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에 발간되어 채 1년도 못된 2020년 7월에 10만 부가 넘게 팔린 책이다. 근래에 발행된 책으로는 최단기간에 10만 부를 넘겼다고 한다. 사람들은 무엇에 끌려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손에 들게 되었을까? 이 책의 선풍적 인기 시즌이 지나고 가을 찬바람처럼 조금은 잠잠해졌을 것 같은 2020년 10월, 독서모임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같이 읽었다.
왜 결정장애라는 말을 쓰셨어요?
저자가 <선량한 차별주의자>에 대하여 고민을 시작한 계기는 한 토론회에서 자신이 사용한 한 단어-결정장애-때문이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요즘 너무도 흔하게 사용하고 있는 말, '결정장애'라는 단어를 여느 때처럼 무심코 발언했는데 하필 발언의 자리가 혐오표현에 대한 토론회였다. 위의 말은 토론회에 참석했던 어떤 사람이 저자에게 물었던 질문이었다. 저자에게는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질책으로 들렸고 그래서 '사과'를 고민했다. 하지만 동시에 저자는 '왜, 이게 뭐가 문제지?'라고 사소한 일로 치부하려는 방어기제가 발동했다. 바로 이 지점이 저자에게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끄집어내는 발단이 되었다. 우리가 평상시에 차별로 느끼지 않는 말이나 사소한 행동이 누군가에는 차별로 느껴지며 반면에 사소한 말과 행동을 차별로 생각하지 않는 누군가는 그것이 지극히 평범해져서 '일상'이 되고 '특권'을 누리고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차별이 구조화되고 일상화되어 차별인지도 모르고 행하게 되는 차별, '선량한 차별'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책의 말하고자 하는 바는 프롤로그와 책의 표지(겉표지와 속표지 모두)에 다 드러나 있다. 프롤로그와 표지만 잘 읽어보고 눈여겨보아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겉표지에는 4마리의 머리를 꼿꼿이 세운 백조가 상처 입고 고개 떨군 한 마리의 검은 미운 오리를 눈 아래 깔아보고 있다. 다수가 소수를 차별하고 있지만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미운 오리는 이미 차별이 구조화된 상태에서 저항을 할 수 없어서 그저 침묵할 뿐이다.
책의 겉표지와 속표지
우리는 지난 몇십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차별을 갖고 살아왔다. 지역 차별, 남녀 차별, 학력 차별, 자본가-노동자의 계급 차별, 독재와 민주라는 정치적 신념의 차별 등등. 어떤 것은 여전히 진행형이기도 하지만 과거와 비교해볼 때 세상은 많이 진보되었다. 짧은 시간 안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이제 우리 안에 극심한 차별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수의 사람은 극심한 차별은 없다고 생각하며 그들은 간간이 차별을 논하는 소수에게 뭐 그리 예민하냐고 반문한다. 이제 우리도 배울만큼 배웠고 알만큼 알지 않냐고. 그래서 차별은 옅어졌고 아주 극히 조금 남아있을 뿐이라고.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탄생
이렇게 해서 과거 갖가지 차별에 저항해왔던 다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어 가고 있다. 어떻게? 보통은 못 느끼지만 자리가 바뀌거나 입장이 바뀔 때는 다수도 소수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차별을 느끼는 우리 소수는 대개는 다수이고, 다수였던 일부는 상황에 따라 소수가 되기도 한다. 이런 변화와 입자의 바뀜은 우리가 차별을 당한다고 생각을 들게 하지만 우리가 차별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배웠다고 해서 향상 행동으로 드러나지는 않는 법인데 사람들은 배워서 머릿속에 있는 것을 행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고, 다수와 소수를 오가면서 차별함과 차별당함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다.
차별은 어떻게 지워지는가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웃음으로 누군가를 차별한다. 한 예능프로에서 "웃자고 한 일에 죽자고 덤벼든다"며 죽자고 덤벼드는 편을 웃기는 편으로 만들었고 TV를 시청하는 우리는 그 웃음을 즐겼다. 웃자고 한 일이나 말에 죽자고 덤벼든다면 그 사람은 쿨하지 못하고 예민하거나 웃긴 사람으로 인식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웃음 코드'로 바뀌어버린 소소한 차별(어떤 이에게는 전혀 소소하지 않은)에 덤벼들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이로써 차별은 서서히 공고해지고 있다. 이렇게 차별이 자연스럽게 어떤 이들에게 지워지고 다수는 그것이 차별인지 아닌지도 구분이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차별의 구분이 어려운 건지, '결정장애'의 저자처럼 차별을 사소한 일로 치부하는 방어기제가 발동된 건지. 우리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차별은 이렇게 지워지고 있는 것이다.
차별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
마지막 3부에서 표지 속 검은 미운 오리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4마리의 백조에게 대응을 하고 있다. 2005년 헌법재판소의 호주제 헌법 불일치를 통해 사회에 혼란이 야기될 거라던 것은 기우로 드러났고 오히려 사회에 새로운 질서가 잡힘으로써 검은 미운 오리는 흑조가 되고 흑조는 숙였던 고개를 조금씩 들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롤스의 '시민 불복종'을 가져오기도 하고 로크의 '자유론'을 인용하기도 하면서 차별이 발생할 때 정확히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 제대로 '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저자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주장을 마지막에 강조한다. 왕족이나 귀족이라는 소수가 누리던 자유를 민중이라는 다수와 사회 바깥에 놓여 있던 소수의 사람들 모두가 향유하게 될 때까지 세상은 아직 더 변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 다수는 쉼 없는 각성을 해야 한다고.
생활 속에서 '결정장애'라는 말을 참 많이도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책의 도입부와 1부에서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여러 가지 선택지 중에서 딱 맞는 하나를 고르지 못하는 나를 두고 '나는 결정장애야'라고 얘기하곤 했다. 별 의심 없이 '장애'라는 단어를 썼던 건 그 단어가 가진 의미를 사소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진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은 것 하나라도 무심했던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습관이 실은 얼마나 특권적인 것인지를 인지하게 되었다. 나는 실은 차별받는 사람 무리에 속하는 줄 알았는데 실은 차별은 아주 조금이었고 혜택을 더 많이 누리는 사람이었다. 일상의 차별과 평범한 특혜를 알게 해 준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선택을 받았나 보다. 그러나 한 가지, 뒤로 갈수록 약간은 지루해지는 것은 반복이 잦고 설명 논조가 되풀이되는 이유도 있지만 차별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 대해 저자가 풀어놓은 대처가 너무 광범위하고 뻔한 이야기에 가깝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아니 그럼, 뭐 더 상세히 구체적 방안을 지금 내놓을 수도 없었을 것도 같다. 저자는 의문을 제기하고 문제를 보는 학자이지 실행 방안을 내놓는 행정가나 행동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행동은 이 책을 읽은 독자인 나부터 시작해야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