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키코모리 K선생 Apr 28. 2024

노동, 상처 그리고 89.9

육체노동의 기쁨과 신성함을 되새긴 날

오랜만에 두 시간 정도 봉사활동을 했다. 못쓰게 된 집기들을 부숴서 분리수거 가능하게 분해하고 청소하는 일을 했다. 요컨대 뼈와 살을 분리하는 일이다.


오함마를 풀스윙으로 휘둘러 "탕! 탕!" 소리를 내며 책상을 부순 뒤 빠루로 못 박힌 나무 집기들을 분리한다. 의자는 비닐과 쿠션을 칼로 뜯어낸 뒤 철제들만 차곡차곡 겹쳐서 쌓는다. 나무와 철을 트럭에 싣고 바닥에 널브러진 쓰레기들을 비닐봉투와 마대자루에 담는다.


뙤약볕이 뜨겁다. 튀어나온 못과 나무 가시들을 조심하며 일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일이 끝났다. 

씻어내도 끈적이는 땀과 먼지들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화장실에서 씻고 건물 로비에서 200원짜리 달콤한 밀크커피를 뽑아서 작은 원형 테이블에 앉았다. 시원한 그늘에서 덜 마른 피부의 물기가 날아가며 시원해지는 상쾌함과 달짝지근한 커피를 만끽하며 한숨 돌렸다. 몸이 생각처럼 잘 움직이진 않았다. 고작 두 시간이었지만 같이 고단한 육체노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는 사실에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발걸음 소리가 이상했다. 뭘까? 못 박힌 작은 판자가 신발바닥에 박혀 있었다. 밑바닥이 두꺼운 신발을 신어서 다행이다.


모두가 땀 흘리고 인내하면서 고된 일을 해내고 끝을 본다는 것, 육체노동의 기쁨과 신성함을 되새긴 날이다.




집에서 샤워를 했다. 팔뚝에 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오랜만에 상처가 생겼다.


최근 들어 상처가 잘 아물지 않는다. 겨울에 운동하면서 허벅지가 쓸렸었는데 그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이번 상처도 오래가려나?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팔뚝에 별다른 상처도 없이 자라온 게 어이없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엔 상처가 좋다. 흉터가 좋다. 살아온 흔적이고 이겨낸 흔적이다. 




89.9kg이 되었다.  99.9kg이 된 날을 돌아보았다. 그땐 두 자릿수 몸무게가 되었다는 것에 너무도 기쁘고 성취를 느꼈었다. 이번엔 기쁨이 느껴지질 않는다.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 상태에 가까워졌다. 바람직하다.

숫자는 숫자일 뿐이다


다이어트를 중단한 뒤  체중은 기록할 뿐 의식하지 않았었는데 오늘 확인해 보니 1달에 3.5kg의 감량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잘 먹어주는데도 감량이 이어지는 것은 근육이 빠지는 상황일 지도 모르겠다. 근육 상태를 주기적으로 모니터링해야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무릎 재활운동과 하체 인대 강화운동에 집중하고 있다. 무릎의 상태를 보기 위해서 1주일에 한 번씩 등산을 하고 있다. 지난주엔 등산 중에 무릎의 통증이 거의 없었다. 5월엔 초보 트랙킹 동호회를 따라 오대산에 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했던 것을 다시 즐길 수 있게 될 거라는 소망은 특별하다.




낮에 힘을 써서 한잠 자고 늦게 일어났다. 오늘은 카페에 가는 일과를 빼먹어서 부랴부랴 챙겨 입고 투썸플레이스에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책을 읽었다. 늦은 시간 카페에서 쓰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루 한번 카페에 가는 것은 정해둔 정신단련 일과이기 때문에 빼먹을 순 없다. 치료도구로서 카페를 가는 것도 끝이 보인다.


카페에서 나와 자그마한 트랙을 찬찬히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한 바퀴 170 걸음


취업활동이 잘 풀리지 않음에도 여유로운 기분이 들어도 괜찮은 건지, 5월엔 몸을 쓰는 아르바이트를 하자는 생각, 목표에 압도돼서 학습이 지지부진한 것을 타개할 방법, 히키코모리 경험을 살려 봉사할 방법, 날이 뜨거우니까 산책용 팔토시를 사야겠다는 생각, 수영해야겠다는 생각 등등


큰 불안과 걱정 없이 상념을 긁적이는 것으로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 있는 행복한 인간이 되어서 다행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친절의 깊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