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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Oct 11. 2020

나의 서양미술 순례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Project 6

석 달 전 이삿짐을 쌀 때 책장을 정리했다. 두어 번 이사를 다니다 보니 이삿짐으로써 책이 만만찮은 큰 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번에 이사할 때는 책 욕심을 버리고 책장을 비운 채로 이사할 마음을 먹었다. 책장 한 귀퉁이에서 손바닥 크기만 한 A5 크기의 작은 책을 발견했다. 아주 오래전 한번 읽고는 내팽개쳤던 책이다. 이 작은 책은 일본 순사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꼭꼭 숨어버린 어느 독립투사처럼 우리 집 책장 한 구석에 30여 년의 세월 동안 숨죽이고 있었다.


책이 작아서 책장 안쪽 콕 처박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 이번 주 불현듯 내 눈에 띄였다.


이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이삿짐을 정리하고 난 후 석 달이 지난 며칠 전 책장 한쪽 구석에 처박혀 눈에 띄지 않았던 이 책이 내 눈에 다시 띈 날,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프로젝트의 시작 글을 보았던 것은. 이 책이 아주 강렬하게 나에게 신호를 보내온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프로젝트를 통해서라도 나를 좀 돌아봐줘”

아무 주저함이 없이 나는 프로젝트에 신청을 했고 구석에 짱 박혀있던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그렇게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1971년 4월 27일 7대 대통령 선거가 있기 열흘 전, 정부는 ‘재일동포 유학생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당시 간첩단 사건은 박정희의 패배가 확실할 것 같았던 선거의 결과를 뒤집기 위해 그가 자주 쓰던 술책이었다. 술책대로 박정희는 그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 때문에 간첩이 되어야만 했던 당시 서울대를 다니던 두 재일교포 학생은 사형을 언도받았다. 두 학생은 형제였으니 이름은 서승, 서준식이다. 두 형제는 1심에서 사형을 2심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고 각각 1990년과 1988년 출소할 때까지 0.75평의 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는데 형인 서승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석유난로를 끌어안고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992년에 출간. 28년이나 되어서 많이 낡았다. 구판은 절판되었고 2002년에 신판이 출간되었다.  표지는 미켈란젤로의 '노예'로 서경식은 이 작품을 보면서 형들을 생각했다.


두 형제가 한국의 감옥에서 수인의 몸이 되었을 때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작가 서경식은 고작 스물의 청년이었다. 두 형이 붙잡힌 그날로부터 서경식의 가족들의 삶은 오직, 갇혀 있는 혈육을 살려내는 일에 바쳐졌다. 끊임없이 현해탄을 오가며 자식들 옥바라지를 하던 어머니가 옥바라지 9년째에 암으로 세상을 떴고 3년 뒤 아버지마저 그 뒤를 따랐다. 남은 몫은 서경식과 그의 누이 차지였다. 서경식 본인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에게는 망국의 설움에서 식민지 시대와 해방, 분단, 4.19와 5.16을 거쳐 10월 유신과 10.26, 12.12와 5.18까지 질곡의 현대사가 그의 개인사와 한데 엉겨 지워져 있었다.


서경식은 1983년 서른 초반의 나이에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갔다. 잠시 그에게 지워진 책임과 의무에서 자유로워지고자 떠난 여행의 첫 번째 여행지인 벨기에 호로닝헤 미술관에서 그는 ‘캄뷰세스 왕의 재판’이라는 그림을 보게 되었고 자유로워지고자 떠난 여행은 그만 미술관 기행이 되고 말았다.

여행길에 무심코 들른 미술관이나 성당에서, 갑자기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발길이 얼어붙는 경우가 있다. 한 장의 그림, 한 덩어리 조각상이, 시공을 초월해서 사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마력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내가 그런 경험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돌이켜보건대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시작이었다.

-14쪽

 

‘캄뷰세스 왕의 재판‘을 보고 서경식은 두 아들을 감옥에 보내고 아내까지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자신도 죽음을 기다리면서 세상에 대해 나른해지던 아버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루브르 미술관에서는 미켈란젤로의 ‘노예’를 보면서 영어의 몸이 되어있는 두 형의 반항하는 모습을 감상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고호와 테오의 무덤가에 서서 고호가 바라보고 그렸을 ‘거친 하늘과 밭’을 바라보면서 고호와 테오 사이에 있었을 ‘창조하는 인간’과 ‘감상하는 인간’ 사이의 단절을 생각하지만 두 형을 떠올리며 그 단절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스페인에서 ‘게르니까’를 보면서 광주 학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 바이욘느의 보나 미술관에서 ‘화가 누이의 초상’을 보면서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옥바라지를 묵묵히 해내던 가녀린 누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목차. 각 챕터 속에는 제목의 그림뿐 아니라 다른 그림들에 대한 감상평도 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 소개된 그림들은 보티첼리의 ‘비너스’나 다빈치의 ‘모나리자’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림은 하나도 없다. 소개된 그림의 대부분이 아프고 고통스럽고 견디고 버텨내는 그림이나 조각들이다. 서경식은 여행을 하면서도 도무지 형과 누이와 부모님과 조국을 외면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그의 시선을 붙드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고통에 몸부림치거나 핍박에 처연한 것뿐이다. 우리의 현대사는 왜 이리도 고통스럽고 처연해서 많은 사람들을 다 투사로 역사가로 만들었던 걸까?

