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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Jan 06. 2021

충분히 훌륭했던 그 겨울 우리의 여행

볼 일이 있어 서울 모 병원에 갔다가 집으로 가려고 병원 회전문을 돌아 나왔다.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분명 아침에 병원에 들어올 때는 푸른 하늘에 쌀쌀한 바람만 불었건만, 해거름 병원 밖 세상은 겨울왕국이 되기 직전 소복소복 왕국이 되었다. 아스팔트 바닥은 벌써 눈이 쌓이기 시작해서 신발 밑창을 뒤덮었다.

방향을 틀어서 지하철로 재빨리 걸어갔다. 병원 지붕을 벗어나서 걸음을 빨리 하니 눈은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글자 그대로 눈은 쏟아붓고 있었다. 병원에서 잠실나루 역까지 가는 10분 정도의 길, 나는 금세 눈사람이 되었고 날리는 굵은 눈비는 내 시야를 가려서 지하철 역을 금세 못 찾아 10분 길을 물어 물어 돌아갔다.


이렇게 쏟아지는 눈을 본 게 얼마만이더라?


나는 남쪽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부산 옆의 작은 소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조금 커서는 부산 언저리를 맴돌며 살았다. 불과 작년만 하더라도.

남쪽 나라에 살 때는 눈을 거의 보기 힘들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진눈깨비는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약간이라도 쌓이는 눈 다운 눈은 3~4년에 한 번 정도 내렸다. 남쪽에서는 약간이라도 쌓이는 눈이 오면 도시가 올스톱이다. 버스조차 다니지 않는다.

토요일이 반공일이던 시절 어느 겨울 눈에 되게 많이 오는 날, 운전해서 출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버스를 타기로 했다.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내가 버스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한 시간 삼십 분 정도 기다린 것 같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버스 회사에 전화도 해보고, 시청에 전화도 해보고 한 결과, 눈에 많이 와서 버스가 운행을 안 한다는 것이었다. 출근 시간을 한참이나 지난 시각, 나는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부장님, 저 눈 때문에 오늘 회사 못 가겠어요. 운전도 못하겠고 버스도 안 다녀요. 휴가 처리해주세요."


다른 직원들은 회사가 좀 더 가까이 살아서인지 한두 시간씩 지각은 했지만 출근은 다 했다고 했다. 시외에 살아서 지하철이 없던 나만 눈이 옴팡지게 많이 오던 날, 결근을 하고 말았다. 다음 날 출근했을 때 나는 부장님 이하 동료들로부터 '이제 그만 도심으로 이사 나오지? 촌동네 있지 말고!'라는 진반 농반의 말을 종일 듣고 다녔다.



눈 하면 생각나는 또 하나의 추억은 12~13여 년 전 겨울 가족 여행 때의 일이다.

큰 애가 초등학교 2~3학년이었고 작은 애가 취학 전 때였다. 경상남도 동쪽의 소도시에 살던 우리는 여행지로써 전라도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몇 년에 한 번씩 전라도 여행은 가줘야 했다.

그 해 겨울 우리는 전라남도 여행을 계획했고 해남의 숙소를 예약했다. 지금도 민박집 이름이 기억난다. 무선동 한옥마을 <제비 민박>. 한옥 민박인데 공동 취사장을 사용하여 방학 성수기인데도 일박 요금이 아주 저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루에 해남 가는 길에 좋은 곳을 들러가며 여행을 하려고 했기에 우리는 12월의 겨울 깜깜한 새벽에 출발을 했다. 새벽 4시가 막 지났던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진짜 깜깜한 새벽이었다. 어스름하지도 않고 마치 한밤중처럼 까만 하늘에 샛별만 총총히 보였던 새벽이었다. 아직 꿈나라 여행 중이던 아이들은 뒷좌석에 태우고 짐을 트렁크에 싣고서 나는 조수석에 신랑은 운전석에 앉아서 우리는 출발을 했다.

아이들이 깨면 시끄럽게 하고 말도 시키고 중간에 화장실도 가야 하니 아이들이 잘 때 최대한 많은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새벽 이동의 목적이었다. 그러면 빨리 멀리 이동할 수 있으니까.


어두웠지만 간혹 반짝이는 별들이 보였던 경상도 쪽 하늘을 지나고 순천에 접어들었다.

갑자기 하늘이 바뀌었다.

희한하게도 순천 땅에 딱 접어들자마자 눈발이 조금씩 날리기 시작했다. 아직 하늘은 깜깜했다. 해가 뜨려면 한두 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새벽길이니 부산에서 순천까지 한 시간 만에 주파했으니 겨울 해가 뜨는 시각인 일곱 시 삼십 분이 되려면 아직 두어 시간이 남은 것이다. 남편이랑 나는 '갑자기 웬 눈? 이 정도 눈이면 괜찮겠지? 고속도로인데?' 하며 개의치 않고 고속 주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런데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차창 밖으로 내리 꽂히는 눈은 그전까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눈이었다.

