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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Dec 11. 2020

언니들과 오빠들의 "라떼..."는 그만

소심한 X세대의 주저리

며칠 전 아는 분(편하게 그냥 A라고 하겠다.)이 점심을 사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기억을 하지 못했지만 내가 어떤 도움을 주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밥을 사주고 싶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에는 두 종류가 있다. 내가 하지 않은 밥과 남이 사주는 밥이다. 그런데 내가 하지 않은 남이 사주는 밥이라니! 이건 옷을 차려입고 약간의 변장을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을 먹기 위해서 나는 소소한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고 발걸음도 가볍게 A를 만나러 나갔다. 

식사 자리에는 A의 지인인 B도 함께였다. 나를 제외한 A, B는 모두 50대 후반의 남성들이었다. 어쩌다 보니 대화는 “라떼” 경연장 모드로 바뀌어 “내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 하면서 “당신 라떼는 어땠는지?”를 예의상 물어보는 자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B가 ‘그 시절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를 연상케 하는 아련한 눈빛을 하고서 나에게 물었다. 

“홍월씨, 미국 가보셨어요?”

“아뇨, 미국은 아직...”

“저는 주재원으로 미국에 5년 정도 살다왔는데 말이죠. 참 고생 많이 했는데 그래도 돌이켜보면 그때는 참 좋았어요.”

나는 빌었다. 제발 B가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주구장창 하면서 내게서 호감도를 앗아가지 않기를. 하지만 내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던 인생이 그날따라 특별히 내 사정을 봐줄 턱이 없었다. B는 점심 식사가 끝날 때까지 미국에서의 고생담-이라고는 하지만 나에게는 무용담처럼 들리는-을 들려주었다. B는 무료한 주말에 할 게 없어서 골프를 치면서 보냈다. B는 휴대폰도 잘 터지지 않던 시절 미국 횡단 여행을 감행할 만큼 무모했다. B는 먹을 게 없어서 햄버거랑 콜라를 얼마나 먹어댔던지 살이 많이 쪘었다. 는 것이 B가 말한 고생담의 실체였다.(이 외에도 그때 그시절의 회상은 밥 먹는 한 시간 반 동안 내내 이어졌지만 내 기억력은 예전같지 않다.)

눈앞에 애처로이 널브러진 잔뼈 가지와 한라산 정상의 백록담처럼 자작하게 남은 대구탕 국물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대구탕이 과연 ’그 시절 미국 라떼‘와 교환할 만한 가치가 있었나를 생각했다. 


늘 이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종종 일어나는 일임은 맞는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60년대에 태어난 지금의 50대 언니, 오빠들과 반가운 얼굴로 만남을 시작하건만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해서 ‘그때가 좋았지’로 피치를 올리다가 ‘너희들은 모른다’로 끝나는 대화, 아니 훈화로 종종 마무리가 되는데 만남을 뒤로하고 자리를 뜰 때의 기분은 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들어갔다가 휴지를 찾았는데 남아있는 것은 빈 휴지 심지뿐인 것을 알았을 때와 같은 낭패감이었다. 나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인 건가, 내가 못된 사람인가. 하는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A와 B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느꼈던 감정의 근원에 대해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원리를 연구하듯 고뇌했고 순수한 이성을 비판한 칸트처럼 사색을 시도했다. 무엇이 70년대 생인 나와 언니, 오빠들의 생각을 다르게 만들었을까? (개인의 누적된 경험에 따른 고민의 흔적이므로 태클 자제를 부탁합니다.)



나는 71년도에 태어났다. 71년도에는 가장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다. 어떤 통계에서는 108만 명이라고도 하고 어디에서는 103만 명이라고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역대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고 본격적으로 초가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기 시작할 무렵 태어난 나는 배를 곪지는 않았다. (물론 개개인의 형편에 따라 다르지만, 학자도 아니고 연구가도 아니니 대한민국 전반을 내가 다 설명할 책임은 없다.) 운전을 하시던 아버지는 이리저리 현장을 다니시다 내가 태어나고 어느 때인가부터 월급을 받아오셨다고 했다. 우리 엄마는 도로공사, 사방공사라는 것을 나가면 옥수수 가루나 밀가루 몇 되박을 받아오는 것이 전부였는데 새마을 운동 덕분에 쌀이나 돈으로 품삯을 받을 수 있게 됐다며 70년대에 대통령을 했던 어떤 사람을 쌀인 듯 밥인 듯 섬기듯 하셨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4남매라는 적지 않은 식구였지만 한 달에 한 번은 통닭을 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 월급날 통닭을 뜯을 때 초등학교 고학년이었거나 중학생 정도였던 언니와 오빠는 그때도 나에게 말하곤 했다. “니는 복 받은 줄 알아라. 내가 니 만할 때는 통닭이 어디 있노? 늦게 태어난 게 복이다. 쳇!” 언니들과 오빠는 어린 나이부터 통닭을 먹게 된 것이 마치 내 원죄인 것처럼 투덜거렸다. 정작 제일 좋은 부위인 닭다리 두 개 중 하나는 유일한 아들인 오빠가 뜯고 있으면서 말이다. 앙상하고 길쭉한 닭의 목 부분을 뜯으면서 나는 오빠와는 노선을 달리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동생에게 통닭을 가지고 투덜거리다니, 너무 쪼잔하지 않은가 말이다. 


