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난 친절한 편이다. 환대받길 원하고 인정받길 원하고 직간접적으로 되돌려받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미래를 그릴 수 없는 급박한 상황에 빠지게 되면 친절할 수 있을까? 아마도 회피하거나 친절하지 않음을 선택할 것 같다. 미래를 길게 보거나 애정을 갈구하는 상황이면? 나를 상처 입히면서 친절을 베푸는 위선적인 선택을 할 것 같다.
겉으로는 온유한 태도를 보이지만 환경에 따라 간사한 사람이란 범주에서 벗어날 순 없다. 어제가 그런 상황이었다.
병원에 들러 상담을 하고 4주 치 약을 받았다. 산책 겸 동막천을 걷고 어머니와 친구분이 즐기실만한 카페 몇 군데를 돌아보며 이곳저곳을 많이도 걸었다.
병원을 가는 날은 늘 심리적으로 지친다. 게다가 오랜만에 사람이 가득한 백화점을 들락거렸다. 날카로운 눈으로 살펴보는 직원분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이 더 지치게 만들었다.
백화점 직원의 시선 '살 거야? 말 거야?'는 발길을 급히 재촉하게 만든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떤 할머니가 중앙선 분리대가 몇 km나 이어진 곳에서 버스를 타셨다.
할머니의 행선지는 반대쪽이었다. 길 건너편에서 버스를 타야 했는데 길을 건널 수 있는 곳은 보이지 않았고 생소한 곳이라서 힘드셨던 모양이다. 버스기사 아저씨가 친절하신 분이라서 건널 수 있는 곳까지 태워주신다고 했다.
버스기사님이 '잠시 뒤 내려드릴 정류장에서 지하도로 건널 수 있어요'라고 할머님께 천천히 설명해 주셨는데 할머님은 건성으로 듣고 연신 고맙다는 말씀을 하고 계셨다. 한눈에도 여유가 없어 보였고 당장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 우선이셨다. 비까지 내렸고 서늘했으니 많이 힘드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내릴 정거장에 도착했다. 지하도로 건너야 하고 버스정류장이 잘 안 보이는 곳이다. 우왕좌왕 대시면서 근심이 깊어지고 불안해하실게 뻔했다.
누군가에겐 어머님, 누군가에겐 할머님
내심 '피곤한데....'란 생각이 들었지만, 안내해 드리고 산책하자는 마음에 할머님을 뒤따라 내렸다.
'이쪽이에요. 저랑 같이 가세요', '아유 고마워요' 짧은 대화로 정류장까지 안내해 드렸다. '19분 뒤에 도착하는 버스 OO번, 25분 뒤에 도착하는 버스 OO번을 타시면 되니까 천천히 기다리세요' 말씀드렸다. 1분 뒤에 도착할 노란색 마을버스는 할머니 행선지를 경유하는지는 알 수 없어서 카카오맵으로 노선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마을버스가 도착했다. 뭐라고 말할 새가 없이 할머니는 버스를 멈춰서 'OO 가나요?'라고 묻고 계셨다. 그것으로 내 할 일은 끝났다. 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꾸 맘에 걸렸다. 왜 제대로 끝까지 도와드리지 못하고 그냥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건지... 마음속으로 '오늘은 2만 걸음이나 걸었잖아! 오늘은 진료일이어서 마음이 피곤했잖아! 몇 년 만에 백화점을 나들이해서 힘들었잖아' 변명을 하고 있었다.
다시 할머니께 돌아갈까? 돌아가야 할까?
사실은 친절로 만족을 느끼길 원했던 마음이 있었다. 만족할 만큼의 친절한 행동을 했고 거기서 더 나아가는 귀찮음을 저울질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던 부분이 있었다. 자기만족과 저울질하는 친절이라니.. 고작 이 정도의 인간이란 것을 확인하게 되니 갑갑해진다. 어제의 '친절한 행동'에 후회했다.
성원권(成員權)은 구성원으로서의 인정과 권리를 뜻합니다. 사회적 성원권은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권리로, 법적 지위와 구별됩니다. 사람이라는 말은 사회 안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뜻이며,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는다는 뜻입니다.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은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친절한 행동을 하고 좋은 사람을 지향한다. 밑바닥에서 성원권을 바라기 때문인 것 같다.
난 친절의 정도를 결정하는 것에 원칙이 없다. 아마도 그때그때 '만족감'과 저울질을 하는 듯한 느낌이다. 내 친절의 깊이, 좋은 사람을 지향하는 깊이란 이렇게나 얕다. 아니... 사람이 원래 그 정도인 걸까?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그것을 끌어다가 돌려주라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