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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Dec 17. 2020

엄마에게 쓰는 처음 편지

친정엄마가 부쳐준 콩잎김치를 받았다

엄마,


엄마가 시켜서 언니가 택배로 보낸 '콩잎파리 치댄 거'를 오늘 받았다. 냄새나지 말라고 그랬는가, 엥간히도 꽁꽁 싸매 갖고 보냈더라. 엄마가 늘 말하던 '콩잎파리 치댄 거'의 표준 이름을 이리저리 찾아봤는데 '콩잎김치'라고 하는 것 같아. 엄마가 보낸 콩잎김치는 우리 네 식구가 1년도 훨씬 넘게 먹겠던데, 양이 너무 많아서.

엄마, 이제야 고백하는데 콩잎김치는 내 말고 0서방이나 애들은 별로 안 좋아한다. 짜고 쿰쿰한 냄새난다고. 그래서 엄마가 보내준 거는 나 혼자 먹으려면 한 2년쯤 걸릴 거 같다. 그래서 벌써부터 걱정이다. 다 먹어야 하는데 2년씩이나 두고 먹으면 상할까 봐. 엄마가 얼마나 정성드리 콩잎김치를 했을지 내가 다 아는데 우야든동 다 먹어야 할 것 아니겠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 지내는 것을 보고는 나나 오빠나 언니들이 다 맘이 안 좋았다. 엄마가 헛헛해하는 것 같고 더 적적해하는 것 같았거든. 아버지가 치매 초기라는 진단을 받았고 거기다가 고혈압과 당뇨가 심하셨던 아버지를 돌보느라 엄마는 일상을 긴장 속에 지냈잖아. 한 사람을 전적으로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우리네 삶에 생동감과 활력을 주기도 하지만 그 책임감이 주는 스트레스 또한 만만치 않는 법인 것 같아. 그래서 엄마가 종종 아버지에게 내뱉곤 하던 짜증과 울분을  자식인 우리는 이해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 하지만 본인 몸이 불편했던 아버지는 엄마의 힘듬을 이해하려다가도 같이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았지. 그러면 두 분은 또 크게 다툼을 하곤 했어. 그렇게 아버지 밥을 챙기고 몸을 챙기면서도 아이처럼 자기 몸도 잘 못 가누고 말도 잘 안 듣는 아버지를 향해 '앙살'(투정이나 짜증을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을 부리는 엄마를 보면서 '엄마가 좀 참지'라며 엄마를 원망하고 아버지를 동정했어. 그때는 힘없는 아버지가 가여워 보였고 상대적으로 활력이 있는 엄마가 강자처럼 보였거든.


그런데 엄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왜 그렇게 갑자기 한 번에 사람이 힘이 없어지셔요? 엄마는 원래 목소리도 크고 다른 사람들 말도 잘 들어줘서 따르는 동네 친구나 형님, 동생도 많았고 몸놀림도 빠릿빠릿해서 온 동네 사람들이 일손이 필요하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0숙이 불러라'할 정도로 인기 많은 우리 동네 '정 반장'이었잖아! 그랬던 엄마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하루하루 쓸쓸함과 외로움을 하소연하더니 점점 사람이 맥아리가 없어지더라. 책임질 것이 없어지고 어깨에 얹힌 짐을 다 내려놓으니까 몸이 가벼워졌을 거야. 가벼워진 몸이 마음까지 가볍게 하고 시간이 더 지나니까 생각조차 귀찮은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거야.

예전에 아버지가 정년 퇴임하시고 한동안 엄마 표현처럼 '히바리 없이' 지냈을 때 엄마가 그랬지. "너거 아버지 맨날 출근하다가 일이 없으니 맴이 허전한갑다. 눈에 힘도 읍고, 발 끝도 안 야물고. 영감탱이, 걱정이네."

그때 그 말이 아버지 돌아가시고 한동안 우리 자식들이 엄마한테 한 걱정이랑 똑같았어. 엄마 그대로 맥 놓을까 봐 우리 많이 걱정했거든. 그래서 우리가 하루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엄마 집에 가고 그랬던 거야.


