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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Aug 26. 2020

엄마표 영어 -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요

영어 홈스쿨링 실패기

영어, 온 대한민국 국민의 염원이자 숙적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과거에도 현대에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가져왔고 신분 상승을 위해 더 많은 문을 열 수 있었으며 게다가 부까지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일 것이다. 


20대에 다녔던 외국계 회사의 사장님은 덴마크 사람이었다. 덴마크는 전 국민이  공교육만으로 영어를 모국어급으로 말할 수 있는 나라이다. 일개 사원이 사장님과 영어로 대화를 할 일은 한 달에 한두 번밖에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회사 입사 전 25년 동안 내가 영어로 말했던 시간의 총량보다 입사 후 1년간 근무하면서  사장님과 영어로 대화했던 시간이 더 많았다. 외국계 회사를 다니면서 내가 절실히 느꼈던 점 중 하나는, 회사에서,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승진 가도를 타기 위해서는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유학파도 어니고, 흔한 어학연수 한번 다녀온 적 없었고 전공으로 영어를 배운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외국계 회사 입사 후에 민병철어학원 수업과 EBS 교재로 어찌어찌하여 회사를 계속 다닐 만큼의 실력만 갖추게 되었다. 내가 '생존 영어' 실력이라고 말하고 다녔던 내 영어 말하기 실력이란 내 업무 역량을 외국 본사 윗분들에게 영어로 유창하게 어필해서 픽업되는 수준이 아닌 딱 내가 맡은 일을 이메일로 설명할 정도였다. 실력은 조금 모자라도 영어로 자신을 외국인에게 충분히 어필하고도 남음이 있는 사람이 승진의 기회를 잡았다.  


내가 회사에서 느낀 영어로 인한 좌절감을 내 자식들에게는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이 회사를 다닐수록 들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영어 공부를 시키자. 더 이상 늦어지면 안 돼!" 당시 초등 2학년과 7살이었던 아이들을 영어의 바다로 빠뜨리기로 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던 <잠수네 아이들 소문난 영어공부법> 속 엄마표 영어 공부였다. 


내가 엄마표 영어를 선택한 것은, 

첫째 학원비를 좀 아껴보자는 심산이었고 둘째 덕분에 나도 영어 말하기를 같이 연습하자는 속셈이었으며 셋째 '딱 내가 맡은 일을 이메일로 설명할 정도 회화실력만으로도 7세 10세짜리에게 가르치는 정도는 준비 없이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자만이 깔려 있었다. 


잠수네 영어에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영어 흘려듣기, 집중 듣기, 읽기, 말하기 등의 순서와 구체적 실행 방법이 적혀 있었다. 책을 한번 읽어본 후 나는 본격적으로 엄마표 영어를 시행하기로 했다. 우선, 퇴근하고 집에 가자마자 흘려듣기를 위해 영어 CD부터 틀었다. CD에서는 영어로 된 동요, 동화가 흘러나와 텅 비었던 집 안을 영어 소리로 가득 채워주었다. 아이들은 별 말이 없었고 나는 굿 스타트에 회심의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며칠 후 7살 작은 아이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엄마, 영어 동화 듣기 싫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뿡뿡이 비디오나 틀어줘"

"이따가 엄마가 무슨 말인지 가르쳐줄게. 일단 듣고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야"

아이를 다독이고 있는데 이번에 큰 아이가 동생을 거들었다. 

"엄마, 영어만 계속 나오니까 집에 오기 싫어. 할머니 집에 그냥 있고 싶어. 엄마 계속 영어 틀면 나 그냥 할머니 집에서 잘래."


남매지간이라 노는 것도 다르고 취향도 다른 두 아이가 어쩐 일인지 오랜만에 합이 맞아 둘이서 엄마에게 시위 아닌 시위를 하고 있었다. 계속 영어를 틀면 집에를 안 오겠다니! 나는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흘려듣기와 노출하기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으니 영어동화책을 같이 읽어주는 것으로 방법을 바꾸어보기로 했다. 쉬운 동화책을 같이 읽고 해석해주면서 중간중간에 간단한 단어와 문장을 영어로 말한다면 아이들이 영어와 친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뒤, 퇴근이 조금 늦었던 어느 저녁, 영어책 한 권을 들고 거실로 가면서 아이들을 불렀다. 

"애들아, 오늘부터 엄마가 영어로 된 동화책을 읽어줄게. 너희는 듣기만 해. CD보다 엄마랑 함께 하는 책 읽기가 더 좋겠지?"

"원스 어폰 어 타임, 데얼 해드 리브드 어 걸 네임드 신데렐라~~~ 블라 블라~~~"

짧고 쉬운 영어 동화를 읽어 나갔다. 얼마간 이어진 영어 동화책 읽기에서 아이들은 잠자코 듣고 있는 듯했다.  나는 내친김에 영어로 대화를 시도했다. 