책의 앞부분 도판에 있는 '캄뷰세스왕의 재판' 서경식은 이 그림으로 인해 미술순례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책장에서 이 책의 울림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은 다음의 글귀 때문이었다.

한 사람의 선택한 목표를 향한 길에서는 마음과 의지의 비이기성과 강직함만이 모든 것을 정복할 것이다 – P Kropotkin

쓰고 보니, 이 말은 선배보다 저에게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 92.7.12. 旭


대학 3학년 때 1학년이던 후배 놈이 생일 선물로 감히 선배에게 책을 선물했다. 그 책의 뒷장 끄트머리에 적힌 글귀를 선물 받을 당시에 보았을 것이 분명한데 다시 읽은 글귀는 생전 처음 본 것 마냥 생소하였다. 겨우 신입생이었던 그놈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가 어떤 책인지 제대로나 알고 선물을 했을까? 제 놈이 아는 미술 작품을 그것에 대해 무지해 보이는 선배가 좀 깨우치라는 의도였을까? 아니면 저는 모르지만 왠지 미술조차도 다 알 것 같은 선배에게 바치는 아부였을까?

후배가 손수 써준 생일 축하 메세지. 자필 편지는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30년이 다 되어가는 빛바랜 낡은 책을 펼쳤을 때 발견한 후배의 단정한 손 글씨 때문에 나는 28년 전으로 귀환하였다. 28년 전 20대의 나는 서경식만큼 주변의 고통에 같이 아파했고 시대의 아픔에 공감했으며 말도 안 되는 현실에 분노하는 청춘이었다. 당시 시대를 끌던 화두는 우루과이라운드와 북한 핵 그리고 92년  대통령선거였다. 돌이켜보면 나 스스로도 잘 알지도 못한 이슈였었는데 그때는 잘 안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던 것 같다. 선배된 의무로 후배를 교육시키고 그들을 시대에 분노하는 편으로 만들고자 나름 열심히 살아내었다. 하지만 어쩌랴! 나도 그저 젊음을 누리고 싶은 20대였다. 92년에 갑자기 등장한 서태지의 리듬에 반해 '난 알아요!'를 가슴속에 품고 다녔다. 뭘 알고있는지 뭘 알아야하는지도 모른 채.


내가 후배한테 이 책을 받을 즈음은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얼마지나지않은 시점이었다. 대학생들의 유럽배낭여행이 시작되었다. 긴 두 달의 여름방학동안 제 덩치만한 배낭을 매고 동경의 땅 유럽으로 떠나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마음속으로 엄청 부러웠다. 나도  바티칸에서 천지창조를 보고싶었고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도 만나고 싶었다. 베를린장벽 앞에 서면 어떤 기분일지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부러움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부럽다고 하면, 여행비를 만들지못하는 내 무능력을 인정하게되는 것 같았고 여행비를 찬조하지못하는 부모님을 원망하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아직도 억압의 땅인데 현실을 등지고 도피하는 것도 같았다. 겨우 22살 뭣도 아닌 주제에. 조금만 더 치열해지면 세상을 우리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줄 알았던 시기였다. 부러움을 감추고 '나중에 유럽은 꼭 가봐야지'하고 혼자만 아는 결심을 했더랬다. 

화가가 시키는대로 자세늘 잡아야했던 그림속 누이를 보며 어쩔수없이 옥바라지늘 해야했던 누이의 슬픔을 마주했다.

치기어린 이 마음을 후배가 알아보았을까? 생일에 뜬금없이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선물해주었다. 나는 서경식이 누군지도 몰랐고 서승, 서준식도 몰랐다.

"언제나되야 내가 유럽을 가고 이 그림들을 현실 대면할까?"하고 고마운 마음을 이렇게 퉁쳤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벌게 되고 유럽 여행을 하게 되면 후배의 선물대로 서경식의 미술 순례를 나도 해봐야지.라고 생각했었는데 강산이  몇 번 바뀌는 동안 책의 존재도 까맣게 잊고 후배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졌다. 그러는 사이 몇 차례 갔던 유럽여행에서 20대 청춘의 각오는 어디 가고 그가 봤던 그림을  내 눈으로 확인하는 대신  세상이 모두 다 아는 3대 화가니 르네상스의 명화니 하는 것들만 보고 왔다.


책을 다시 읽으면서 다음 번에는 책  속의 그림  중 1/3이라도 봐야지.라고 다시 생각이 들었다.(책속의 그림들은 여기저기 흩어져있어 전문 미술학도가 아닌 다음에야 다 보기는 어려울듯 하다) 하지만코로나 19 때문에 언제 다시 유럽을 방문하게 될지 예측이 안 되는 세상이다. 다시 꺼낸 <나의 서양미술 순례> 속 그림들을 다시 보게 될 날이 올 때, 서경식의 그림들을 보겠다는 지금의 내 결심이 온전히 지켜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대의 각오가 감쪽같이 날아가고 세속과 한통속이 된 것처럼 지금의 결심도 몇 년이 지나면 변질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코로나 종식을 고대하며 내 결심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종종 들쳐보아야겠다.

그나저나, 행정학과 권X욱! 잘 살고 있나? 어디 있던지 나는 네가 준 이 책 덕분에 너를 종종 생각할 거다. 너는 어떠니?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Project>는 계속됩니다. 다른 작가분과 함께 매거진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매일 각기 다른 작가의 1~2편의 글이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함께 써 내려갈 것이고, 함께 책으로 묶을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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