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해방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나는 일부러 흠뻑 젖어 보기로 하며 우산을 펼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은 한 손으로 급히 머리를 가린 채 뛰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이상한 궁금증이 생겼다.
비가 오면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머리부터 감싼다.
어차피 몸은 다 젖을 텐데도 말이다.
왜일까.
비를 맞으면 머리가 빠질까 봐?
아니면 아침부터 한 시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마스카라와 파운데이션이 비에 흘러내릴까 봐?
나는 머리가 빠져도 상관없고, 화장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 답을 찾지 못했다.
탈모가 있는 사람들은 머리 빠지는 것에 예민하겠지만.
나는 가끔 비가 쏟아지는 게 좋다.
차가운 빗줄기가 옷에 스며들고, 천이 무겁게 달라붙는 감각이 묘하게 안정감을 준다.
비에 젖은 옷은 빨면 되고, 몸은 집에 가서 씻으면 그만이다.
그러니 오늘 같은 비는 나쁘지 않다.
온몸에 비를 맞으며 철벅철벅 걸어가는 모습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신발 속에서 물이 찰박거렸다.
축축해진 양말이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젖어 무거워진 머리칼에서 빗물이 코끝을 향해 주루룩 흘러내렸다.
비가 오는 날은 특유의 흙냄새가 올라온다.
나는 이상하게도 이 냄새를 좋아한다.
비는 나를 젖게 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더 가벼워졌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비가 좀처럼 그치지 않고 쏟아져 이 도로를 헤엄쳐 다니는 상상을 하곤 한다.
수영은 배워본 적 없지만 상상에선 가능하다.
거친 비는 온 세상을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빗물이 허벅지까지 잠길 정도로 쏟아지는 빗속에서
나는 일어나 두 손을 하늘로 향해 높이 들어 외친다.
다 씻겨 내려가라!
눈은 아주 먼 곳을, 아무도 볼 수 없는 현실보다 먼 곳을 바라보며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다.
살면서 이 정도로 웃어본 적이 없을 만큼.
이상하게 무언가에서 해방된 기분을 느끼면서.
그 상상은 현관 불빛을 보는 순간 사라졌다.
비에 젖어 무거워진 신발을 벗었다.
양말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며 카펫에 동그란 자국을 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부터 꺼내 화면을 켰다.
무사한지 확인하려고.
비에 젖어 고장이라도 났으면 그건 감성이 아니라 재난이다.
수리할 생각에, 정확히는 수리비용 때문이 머리가 꽤나 아팠을 거다.
장시간 맞은 차가운 비 덕분에 몸은 이미 오들오들 떨리고 있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보일러 전원 버튼을 눌렀다.
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비에 젖어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현관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무거워진 옷과 속옷을 벗어 구석에 던졌다.
차가운 비가 아닌 따뜻한 온수로 온몸을 적셨다.
아, 시원하다— 소리가 절로 났다. 숨이 길게 빠졌다.
빗물과 오늘의 피로가 조용히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따뜻한 물 때문에 김이 서린 거울에 내 몸과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살이 조금 빠졌네.
그리고 나는 아까 비를 맞으며 했던 상상을 다시금 떠올렸다.
묘하게 느껴지던 해방감. 그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나는 가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