나는 눈이 하늘에서 '소복소복' '펄펄' 내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순천 지나는 길 조수석에서 바라본 눈은 솜 같은 동그란 눈이 아니라 여름철 장마 같은 굵기와 길이로 우리 차 앞유리로 그래도 내리 꽂히고 있었다.
나는 우리 차량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줄 알았다.


그 시각 고속도로에 다니는 차량은 우리 밖에 없었다. 간혹 짐을 실은 트럭 만이몇 대가 지나갈 뿐이었다. 승용차는 우리 차뿐이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눈길을 한 번도 운전한 적이 없는데, 나나 남편이나, 이대로 눈이 계속 온다면 눈 속에 갇히는 거 아닐까? 뒤에는 아이들도 타고 있는데 눈 속에 갇히면 우리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막 스쳐갔다. 불행히도 남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결정을 했다. 이대로 해남까지 달릴 게 아니라 다른 데로 고속도로를 벗어나서 어디 잠시 정차를 하자. 다른 숙소를 잡든 여관을 가든 이대로 여행을 강행하는 것은 무리다.라고. 눈길을 처음 운전해본 미숙자들의 바보 같은 결정이었음을 안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나는 급히 주행도로 상의 다른 숙소와 여행지를 찾았다. 제일 처음 눈에 띈 곳이 화순의 금호리조트였다.

"자기야, 여기서 조금만 가면 금호리조트 있다. 큰 리조트이니 거기서 조금 쉬다가 기후 상황을 보고 더 가든 되돌아가든 하자"

내 말에 남편은 금세 오케이를 했다. 눈길에 계속 운전하는 것이 자기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화순의 금호리조트로 내비를 다시 찍었고 내비가 알려주는 대로 방향을 다시 잡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비가 알려준 길은 쫘악 뻗은 도로가 아니라 작고 폭이 좁은 길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고속도로에서는 달리는 차의 열기로 눈이 쌓이지가 않았는데 고속도로를 벗어난 왕복 2차선의 도로는 차도 다니지 않고 새벽이라 사람의 왕래도 없어 내린 눈이 그대로 얼어붙었었다. 쏟아지는 별똥별 같은 눈비에 앞도 안 보이고 시골길이라 거리에 가로등도 없어서 시야 확보도 되지 않았다.

고속도로에서 내리고 얼마 안 있어 우리는 시속 30~40 정도의 속도로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차선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때쯤 뒷좌석의 아이들이 잠에서 깨었다.

"아빠, 어디야? 아직 멀었어? 오줌 누고 싶어"

아이들은 잠에서 깨자마자 투정을 부렸다. 눈길에 신경이 곤두 선 나는 "잠깐만. 조용히 좀 해!"라며 애들을 다그치기 바빴다. 그때는 아이들의 투정보다 우리의 목숨이 더 우선이었으니까.


운전하던 남편도 신경이 잔뜩 날카로이 서 있었다. 이런 엄마 아빠의 분위기를 눈치챈 아이들은 분위기 파악에 들어갔다. 조용히 앞만 보고 있었고 간혹 "아빠, 안전 운전해야 해." "아빠 조심해"라며 우리 목숨이 일각이 여삼추인 것을 아는 눈치였다.

설상가상, 눈길을 천천히 달리다 보니 기름은 또 얼마나 빨리 소모가 되는지!

부산에서 해남까지 달릴 수 있는 정도의 기름으로 출발했는데 아직 금호리조트는 한참 남았는데 기름이 'E'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날이 점차 밝아와서 잠시 히터를 틀어놓고 길가에서 쉬어갈까, 생각했던 우리는 그 생각을 접었다. 차도 사람도 다니지 않고 집도 절도 보이지 않는 시골길에서 기름마저 떨어진다면 나는 지옥 나락에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았다.

이제 날은 밝았다. 내비를 보고 길만 따라가면 되었다. 그런데 길이 보이지 않았다. 눈에 덮여서 이게 길인지, 고랑인지, 인도인지, 차도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시속 10~20km 정도의 속도로 짐작대로 본능대로 천천히 무적정 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패착은, 금호리조트를 선택한 것이었다. 금호리조트가 화순 어느 산골 깊숙한 곳에 있을 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급한 마음에 대기업이 하는 호텔/리조트만 생각하고 거기 가면 넓은 데서 쉴 수 있겠지, 하는 맘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땅도 하얗고 하늘도 하얀 시골길을 거북이 같은 속도로 가고 있었음에도 갑자기 차가 우리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쭈르르르 길을 벗어나 미 끄리지기 시작하더니 40m가량을 그대로 미끄러졌다.

