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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Mar 01. 2021

이어령- <한국인 이야기> 너 어디에서 왔니

직장 때문에 친정엄마가 두 아이의 육아를 맡게 되었으며 친정엄마가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게 된 것이 나에게는 아주 큰 행운이었다. 당신이 우리를 키웠던 방법 그대로 손자와 손녀를 키워내셨다.  


내가 첫 애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러 친정집에 온 지 열흘쯤 지났을 때 아이 탯줄이 마침내 떨어졌다. 탯줄을 집어놓은 집게에 말라붙은 탯줄은 흉측하게 보였지만 엄마는 이 역시 색깔 고운 헝겊에 잘 싸더니 내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니 애가 뱃속에서부터 온갖 기운과 양분을 한데 모은 거다. 아이가 큰 일 있을 때마다 같이 하게 해라. 엄마 뱃속에서 힘을 모은 것 같이 온 힘을 모아주는 거다. 흉하다고 함부로 대하지 말고 애 낳을 때마다 잘 보관해라." 과학적 근거도 없는 탯줄의 영험함을 내 대학입시에서 이미 한번 겪은 나는 엄마의 간절한 기원과 말씀 때문이라도 탯줄을 잘 보관해야겟다고 생각했고 아직까지 잘 간직하고 있다.


아이가 두 어달쯤 지나 목을 스스로 가눌 수 있게 되자 엄마는 이내 애를 들쳐 업고 다녔다. 서서 부엌일을 할 때도 가벼운 손빨래를 할 때도 시장에 장을 보러 갈 때도 친구분들과 마실을 나갈 때도 포대기에 애를 업고 낭창낭창하게 걸으며 동네를 활보하였다. 시간이 흘러 아이의 무게가 제법 무거워졌음에도 주로 업고 많이 다니셨다. 반면 나는 허리가 아파 주로 걷게 하거나 유모차를 태우기를 선호했다. 내가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나들이를 나서면 엄마는 말하곤 했다. "유모차에 앉아있으면 어른들 발 밖에 더 보겠나? 엄마 등에 업히면 사람들 얼굴도 보고 경치도 보고 엄마 등에 기대서 자고 싶을 때는 폭닥 시리 편안하게 잠도 자고. 애가 세상을 보게 해야지 땅 하고 발만 보게하믄 되겠나? 엄마 편할라고 자꾸 유모차에 태우면 안 되지." 나는 내가 불편한데 아이인들 편하겠냐며 몇 번을 유모차를 고집했지만 사람은 평소 보고 듣는 게 무서운 것이다. 인이 박히도록 엄마에게서 들었던 포대기와 업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나도 어느덧 유모차보다 업는 것을 선호하게 하였다.

많이 어설펐던 업은 모습


"아이고 우리 되련님, 진지를 많이 자셨는 가베? 이렇게 이쁜 똥을 많이도 맹글었네!" "왕자님, 밥 잡수이시더. 많이 자시고 어서어서 크셰이." "되련님요, 목욕 하입시더. 따땃한 물에 노곤 노곤하니 목욕하고 한숨 주무이소." 엄마는 돌도 안된 아이와 끊임없이 대화하였다. 말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하였다. 아이라고 낮춰하는 대화가 아니라 한 인격체로 존중하면서 끊임없이 아이의 낯빛을 살피고 눈을 맞추며 몸을 어루만지며 대화를 하였다. 혼자 하는 말이었으면 두어 마디 하다 말았을 것이지만 엄마는 아이가 눈으로 몸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고 믿으셨다. '잼잼'도 '곤지곤지'도 '까꿍'도 그저 놀이가 아닌 대화의 하나로 힘들어하지 않고 아이와 교감을 하였다. 엄마는 손주가 아닌 자식에게도 저리 하셨을까? 기억이 없는 나는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엄마가 그렇게 정성을 기울여 키웠던 아들아이와 얼마 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TV에서 한 엄마가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가는 장면이 지나갔다. "요새 엄마들은 애를 대개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드라. 포대기에 업고 다니는 게 훨씬 좋은데."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이 불쑥 입 밖으로 나왔다. 아들은 업고 다니는 게 뭐가 좋으냐고 유모차로 다니는게 몸도 안 아프고 아이도 앉아 있으니 더 편하고 좋지 않냐고 하면서 과학적으로 따지지도 않고 옛 것이 좋다는 꼰대 같은 어른들의 생각 아니냐고 퉁을 쳤다.

