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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May 16. 2020

서평 - 할레드 호세이니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호세이니의 전작 '연을 쫒는 아이'를 보고난 후 바로 이 책을 읽어보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호세이니의 첫 번째 작품 '연을 쫓는 아이'가 소련의 아프간 침공 즈음 아프간을 탈출한 가족, 더 좁게는 남자 주인공과 그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하여 아프간의 역사와 생활, 이민후의 미국생활을 그린 작품이라면,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소련침공을 거치고 무자히딘의 시절을 지나 아프간의 재건까지 아프간에서 견대고 살아남은 두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그 주변의 이야기이다. 


     두 여자가 있다. 한 명은 헤라트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난 1959년생 잘릴의 사생아 마리암이고 다른 한 명은 수도 카불에서 화목한 양친밑에서 1978년에 태어난 라일라이다. 두 여자의 나이차이는 19살. 그러나 운명은 이 두 여자 모두를 라시드라고 하는 폭력적이고 마초적이며 전형적인 가부장적 시각과 생활태도를 가진 한 남자의 부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원인은 전쟁, 연이은 국제전과 내전 그리고 당시 이슬람(지금도 그런 나라가 아주 많지만)원리주의 지독한 여섬폄하와 남성우월주의 그것들이다.


     라시드의 폭압과 폭력, 숨막히는 독재속에서 두 여인은 스스로 연대를 깨우치게 되었고 그 연대의 마음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았었어도 두 여인의 내면을 이슬람의 유일신 알라의 마음처럼 깊고 넓게 만들었다. 전쟁은 여자와 아이와 노인의 피와 땀과 눈물로 범벅된 방관자들의 권력투쟁터이다. 일부의 힘과 돈을 위해 항상 제일 약한 고리가 먼저 아파하고 끊어진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팩트이다. 명실상부 1974년 쿠데타부터 2001년 9.11테러때까지 이어진 아프간 안에서의 그리고 아프간 바깥에서의 기나 긴 전쟁은 이 두 여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라일라와 그의 아이들-아지자와 잘마이-을 지키기 위해 마리암은 스스로를 희생하고 그녀의 숭고한 희생을 잊지않은 라일라는 첫사랑 타리크와 함께 아프간으로 돌아가서 고국의 재건에 하나의 밀알이라도 되려하고  이 전쟁을 기억하고 마리암을 기억하려고 한다. 

     이 책은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이 얼마남지 않은 오렌지의 과즙을 쥐어짜내는 것 처럼 너무 힘이 들고 아프다. 그만큼 담고있는 내용이 많고 말하고 싶은 결정적 순간도 많다. 1974년부터의 아프간 전쟁, 수없이 언급되는 코란과 이슬람의 교리들, 당시 아프간 및 아프간 여인들의 삶, 그 속에서 눈부신 여자들의 연대. 매 챕터마다 이야기는 애절하고 표현은 보석같았다.   


     책의 3부즈음에 마리암을 허리띠로 매질하려는 라시드를 라일라가 몸으로 막아서는 장면이 두 여인사이에 연대가 싹터오르는 첫번째 장면일 것이다.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온 라일라를 마리암은 질투와 불안의 시선으로 줄곧 바라보다가 라일라의 이 동작으로 마리암은 그들 모두 피해자이며 손잡고 맞서야 할 상대는 바로 그들의 남편, 폭압의 대명사 라시드라고 깨닫게 되었다.  이 장면에서 나는 왠지모를 울컥함과 약간의 짜릿함을 느꼈다. 서로가 각자 피해자라고만 생각을 해왔는데, 때리려는 라시드앞에서 매맞는 마리암, 그 모습을 두려움에 떨고 지켜보는 라일라, 그 순간에는 폭력의 희생자로서 공포의 대상자로서 서로가 서로를 지켜줘야만 한다는 것을 몸으로 현실속에서 바로 깨달은 것이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약자들이 현실을 깨닫고 각성하는 그 순간은 언제나 짜릿하다. 비록 이 순간만 볼 때는 답없고 갑갑한 연대의식의 출발이긴 해도 역사가 앞으로 전진하는 순간은 거의 대부분 순간은 짜릿하지만 결말까지의 과정은 지루하고 힘들기 마련이다. 불과 2~30년 전만해도 이보다는 아니지만 숱한 억업의 역사를 안고있는 대한민국의 여성들이기에 더욱 더 체감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는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는 말들이 회자되고 있다. 일부분 사실일 수도 있겠으나 여성이 메인인 조직에서나 혹은 여성 구성원이 일부라도 상하관계로 있는 조직을 상대로 21세기인 현재까지도 공공연히 말들을 하고 있다. 물론 일부 사실일 수도 없다. 절대적으로 아닐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이든지 '절대'적인 것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그러면 이 역시 이 말을 이용하여 득을 보고 있는 어느 무리들의 프로파간다가 아닐까. 아프간 여성들의 희생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마초처럼 굴지만 그 여성들 없이는 하루도 살수없었던 아피간 남성들처럼 말이다.

    마리암과 라일라는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서로를 지켜주려는 삶을 살았다. 마리암의 방식으로 라일라의 방식으로. 그리고 그 방식은 폭력적이지 않았고 또한 누구를 죽이려는 방식이 아니라 모두를 많은 이를 살리는 방식이었다. 짧지않는 세월을 주로 회피적 선택을 하며 살았던 이 두 사람은 마침내 그들 스스로의 성취적 선택을 하였다. 떠밀려 마지 못해 살아왔던 것과는 달리,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담대하고 아름다웠다. 


     나 역시 회피적 선택을 하였던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오로지 나만의 생각과 결정으로 지금 현재에 있다. 마리암과 라일라가 보여주었던 것 처럼 나도 지금을 시작으로 성취적 선택의 삶을 살아보려 한다. 제발 이 결심이 일상속에서 안개처럼 사라지지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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