. 엄마가 옥상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못내 불안했던 우리들의 반란이었지요. 그러나 그 반란은 하루도 못 가 좌절되었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엄마의 고집과 저항과 항변에 자식인 우리는 승리할 수 없는 게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앞마당의 아이스박스는 대문 앞에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들른 엄마의 집 대문에는 화단보다 아이스박스가 더 많았습니다. 내년에 따스한 봄이 찾아오면 엄마의 텃밭이 될지 정원이 될지 모를 식물들이 옥상을 넘어 앞마당을 넘어 이제 대문 앞까지 차지하려나 봅니다.


사는 게 지겹다, 언제 죽을까, 자는 잠에 갔으면.

요즘 엄마가 늘 하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할 때면 늘어진 근육이 더 땅으로 쳐지는 것 같고 덩달아 한숨도 더 깊어집니다.

그러나 앞마당의 아이스박스로 된 정원과 옥상의 텃밭에서 엄마의 식물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은, 마치 당신이 한창때 우리를 키울 때처럼 보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행복해 보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엄마에게 칭찬을 받아본 적이 드물답니다. 대신, ~하지 말아라, ~해라,라는 류의 당위성과 도덕성에 대한 속칭 잔소리로만 부모-자식 간의 대화가 이어졌을 뿐입니다.( 적어도 내 기억은 그렇습니다. 엄마의 기억은 다를 수도 있겠네요.)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왔을 때, 대학 입시에 합격했을 때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엄마와 얼굴에 활짝 미소를 띨 정도의 대화를 했던 것 말이죠.


엄마는 고춧대를 손볼 때, 상추를 딸 때 보름달 같은 얼굴이 정말 보름달처럼 환해집니다. 앞마당 정원에서 군자란의 꽃과 달리아와 맨드라미와 봉숭아를 바라볼 때는 미스코리아보다 더 활짝 웃곤 합니다.

붕숭아 잎을 따서 같이 손톱에 물들지 않을래?

아마도 엄마는 팔십이 넘은 할머니가 아니라 고향집 마당의 봉숭아잎을 따고 있는 십 대 소녀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친정집을 나와 우리 집으로 향하던 날, 엄마의 정원에 있는 엄마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사춘기를 보내고, 결혼을 하고, 내 아이도 자란 우리 집을 봅니다. 문득 가슴에 뭉클한 것이 올라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제 단어는 부족하고 문장도 모자랍니다. 솔직히 제 감정이 무엇인지 적확히 저도 잘 모르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그림을 부탁했습니다. 이런저런 설명과 우리 집을 찍은 사진을 한 장 주면서 말이지요.


친구가 그림을 보내왔습니다. 친구 말이 이 그림의 제목은 '엄마의 정원'이랍니다.

엄마의 정원, 이라. 내가 생각지도 못한 멋진 제목 아닙니까? 식상한 것 같지만 듣고 보니 아주 제격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림을 어디에 걸까, 집안 곳곳을 돌아다녀봅니다.

거실 벽에 걸까? 그러다 시댁 식구들이 보면 섭섭해할지도 몰라.

안방에는? 안방에는 부부와 관련된 것 말고는 걸면 안 좋다던데.

부엌 식탁 위에 걸까? 거기는 정물화나 풍경화를 걸고 싶었는데.

뭐야, 그럼 걸 데가 없는데. 이 그림은 어쩌지?

내 마음을 다시 한번 들여다봅니다. 왜 선뜻 '엄마의 정원'을 걸기가 어려운 걸까?

엄마의 모습이 담긴 그림을 벽에 건다는 게, 왠지 누군가 돌아가시고 난 후 고인을 기리기 위해 집에다 걸어놓는 초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서양 귀족-공작이나 백작 등-이 죽으면 고인의 초상화를 벽에 순서대로 걸어놓는 것 있잖습니까?

그런 생각이 한번 머릿속을 차지하니 아무리 몰아내려 해도 나가지를 않는 겁니다.


지금 그 그림은 포장한 것 그대로 서재 한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마 당분간은 '엄마의 정원'을 위해 벽에 못질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글에 표지로 걸어놓고 한 번씩 들여다볼까 합니다.

벽에 결린 엄마의 정원은 이따가 한참 이따가, 벽에 걸어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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