1984년에 중학교에 입학했다. 늘 교복을 입고 다니던 언니, 오빠와는 달리 나는 교복을 입지 않았다.(1983년부터 교복 자율화 제도가 시행되었다.) 항상 언니들의 옷을 물려받아 입었던 나는 중학교 입학하는 첫날, 생애 처음으로 나만의 아래 웃옷 한 벌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까만색 디스코풍의 면바지에 위에는 하얀 면티를 받쳐 입고 그 위에 초록색 몸통에 한쪽 팔은 빨강, 다른 쪽 팔은 노랑에 소매 끝과 목둘레는 까만색으로 테두리가 된 맨투맨 옷이었다. 할머니는 “무당이 굿할 때 입는 옷”같다며 귀여운 막내 손녀에서 ‘무당 옷’을 사 입혔다고 엄마에게 지청구를 놓았었다. 하지만 나는 알록달록하고 자유분방 해 보이는 ‘무당 옷’이 너무 좋았다. 나는 십 대의 시작을 자유와 개성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풍부한 어린 십 대 시절에 외양은 너무도 중요하다. 다양하고 화려한 색감과 재질로 나를 드러내는 데에는 옷만큼 쉬운 것이 없다. 왜냐하면 머리 염색도 화장도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1982년까지 전국 대부분의 중학생, 고등학생이 거의 같은 옷을 입었었다. 함께 어울려 다니는 학생들의 모습은 지금 기준에서 본다면, 군복을 입은 군인이나 마찬가지이고 스타워즈의 클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똑같은 옷을 입은 학생들은 나처럼 ‘무당 옷’을 입은 학생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고등학교 2학년이 된 1988년에 다시 교복을 입기는 했다. 하지만 자율화를 느낀 이후에 입은 교복은 군복과 같은 그런 교복은 아니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이미 자유와 개성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마치 글을 몰랐다가 한글을 배우고 난 이후 다시는 글을 모르는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출처: 경향신문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032&aid=0002115725

고1 때까지 교련 수업이 있었다. 여학교였기 때문에 총검술 대신 제식 훈련과 함께 구급법과 응급처지법 등의 훈련을 받았다. 교련시간에 반장은 목소리가 커야 했다. 대대장이라고 불렸던 학생회장은 제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목소리가 작으면 발탁되기 어려웠다. 사열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대대장과 소대장이 되지 못한 것은 목소리가 작았기 때문이라고 치자. 수업 내용과 시험 내용은 오와 열을 맞추어 행진을 하고 시간을 정해놓고 얼마나 빨리 환자들에게(아마도 전시에 다친 군인임에 틀림없을) 삼각 붕대를 감을 수 있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손이 야물지 못한 나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뭐든 단체로 하는 것들에는 익숙지 못했다. 나는 ‘조직’의 쓴 맛을 알기 싫었다. 

전체주의적인 교련 수업을 언니와 오빠는 고등학교 3년 내내 받았을 것이다. 원하지 않았겠지만 전시 군인처럼, 야전 간호사처럼 일사불란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고등학교 2학년부터는 교련 과목을 배우지 않았다. 삼각 붕대 접는 법, 묶는 법을 더 이상 시험 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참 다행이었다. 


IMF 외환위기가 예고 없이 찾아온 코로나 19처럼 우리에게 찾아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지 딱 3년 만이었다. 근무했던 외국계 회사는 한국을 못 미더워해서 사업을 철수해버렸다.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취직해서 제대로 활약해보지도 못한 채 날개 꺾인 독수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졸업을 빨리 하고 취직이라도 해본 나는 신세가 나은 편이었다. 군대를 다녀와야 했던 남자 동기들, 남자 후배들은 누군가가 다 써버린 정작 우리는 구경조차 해본 적 없는 달러 잔고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취직 자체가 취소되었거나 취직의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많은 능력 있는 동기들과 후배들이 대학원이라는 전혀 안중에도 없던 선택을 해야만 했다. 소실될 수는 없었기에 어딘가 한 귀퉁이에 몸을 욱여넣고 있어야 했다. 

진짜 운 좋게도 취직에 성공했던 친구들은 많은 회사 선배들이(80년대 학번 선배) 경험하지 못했던 빡빡한 회사생활을 해야 했다. 주재원 제도도 없어졌고 각종 복지 혜택을 맛보지도 못했다. 우리들은 알지도 못했던 경제 호황기의 각종 제도와 혜택들이 어떤 맛인지 어떤 기분을 가져다주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은 자전거가 얼마나 편하고 빠른지 모르는 것과 같다. 자전거의 효용과 혜택은 누려본 사람만이 아는 것이다. 자전거의 효용과 혜택을 누린 이들은 경제 호황기에 OECD 가입국의 위치를 누렸던 언니들과 오빠들이었다. (물론, IMF 위기에는 온 국민이 6.25 전쟁 버금가는 난리를 겪었다. 특정 사람만 힘들었던 것은 아니다. IMF가 오기 전 적어도 5~7년간의 기간 동안 누린 것을 말하는 것이니 제발, 오해는 없으시길.)


새마을 운동 이후 태어나 일찍이 누려보지 못한 부를 상대적으로 풍요하게 누렸다고 전해 들은(?) 우리는 그렇게 ‘시대’라는 놈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나는 조직을 믿는 법보다 스스로 살아남는 것부터 터득하게 되었다. 내겐 B와 같은 무용담도 고생담도 없었다. 마음 둘 곳은 내가 즐기는 나의 행복과 나의 소신이었다. 


X세대는 그렇게 조금 86세대와 다르게 갔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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