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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Jan 01. 2021

민주화 세대는 민주적이지 않았다

어느 X세대가 되돌아본 586세대에 대한 개인적 소회

요즘 내가 거의 빼놓지 않고 보는 TV 프로그램은 '유키즈 온 더 블록'이다. 유재석이 유명이나 연예인들이 아닌 우리네 보통의 일반인(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도 나 같은 아주 평범한 사람은 아니지만)을 모시고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 프로그램이다. 

코로나로 거리에서 일상의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니까 요즘은 실내에서 특별한 일반인들을 모시고 토크를 하고 있다. 지난 9월에는 <세대 특집>을 하였다. 여기에 나온 세대는 Z세대, Y세대, X세대, 민주화 세대, 산업화 세대. 좋아하는 프로그램에서 관심 있어하는 주제를 진해하니 귀가 솔깃하여 진심으로 시청을 하였다. 


90년대 이후와 밀레니엄 전후에 태어났다고 해서 (M)Z 세대

70년대에 태어나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문화적 개성을 지녔고 미지수 같은 아이들이라고 해서 X세대

X세대 이후에 태어났고 Z세대와는 조금 빠른 Y세대

공교롭게도 70년대 80년대 90년대 이후에 태어나고 자라 하나의 문화적 사회적 카테고리를 형성한 세대들은 영어 알파벳으로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X세대 이전의 세대에는 명확한 주제가 이름으로 지어졌다. 민주화 세대와 산업화 세대

산업화 세대는 한국전쟁 이후 다시 회복되기까지 100년 이상 걸릴 것이라던 서양 언론의 전망을 비웃듯 단 30년 만에 한강의 기적을 이룬 희생의 세대를 말하는 말이다. 


민주화 세대는 60년대에 태어나서 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에 대학 생활을 한 이른바 586세대를 통칭하는 단어이다. 왜 민주화 세대인고 하니, 80년대 암울한 독재 시절 지하에서 게릴라 식으로 어렵고 학생 운동을 하고 수배를 당하고 대자보를 쓰던 6~7년을 보내다 끓어오를 대로 끓어올라 국민의 저항과 분노가 100도씨에 이르렀을 때 그것을 표출할 수 있게 도화선이 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하의 6~7년을 견뎠지만 끝내는 함성을 질렀고 한 번은 승리를 맛본 집단이다. 그랬기에 민주화세대가 갖는 스스로의 자부심은 대단했고 사회가 갖는 선망도 아주 높았다. 그래서일까? 언론이 아닌 내가 현실에서 실제로 조우했던 민주화 세대는 그들이 갖게 된 캐치프레이즈처럼 민주적이지 않았다. 



"XX학과 90학번 000은 새날을 여는 새벽의 소리 XX대학교 0000에 입사하였기에 이에 신고합니다!"


대도시의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동문도 거의 없던 시골학교 출신인 나는 학교 생활이 즐겁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외로웠다. 한 달을 이리저리 방황한 끝에 머물기를 결심한 한 동아리. 90학변 신입생들을 선배들에게 소개하는 일종의 상견례 자리에서 우리는 군대에서 신병이 내무반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처럼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인생에서 내보지 않았던 가장 큰 목소리로 한 번의 버벅댐과 주저함이 없이 깔끔하고 정돈된 톤으로 저 문장을 외워서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선배들은 방 하나를 통째로 빌린 술집 방 안에 앉아있었다. 어떤 선배는 팔짱을 끼고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었고 어떤 선배는 술잔을 서로 나누며 일어서서 잔뜩 긴장해있는 우리를 흐뭇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어떤 선배는 근엄한 얼굴을 하고 우리가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겠다는 표정으로 90학번 신입생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90학번 신입생들은 순서대로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차렷 자세를 하고 목청껏 외쳐댔다. "XX학과 90학번 000은 새날을 여는 새벽의 소리 XX대학교 0000에 입사하였기에 이에 신고합니다."