"헤이 베이비, 체인지 유얼 클로즈 앤 와시 유얼 페이스. 오케이?"

"스위티, 컴온. 렛츠 잇 디너. 마미 메이드 킴취보끔봡. 잇 쏘 딜리셔스."

"두 유 노우 디스? 디스 이즈 챕스틱. 젓가락. 챕스틱은 젓가락이야. 오케이?"

"텔미 왓 잇 이즈. 이게 뭘까? 마미 톨드 잇 어 퓨 데이즈 어고. 엄마가 얼마 전에 말했는데. 이건 우산, 엄브렐러야. 디스 이즈 엄브렐러~. 유 갓 잇?"

처음 한 두 번은 '어휴'라며 옅은 한숨을 쉬던 아들이었고 딸은 손으로 귀를 막기도 했지만, 회유도 하고 설득도 하면서 며칠을 더 엄마표 수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표 영어를 시작한 삼 주쯤 지난 시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도 퇴근 후 집에 오자마자 나는 말했다.

"마이 러블리 선 앤 도러, 어서 씻자. 허리 업 포 와싱 페이스 앤 핸즈"

"허리 업. 허리 업. 어서어서 빨리 하자"

그런데 갑자기 딸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악~! 엄마, 제발 영어 싫어요. 싫어. 엄마 영어 자꾸 쓰면 엄마 미워할끄야!"


아이들은 가방도 내팽개치고 거실 한가운데 퍼질고 앉아 '태업'을 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반항으로 당황한 나는 이런 일이 잘 없었으므로 일단 진정하고 이유를 듣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말했다. 그전까지 영어를 제대로 접한 적이 없는데 어느 날부터 엄마가 갑자기 영어로 말을 거니까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고 했다. 집은 쉬러 오는 곳인데 엄마 얼굴도 저녁에 밖에 못 보는데 집에 오는 것이, 엄마 얼굴을 보는 것이 너무나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영어가 더 싫어졌고, 영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고, 다시는 영어공부를 안 하고 싶다고 말했다. 두 아이 모두 다.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아이들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왜 나는 이른 영어 교육을 시키려고 했던가?

이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었을 때 영어 공부하는 시간을 줄여주고 싶었고, 어떤 직업 가지든 좋고 많은 기회들을 잡게 해주고 싶었으며, 학원에 다니는 시간과 비용을 아껴보고자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이유는 결국은 나 좋자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과 대화 끝에 타협을 보았다. 집에서는 더 이상의 영어는 없다. 엄마는 영어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학원에는 다니겠다. 준비되지 않은 엄마표 영어 대신 돈으로 나보다 나은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했다. 

영어 학원에 등록하려고 몇 군데의 학원에 상담을 받으러 다녔다. 물론 어느 정도 장사 속이 있었기도 하겠지만, 공통된 학원 측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가정에서는 사랑과 안정을,  공부 지도는 전문가에게




몇 년의 시행착오 끝에 얻은 잠수네 영어공부법을 나는 제대로 준비도 않고 얕은 내 실력만으로 투자 없이 가르치려 하였다. 비록 아직 나이 어린아이들이었지만 자칫하면 공부와 영어에 대하여 매우 안 좋은 기억을 아이들에게 남길 뻔한 것이다. 더 안 좋은 것은 부모-자식 간의 사이가 나빠질 뻔한 것이라 하겠다. 나는 어설픈 공부지도로 아이들이 미워하는 엄마가 되는 대신 학원비를 벌어오는 열심히 일하는 워킹맘이 되기로 했다. 아이도 낮 시간에 학원을 다니니 친구들과 더 놀 수 있게 되어서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동의를 해주었던 것이다. 

엄마표 영어교육에 실패한 후에 나는 "엄마표 영어? 엄마표 학습?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아서라, 말아라"라며 주변 엄마들에게 섣부른 도전을 말리는 사람이 되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고도 여전히 영어 때문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는 나는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 엄마표 영어 학습이 문제가 아니라, 아무 준비도 없이, 아이들 수준에 맞는 재미있는 공부 방법에 대한 연구도 없이, 덜컥 시작한 내 스타일의 엄마표 학습이 문제가 있었음을. 

하지만,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못하겠다. 엄마표 학습. 그거 책보고 한다고 해서 아무나 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아무나 하는 거도 아닌 것 같다. 엄마표 영어 학습에 성공하는 엄마들을 존경한다. 그리고 나는 나름의 변호를 하자면, 아이들은 커가면서 본인이 필요한 공부를 필요한 때에 할 것이라고 애써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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