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각주와 옮긴이 각주에 대한 고민
나는 각주와 참고문헌의 내용과 형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히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면 각주와 뒷부분의 참고문헌, 인덱스까지 찬찬히 읽는다. 그렇게 읽어야 책을 다 읽은 기분이 든다. 사실상 이 책을 만든 것이 각주에 담긴 보충 내용과 문헌들이기 때문에 내용 면에서 중요하고, 복잡한 서지정보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 형식 면에서 중요하다. 특히 조립, 로직, 퍼즐처럼 정해진 규칙을 따르면서 전체를 완성했을 때 그림이 보이는 그런 활동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각주 편집 과정을 매우 즐긴다. 논문 편집 아르바이트를 할 때 가장 즐거운 부분도 각주와 참고문헌을 편집하고 정렬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만드는 책의 각주라니! 당연히 소중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손을 봐야 했다.
그래서 책 번역에 들어가는 동시에 각주를 정리하겠다고 나섰다. 다른 출판사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각주는 맨 마지막에 편집해야 하는 것이 아닌 처음부터 상세히 살펴봐야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각주에서 참고문헌을 골라낼 수도 있고, 본문의 편집과 번역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를 발견할 수도 있다. 그래서 번역에 들어감과 동시에 각주 중 한국에 번역된 책이 있는지, 그리고 대부분의 인용 문헌이 인터넷 자료로 url로 표시되어 있어 유효한 링크인지 살펴보기로 했다. 그리 어렵지 않은 과정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인데 외국 문헌이 너무 많아 오히려 독서에 방해가 될 수 있으므로, 모든 각주를 후주로 빼기로 결정했다. 각주를 밖으로 추출한 이후에 번역본이 있는지와 url이 유효한지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스무 개도 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소리를 질렀다. "이 출판사 너무한 거 아니야?" 그도 그럴 것이 각주 형식이 엉망이고 유효하지 않은 url이 너무 많았다.
각주의 핵심은, 각주의 핵심은!! 형식이란 말이다!!!(부들부들) 이 정도면 실수가 아니라 성의가 없는 거다. 동일한 문헌이 반복될 때 어떤 각주에는 저자 이름부터 재인용하고, 어떤 각주에는 문헌명만 재인용한다. 어떤 각주에서는 출판사 이름을 괄호 안에 넣고, 어떤 각주에서는 출판사 이름을 괄호를 치지 않는다. 어떤 각주에서는 학술지 서지정보의 volume과 number를 빗금으로 구분하고 어떤 각주에서는 괄호로 구분한다.
총체적 난국, 엉망. 심지어 틀린 서지정보가 발견되기 시작하자 나는 분노하기 시작했다. 각주 형식이라는 것이 딱히 국제적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출판사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출판사 내부에서는 아니, 적어도 같은 책에서는 동일하게 맞춰야 할 것이 아닌가! 우리가 번역하는 책을 정작 원래 출판사에서 편집을 대충한 듯한 기분이 들자 조금 화가 났다. 우리가 기준을 세워 다시 형식을 맞추기로 했다.
url의 경우 편집을 하다 보면 중간에서 억지로 끊어 줘야 하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인터넷 주소는 띄어쓰기가 없다 보니 편집이 예쁘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점을 알고 있어서 띄어쓰기가 된 url을 잘 붙여서 제대로 된 주소로 만들었다. 그런데 주소는 멀쩡한데 접속이 안 된다. 유효하지 않은 주소란다. 머릿속에서 펑펑 폭죽인지 화산인지 모를 무언가가 터지기 시작했다. 기사명과 기자의 이름으로 검색해서 url을 하나하나 다시 찾아 나갔다. 유효한 url을 다시 찾고, 이미 사라진 페이지는 동일한 자료가 업로드된 페이지를 찾아내서 보완했다. 진짜 이 출판사 너무한 거 아닌가.
소피와 요룬이 본문에 신경을 쓰는 동안 나는 혼자서 "있잖아, 각주가..." 이러면서 딴 소리 중이었다. 위에 말한 것처럼 각주의 대부분은 인터넷 url이었는데 종이책으로 이 정보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전자책으로 출간하면 하이퍼링크를 통해 쉽게 접속할 수 있을 텐데. 종이책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무리 사람들이 각주를 안 본다고 하지만, 그리고 지금처럼 후주로 넣을 생각을 하면 사람들이 거기까지 읽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각주에 꽤나 재밌는 자료가 많아서 사람들이 접속할 수 있게 만들고 싶었다. 요룬은 본문 옆에 여백을 두어 필요한 정보를 QR코드로 접속할 수 있게 하는 건 어떨지 의견도 냈지만 책의 판형이 커질 수도 있고 도리어 본문과 각주가 주객전도 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중요한 고민이었지만 다른 부분에 신경 쓴다고 잊혀져 가고 있었는데 표지 디자이너가 조심스럽게 url을 접속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줬다. 예상 독자까지 이렇게 말하니 다시금 생각을 해보게 된다. 결국 주석 페이지에 QR코드를 넣어서 각주를 링크로 삽입한 스프레드시트에 접속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해놓고 보니 인터넷 자료 외에 단행본이나 논문도 링크를 달 수 있어서 원하는 자료를 찾기가 훨씬 쉬웠다. 인터넷으로 모든 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 세상에서 종이책에 잉크로만 적혀있는 참고문헌들이 늘 아쉬웠는데, 살아난 기분이랄까? 이런 점에서는 전자책이 강세를 보일 수도 있지 않나- 라는 생각까지 갔으나.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각주와 참고문헌을 보지 않아"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그래, 일단 이 정도의 무게로만 고민하자.
우리가 번역하는 책은 데이터와 관련한 책이지만 인지과학이나 기술적인 이야기, 다양한 국가의 사례도 나오다 보니 생소한 용어와 사례가 많았다. 이 모든 것에 옮긴이 각주를 달아야 할까? 어느 정도가 적당한 걸까. 그리고 위치는 본문이 좋을까 아니면 본문 아래가 좋을까. 이렇게 고민이 될 때는 다른 책을 본다. 샘플로 뽑아둔 몇 권의 책을 보면서 참고하기 시작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당연히, 책마다 다르니까.
게다가 각주를 고민하다 보니 독자가 어떤 사람일지가 더욱 고민되기 시작했다. 우리 책을 접할 독자는 본인이 모르고 넘어갈 거라 생각하는 정보를 알아서 소개해주는 책을 원할까? 혹은 본인이 모른다고 생각하는 정보를 자세히/간단히 짚어주는 걸 원할까? 혹은 어렵고 긴 각주는 독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할까? 혹은 설명을 제대로 안 하는 책은 편집이 아쉽다고 생각할까?
아 어렵다. 도무지 독자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나와 소피, 요룬 모두 독자 핑계를 대며 이 각주가 필요하다, 이 각주가 없으면 안 된다, 이 정도의 분량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셋 다 생각하는 독자가 다르니 뭐 그냥 우리 셋이 합의를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수많은 독자들의 합의를 대신 봐주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짧은 각주는 본문 안으로, 긴 각주는 본문 아래로. 각자가 필요하다고 하는 정보를 웬만하면 넣고. 설득과 양보와 포기와 합의를 거쳐 각주를 결정했다. 결국 이렇게까지 소개해줘야 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굳이 읽지 않겠지 라는 애매한 수준으로 독자를 정했다. 꽤나 합리적인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본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각주부터 언급하는 것은 소피가 아닌 힐데가 편집일기를 작성하기 때문이다. 다음 화에서는 이제 진짜 번역 이야기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