하다가 틀린다면? 플라스틱 그릇 한 사발의 막걸리를 벌주로 원샷을 해야 했다. 긴장해서 문장을 틀리면 꽤 많은 양의 술 한 사발을 들이켜야 하고 술기운에 실수는 더욱 연발하게 되었다. '동기사랑 나라사랑'이라고 동기가 틀리면 문장을 외우지도 않는 그냥 앉아있던 신입생들도 같이 술을 마셔야 했다. 제일 나중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몇십 년을 살면서 보드카를 늘 끼고 살던 사람처럼 술이 세야만 했다. 처음으로 나섰던 동기 녀석이 10잔을 넘는 막걸리를 마시게 되자 보던 80년대 학번의 선배들도 못 참겠던지 신입생들이 같이 마시던 벌주는 면하게 해 주었다. 마지막 주자의 목숨을 보전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술이 약해서 첫 주자로 나섰던 동기 녀석이 연달아 실패를 거듭하자 이대로는 안되겠다싶어 내가 나섰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시베리아 쪽은 아니어도 블라디보스토크 사람 정도의 술 실력을 가지고 있던 나였다. 90학번이 이대로 무너지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첫 번에 완벽하게 힘차게 암기를 해냈음에도 '합격'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너무 쉽게 통과시켜주면 군기가 안 잡힌다는 이유였다. 그랬다. 신입생 통과의례를 이렇게 실시했던 것은 '군기'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 동아리 입사 첫날부터 이렇게 군기가 바짝 들었던 나는 7잔 정도의 막걸리를 더 마시고 마침내 첫 번째 '합격'을 하였다. 나머지 90학번 동기들이 모두 다 합격을 받는 데는 거의 하룻밤이 꼬박 샜다. 새벽 해가 어슴푸레 뜨기 시작할 때 우리 동기들은 모두 '합격'을 받았고 우리는 모두 그대로 술집의 방 안에 고꾸라졌다. 



이 신고식은 실은 역사가 그리 깊지 않았고 우리가 입학하기 불과 몇 년 전부터 시행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한창 전두환 정권이 설쳐대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X세대의 존경스러운 민주화 세대 선배들은 그렇게도 자기들이 혐오하고 욕을 하던 군대 문화와 군부시절의 잔재를 후배들에게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못된 시어머니 밑에 순한 며느리가 나중에 그보다 더한 시어머니가 된다는 말처럼 그렇게. 


행사 후에 단체로 술자리에 가는 것은 참 좋았다. 대부분 선배들의 허접한 주머니를 털어서 마시는 술이어서 김치찌개 하나로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견뎌내야 했지만 김치찌개 안주를 사주던 선배들이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멋짐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정도 자리가 무르익고 술기운에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를 즈음 우리가 자리를 뜨려고 하면 선배들은 술잔을 탕하고 내려놓으며 "선배가 아직 술자리에 있는데 어디 까마득한 후배가 자리를 뜬단 말이야!" 하며 대동단결을 외쳤고 일사불란을 주장했다. 

우리는 '대동단결'과 '일사불란'의 구호와 참기름을 바른 것처럼 매끄러운 언변에 패배감을 느끼며 엉거주춤 일어나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일 수밖에 없었다. 통금 시간이 있던 여학생들이나 술이 약한 남학생들은 이런 일이 몇 번 있고 나면 즐거운 술자리도 어느덧 가슴속 돌덩이로 다가오고 김치찌개를 사주던 멋있던 선배도 대책 없는 돈키호테로 보였다. 


여름방학이면 멤버십 트레이닝을 갔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내가 있던 동아리는 조금 더 특이했던 것 같다. 멤버십 트레이닝을 한 명이라도 빠지면 안 된다는 규율이 있었다. 약 3박 4일의 일정으로 조금 먼 지역으로 떠나는 MT였다. 멤버십 트레이닝이므로 동아리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소속원 전원이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목적은 소속원은 단합과 단결된 목소리, 소속감 고취, 같이 겪는 고생이 주는 연대감이었다. 비교적 장기간의 외박이라 개인적으로 참석하기 힘든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선배들은 개인 사정은 알아서 극복하고 행사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아르바이트나 집안일 등의 개인 사정으로 빠질 수도 있을 텐데 당시의 선배들은 용납하지 않았다. 힘없던 우리 신입생들 혹은 2학년이 된 우리들은 그저 선배의 말이 법인 줄 알던 시절이라 순순히 그들의 권위와 규율에 따르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다녔던 도시에서 처음으로 노래방이 생겼다. 처음으로 선보인 노래방은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얻더니 순식간에 도시 전체로 펴졌고 이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노래방 초창기에 나도 노래방에 한 번은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가지 못했다. 선배들은 걱정했다. 이러다 대한민국이 왜색 문화의 노예가 될 거라고. 대학물씩이나 먹은 학생들이 아무 생각도 없이 일본 놀이 문화를 즐긴다며 노래방 출입을 하는 친구들을 불평했다. 노래방 진입 금지와 영업을 불허하라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선배들은 노래방이 어떤 곳이지 어떻게 노는 곳인지 알게 그렇게 반대를 했을까? 일본의 가라오케를 떠올리며 무작정 반대를 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아무튼 걱정과 불평을 뒤로하고 노래방은 겨울철 감기처럼 우리 일상에 파고들었다. 유행이 시작하고도 한참 후에 처음 가본 노래방은 국민학교 시절 처음 갔던 소풍보다 재미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놀이를 생활화하고 있었다. 