무슨 말이든 어떤 일이든 근거를 대고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고 논리적으로 타당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요즘 세대인 아들에게 나는 근거를 대지 못했고 증명을 하지 못했으며 타당한 논리를 말하지 못했다. 그저 "너거 할매한테 들었고 할매의 할매를 통해 다 증명되고 전수된 내용이다"라고만 옹색하게 받아쳤다. 아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것을 눈으로 표정으로 양껏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내 말이 옳다고 자신하는데 근거와 논리를 대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속이 상했다. 부모님의 말씀이면 논리적이지 않아도 일단 수용하고 다만 내가 생활해나가면서 그분들의 말씀을 알아서 취사선택하여 사용했던 우리와 달리 논리적으로 수긍이 되지 않으면 용납을 하지 않고 보는 아이들 보면서 전통의 대물림이 이제 정말로 쉽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도 이제 나이라고 한 해 두 해 먹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몸의 나이만 먹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나이도 먹어가는 것인지 어릴 때 듣던 엄마의 말씀이 세월이 지나고 보니 옮은 말씀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엄마의 생활 모습이 현명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엄마 아버지가 내 나이 때 하시던 것들이 내가 내 아들 딸의 나이었을 때는 조금은 어리석고 오래된 인습처럼 나도 느꼈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나도 그들의 나이가 되고 보니 모든 것이 다 버리고 폐기해야 할 것들만은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고 있다. 배움과 깨달음은 왜 매번 뒤늦게 찾아오는 건지. 보고 듣고도 느끼지 못하는 온전한 내 탓인지 사소한 것의 소중함을 잘 가르치지 못한 내 어머니 아버지의 부족함때문인지. 온전한 젊었던 내 탓이라고 하자니 지금 내 아이들의 모자람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니 내가 잘못한 것이 아예 없다고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부모님 탓 조상 탓으로 돌리자면 지금 내가 또한 부모가 되었기에 곧 내 탓이 되는 것이다. 이래 저래 진퇴양난의 처지가 아닐 수 없다.

책의 목차


이어령 교수의 글을 좋아한다는 지인의 추천으로 <한국인 이야기-탄생: 너 어디에서 왔니>를 읽었다.

나이 80이 훨씬 넘은 노교수가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한국인의 좋은 습성과 풍습을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따져가며 우리가 얼마나 영민하고 자랑스러운 민족인지 모두 12가지 것들을 경험과 옛 글과 서양 문화와의 상호 비교를 통해서 연구하고 그것들을 한 권의 책으로 풀어놓았다. 원래는 중앙일보에 칼럼으로 썼던 글들을 묶어 새로 다듬어 편찬한 것이라고 한다.


내가 이 책을 미리 읽고 아들과 대화를 했더라면 적어도 포대기 문화에 대해서만은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우리 어머니가 나에게 말했던 업는 것의 위대함을 잊지 않고 기억에 품었다가 할머니의 논리를 당신의 손자에게 근거로 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탄생: 너 어디에서 왔니>는 뒷부분에 가서는 동의어의 반복과 약간은 요즘 말로 '국뽕'에 차오른 과장된 논리도 간간이 섞여 있긴 하지만 이것은 온갖 시대적 어려움을 넘고 헤쳐온 80이 넘은 노학자가 가진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으로 넘길 수도 있는 정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는 20~30대의 젊은 세대, 특히 아이를 낳고 키우는 혹은 막 낳으려고 하고 키울 준비를 하는 이들에게 더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들은 세상의 속도에 맞추느라 이런 콘텐츠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인생은 항상 뒤늦게 깨달음을 주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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