"어, 어, 어, "

내가 낼 수 있는 소리는 이것밖에 없었다. 너무 무서웠다. 이대로 한겨울 눈 속에 갇혀서 구조대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나, 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하던 남편도 그렇게 추운 겨울 날씨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우리는 옥신각신 했다. 더 가는 것은 위험하다. 이대로 차를 멈추고 해가 뜨기를 기다리자. 아니다. 해가 뜬다 해도 눈이 녹지 않을 것이다. 기름도 다 떨어져 가는데 히터를 틀 수 도 없고 여기 그대로 있는 것이 더 위험천만한 일이다. 일단 무조건 금호리조트로 가야 한다. 그것만이 답이다.


최대한 조심해서 다시 길을 나서기로 했다. 진짜로 10km의 시속으로 우리는 천천히 거북이보다도 느리게 앞으로 나아갔다. 다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 썼다.

그렇게 5km를 더 가다 보니 드디어 우리 앞에 1톤 트럭 한 대가 보였다. 아, 그 순간 그 1톤 포터는 우리에게 하느님 이상이었다. 뒤 배기관에서 품 품 나오는 배기가스에 눈이 약간 녹으면 그 뒤를 따라 우리는 살짝 부드러워진 길을 냉큼 따라갔다. 1톤 포터가 금호리조트까지 계속 가주었으면 하고 빌었지만, 포터와는 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안녕, 포터~!


다시 10km의 서행으로 조금 더 가다 보니 드디어 눈이 쓸리어 치워 진 도로가 나왔다. 만세!!!!!!

"아이고 고마워라. 누가 이 새벽에 눈을 치웠지? 복 받을 거다."


조금 더 달리다 보니, 자랑스러운 그 영웅들이 눈에 보였다. 바로 우리나라의 온갖 궂은 일에 어디서든지 나타나는 그 사람들, 군인 아저씨들이 단체 줄을 지어 눈을 치우고 있었다.

아, 우리나라에 군인 아저씨들이 없으면 자연재해 극복과 국난 극복은 어찌한단 말인가!

정말 그 순간만큼은 우리나라에 징병 제도가 계속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진심으로 했었다. 군인 아저씨들이여, 아임 쏘리 벗 아일러뷰!


우리는 해가 뜨고 8시가 좀 넘은 시각 드디어 금호리조트에 도착을 했다. 예약도 하지 않은 금호리조트 프런트에 가서 "방 하나만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프런트에서는 예상과 달리 우리를 반기며 "어서 오세요. 눈 때문에 못 오시는 분들이 많아서 방이 많이 비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예상과 달리 한옥 민박이 아닌 리조트에 짐을 풀었고 하얀 눈을 바라보며 노천 온천탕에 몸을 녹였다.

그것은 환상. 얼굴을 알래스카, 몸은 아프리카.

재스민탕, 레몬탕, 장미탕, 녹차탕, 포도탕을 번갈아 가며 눈과 온천을 우리는 만끽했다. 눈 때문에 손님도 없었다. 그 넓은 온천탕을 오로지 우리 가족만이 독채처럼 독탕처럼 이리저리 오가며 놀았다.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이 눈 밭에 한 바퀴 구르고 오기 등의 놀이도 즐겼다.


금호리조트 가는 길은 지옥이었지만 리조트 도착해서는 우리는 천국을 맛보았다.

겨울왕국을 만들어버릴 것처럼 내리던 눈은 10시가 넘어가면서 그쳤다. 정오가 넘어서는 길도 녹았다.

우리는 길을 나서지 않고 조용한 리조트에서 푹 쉬면서 하룻밤을 보내고 온천과 눈을 가지고 놀았다.


다음 날 해남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다음날 점심 무렵 도착한 해남은 언제 눈이 왔었냐는 듯 맑고 눈이 부신 겨울의 자연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한옥 민박의 온돌은 뜨듯했다. 우리는 이번에는 등과 배를 지져가며 즐거운 구경을 하였다.


그런데, 정작 해남에서 무얼 보고 구경했는지는 그 여행에서 지금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로지 전남 화순 어느 리조트를 찾아는 시골길 눈길이 그 식은땀 나고 오금이 저릿저릿했던 기억과 독탕처럼 놀았던 화순의 싸~한 공기와 붉고 노란 빛깔의 온천물만 기억이 난다.


우리는 관광지를 구경하러 떠나는 것이 아니라 추억을 생성하려 여행을 떠나는 것 같다.
해남이 기억이 안 나고 운주사의 돌탑들이 기억이 안나도 우리의 여행은 충분히 훌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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