80년대 학번 선배들은 87 항쟁을 직접 겪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직접 시위하고 승리하여 민주를 쟁취했다는 자부심과 도취감은 스스로를 한껏 높이 평가하게 했다. 그들은 틈만 나면 87 항쟁을 회상했다. 

"거리의 자욱한 최루탄 연기 지랄탄 소리, '반독재 반파쇼 민주정부 수립'을 외치던 우리의 함성, 학생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던 시민들의 손길, 그 거대한 민주를 요구하는 파도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숨어서 대자보 만들고 데모하고 민주화 투쟁을 했는데, 87년 6월은 정말 웅장했다."

"하이힐 신고 돌을 나르던 여학우들이 그렇게 이뻐 보일 수가 없더라."

"도시 곳곳에서 하루 종일 데모를 했었다. 다시 노력해서 노태우 정권을 몰아내야 한다. 우리가 또 해내자"

"87년 시위를 경험 안 해본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그날의 가슴 벅찬 기분을, 가슴속 끓어오르는 투쟁의 기운을"


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던 선배들은 스스로에게 이미 훈장을 주고 있었다. 이후에 입학한 후배들과 자신들을 분리시키고 있었던 듯했다. 특히 나같이 90년대 이후에 입학한 후배들에게는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선배들이 졸업할 때까지 80년대 학생운동의 고난스러움과 87년의 가열찼던 투쟁 스토리는 여러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너무도 많이 들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말했다. 시위와 투쟁 속에서 자주와 민주와 평화를 크게 외쳤다고. 

내가 대학 초년기에 보고 듣고 경험했던 선배들의 말과 행동은 하지만, 내가 기대한 만큼 민주적이지 않았다. '민주'의 가치를 주장을 하고 있었지만 생활 속에서 후배들에게 술을 강권하고 늦은 귀가를 강요했다. 가보지도 않은 군 생활을 민주화 투쟁이 일어난 뒤 대학에서 나는 1/10 정도 경험한 것 같았다. 다시 말하면,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민주적 가치를 주장하고 있었지만 일상에서는 '민주'와 그와 동반하는 '개성'과는 여전히 몇 백 킬로미터만큼의 거리가 그들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배들은 몰랐을 것이다. 큰 항쟁을 겪고 난 선배들은 머리로는 스스로 민주적이라고 깨어있다고 자부했을 터이지만 몸에는 여전히 권위와 위계가 아주 깊숙이 배어 있었다. 


동기들은 자주 모여서 우리끼리만 하는 '밀실 시위'를 자주 했다. 

밀실에서 하는 성토는 주로 '선배들은 너무 강제적이다' '억지로 무엇을 시키려 한다' '자율적이지 않다' '눈빛과 목소리로 분위기를 죽이고 있다' '우리 불만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개선이 안된다', 등이었다. 

새마을 운동 이후에 태어나 앞 세대와는 다른 부와 자유를 어느 정도 느꼈던 우리들은 자유로울 줄 알았던 대학의 권위적 문화에 이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동방예의지국에서 교육받은 아이들인지라 선배들 앞에서는 수긍하는 척했지만 우리는 우리끼리 자유를 갈구했고 개성을 탐구했다. 선배들과 다른 노선을 택했다. 



IMF라는 듣도 보도 못한 위기가 와서야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고 그는 87 항쟁의 주역이었던 386세대들을 대거 정치에 입문시켰다. 스스로에게 훈장을 주며 자부심을 가졌던 80년대 학번들은 그렇게 대거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권위와 위계에 체질적으로 약간의 거부감이 있던 X세대는 조직문화에 잘 길들여지지 못했다. 아직도 많은 정치적인 분야, 조직을 우선시하는 곳에서 수장은 80년대 학번 혹은 그 이전 생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X세대들은 좀 더 자유로운 곳에서 그 활약을 펼치는 것을 목격하는 경우가 더 많다. 

아직도 사회 곳곳 조직의 주요 직위에서 권위를 보여주는 80년대 선배들은 이제는 '민주'와 '자유'를 체득하고 있을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요즘 유행하는 '꼰대' '아재'라는 언어들로 5,60대 아저씨 아줌마들을 희화화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80년대 학번 선배들이 내가 대학 때 보았던 그 민주적이지 못한 모습들을 아직도 갖고 있는 것일 게다. 이제 그만 과거의 영광은 묻어두고 내일을 생각하며 현재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경험과 사고에 의한 내 개인적인 소감일 뿐임을 다시 한번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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