0서방 발령 나서 수도권으로 우리 식구들 다 이사 갈 때 나는 직장을 계속 다니고 싶은 욕심에 식구 따라 이사를 안 가고 고향에 그대로 남았지. 혼자 집을 어떻게 할까 고민할 때 엄마가 환한 얼굴로 '내캉 살자. 내가 밥도 해 주고 방 값도 안 받으께. 적적한데 니가 내캉 같이 살믄 내는 고마 딱 좋겠다.'라며 간곡히 말했지. 이제야 말이지만, 엄마 나 그때 고민 좀 많이 했다. 다 큰 성인이 고집 있는 노인네랑 같이 살면 투닥거리게 될 텐데 자식인 내가 무조건 참아야 할 텐데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하고 말이야. 그런데 '내캉 살자'며 내 앞으로 바싹 당겨 앉으며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애처로운 눈빛에 나는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어. 그 순간 엄마의 눈은 마치 사탕을 받으려고 두 손 모아 다소곳이 기다리는 아이 같기도 했고 산책 나가자고 바깥과 주인을 번갈아가며 애타게 바라보는 반려견 같기도 한 눈빛이었거든. 아무리 모진 사람이라도 그런 눈빛을 외면할 수는 없었을 거야. 하물며 딸인 나는 더욱 그랬지.


그렇게 내가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거의 4년을 우리 단 둘이 살았네. 내가 14년 동안 살았었던 집에서 그리고 엄마가 30년을 넘게 살았던 그 집에서 말이야. 엄마, 엄마는 나랑 둘이 살 때 어땠수? 행복했수? 엄마 나는 실은 좀 힘들었었어. 우리 같이 살고 석 달쯤 지났을 때 그냥 오피스텔 같은 데서 혼자 살걸. 하고 후회했었어. 차마 엄마한테는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생활양식과 습관이 이미 굳어져버린 성인이 한데 어우러져 산다는 것은 동물원의 한 우리에 겨울에 강한 북극곰과 아프리카 악어가 함께 사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 조화롭기가 어렵다는 거지. 엄마는 새벽 5시에는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했고 어린애가 밥을 꼭 먹어야 하듯 내가 아침밥 먹는 것을 확인해야 했어. 덕분에 나는 아침잠을 설치기 일쑤였지만 아침밥은 꼬박 잘 챙겨 먹을 수 있었어. 저녁에는 8시만 되면 주무셔야 해서 나는 방에 불을 커놓을 수 없어서 책을 볼 수도 TV를 볼 수도 없었어. 엄마는 내가 매일 밤 11시나 되어야 집에 오는 것을 보고 놀다 오는 줄 알고 타박하셨지만 실은 나는 사무실에서 책도 보고, 때론 다운로드하여놓은 영화를 보고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난 후 집에 갔었던 거야.

"같이 사는 게 뭐 이렇노? 집에 일찍 좀 온나."

이런 말을 듣고 간혹 내가 집에 일찍 가서 둘이 얘기라도 할 때 결국은 우리 얘기 끝마무리가 좋지 않게 끝나곤 했잖아? 엄마는 내 생활습관을 보고 엄마 성에 차지 않는다고 잔소리를 하시거나, 가족들 걱정을 매번 똑같은 말로 하곤 했는데 같은 이야기를 아침 먹을 때도 듣고 저녁 시간도 들으니 나도 힘들어서 그만 엄마에게 언성을 높이곤 했기 때문이었지.


이때 나는 깨달았어, 엄마. 사랑하는 사람이라도(심지어 내 엄마라도) 너무 깊이 관여하거나 내 주장을 고집하면 관계가 흐트러질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엄마를 더 사랑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더 오래오래 갖고 싶어서 일부러 대면의 시간을 줄였고 접촉은 하되 거리를 두려고 했었어. 엄마는 거리를 두는 나를 보고 섭섭하다고 야속하다고 하셨지? 하지만 엄마, 나는 너무 무서웠어. 엄마랑 같이 살면 살수록 엄마랑 같이 지내면 지낼수록 내가 엄마를 미워하게 될까 봐.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는 자녀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서 부모가 자녀와 거리를 두어야 하지만, 도로 아이가 되어가는 부모님을 둔 자녀는 애증은 털고 애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 엄마 또 슬퍼하겠다, 그치? 미안.


그래도 우리 같이 사는 4년 동안, 우리는 많이 가까워진 것 같아. 내가 어렸을 때는 어려서 몰랐던 혹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도 엄마에게서 얘기 많이 듣게 되었어. 그리고 여자로서의 엄마의 인생에 대해서도 아버지와의 어설픈 사랑이야기도 내가 어른이 되고 여자가 되고 엄마가 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듣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공감을 하게 되었지. 그 시절의 여자들은 왜 그렇게 힘들어야만 했을까? 그 시절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은 왜 그렇게 눈치가 없었을까? 그 시절의 남편들은 왜 그렇게 서툴렀을까?


가끔 엄마가 초저녁 잠을 놓치고 잠 못 드는 밤이 우리 방문을 노크하던 날 엄마가 들려주던 엄마의 인생 이야기를 듣노라면 나 어릴 때 엄마가 왜 그렇게 이미자를 읊조렸는지, 현철을 흥얼거렸는지, 조미미를 따라 불렀는지 이해가 저절로 되더라고. 나랑 같이 산 4년 동안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를 목청껏 따라 부른 건 눈치 보느라 제대로 사랑을 표현 못한 아버지를 원망한 거 맞지? "고마 자는 잠에 저세상 갔으면 좋겠다. 하루하루가 똑같고 심심한 게 사는 재미가 없다"고 툭하면 말씀하셨지만 '팔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라고 이애란의 <백세 인생>을 부르며 쓴웃음 지은 것은 실은 손주 손녀들 시집 장가가는 거 다 볼만큼 오래 살고 싶어서였던 거지?


전에 엄마가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우리 엄마는 빨리 죽어서 나는 울 엄마 쬐금밖에 못 봤다 아이가. 내는 막내라갖고 오빠들보다 십 년이나 엄마를 덜 보고. 울 엄마 시집가서 고생하는 딸이 맴에 걸려서 저승길을 우찌 갔을꼬. 옛 어른들 말씀에 저승길 기쁘게 가다가도 막내가 '엄마요~~'하고 부르는 소리에는 꼭 뒤돌아본다던데. 울 엄마는 내 부르는 소리에도 뒤돌아봤을랑가."

엄마는 평소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고 좋은 것 생기면 항상 오빠 먼저 챙겼어. 언니들한테는 집안일도 잘하고 야무지다고 칭찬도 많이 했고. 하지만 나한테는 막내라서, 집안일을 많이 안 해봐서 털팔이라고 야물딱지지 못하다고 야단을 많이 쳤어. 나는 오빠보다 11년을 언니들보다 6년 3년씩을 엄마를 더 적게 보았는데, 아들도 아닌 딸인 막내, 털팔이에 야물딱지지도 못한 막내딸이 나중에 '엄마!'하고 목놓아 부르면 그때는 오빠, 언니들보다 먼저 나를 뒤돌아봐줄까?


막내딸이 좋아한다고 해마다 빠지지 않고 담그던 콩잎 김치를 작년에는 안 담갔고 못 먹었지.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서 엄마와 헤어지고 내 식구(0서방과 내 아이들)와 합치게 되면서 엄마는 내가 없다고 콩잎 김치를 안 담그셨지. 작년에 안부 전화하면서 내가 엄마에게 흘린 말, "올해는 콩잎파리 못 묵어서 좀 섭섭다. 내가 엄마랑 같이 살았음 맛보는 긴데, 그쟈? 인자 콩잎김치는 못 묵겠네. 경상도식 울 엄마 콩잎파리 못 묵으가 아쉬버서 우짜꼬?"라는 말을 엄마는 깊이 새겨들었는가 보데. 아픈 발목에도 장날마다 나가서 콩잎이 제대로 물들었는지 확인하고 색이 잘 배지 않은 콩잎이면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는 오빠의 말에 난 내가 큰 죄를 지은 것 같았어. 마침내 제대로 색이 밴 콩잎이 장에 나왔을 때 무려 4만 원어치나 사서 하루 온종일 콩잎 김치를 담았을 것을 생각하니 별생각 없이 흘린 말이 도로 내 가슴에 와서 꽂히더라. 많이 묵으라고 많이 담그고 많이 보냈다는 엄마 말씀에 우리 식구 1년이 훨씬 넘도록 먹을 콩잎 김치를 보면서 웃음이 나오기보단 코끝이 찡해졌었다.


엄마, 걱정마라. 짜우면 물에 씻어서라도 묵고 많은 건 냉장고 보관을 잘해서 한 장도 허투루 하지 않고 두고두고 잘 먹을께. 그런데, 엄마 내년부터는 막내딸 콩잎 김치는 담그지 마소. 나도 이제 시건이 들 나이가 됐잖아. 콩잎 김치를 받고 '와, 맛있겠다'는 생각보다 '울 어매가 얼매나 고생했을꼬'가 먼저 떠올라. 이제 아픈 몸 고만 사용하고 고이고이 간직해줘. 막내딸이 오빠의 시간만큼 엄마를 볼 수 있게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하니깐요.


경상도 딸내미, 표현이 서툴러서 미안해. 말로는 잘 못하는 말, 편지에서는 크게 한번 말해볼게.


엄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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