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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우리가 번역을 했다!

번역이란 무엇인가

by 힐데와소피



번역이란 무엇인가

번역이란 영어 문장을 보고 읽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영어 실력+한국어 실력+a 랄까? 한국어로 하고 있는 생각을 한국어로 옮겨 적는 것도 아니고, 영어로 적힌 글을 한국어로 의미만 전달하면 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어로 내는 책은 저자와 편집가 간의 소통만 있으면 되겠지만 번역은 저자와 역자와 편집가 세 명이 소통하는 기분이다. 그 자체로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요룬의 번역은 의미와 뉘앙스를 최대한 살리고 있었고 소피의 편집은 독자들이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문장을 중심에 두었다. 번역의 '번'자도 모르는 나는 어디에 중심을 두어야 하고 글을 봐야 하는 것일까. 내 기준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나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 없이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문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비교적 해석의 여지가 없는 문장을 좋아한다. 독자가 여러 방향으로 추측해야 하는 문장이라면 그건 시와 소설과 같은 문학의 영역에서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번역은 먼저 저자의 맥락적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다음으로 그 의도를 정확히 살린 한국어 문장을 쓰되 마지막으로 어렵지 않으면서도 명확한 문장을 써야 한다.


나는 더 좋은 문장을 만들기 위해 끝까지 고민하는 요룬과 소피를 보며 "그렇게까지 해야 해?"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처음인데도 문장을 정확히 번역하고 정확히 번역하기 위해 한 단어에 집요함을 보이는 요룬을 보며 놀랍기도 했고, 마찬가지로 처음인데도 유연한 문장으로 편집하고 번역책에 대한 기준을 높여 나가는 소피를 보면서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 지치기도 했고 (과장 없이 내 평생 가장 어려운 작업 중 하나였다) 나의 오만함과 맞닥뜨리는 과정이기도 했다. 번역가 노승영 선생님이 쓴 칼럼 중 이런 문단이 있다.


진짜 모르는 사람이 "못 알아듣겠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무지와 상대방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데 반해 아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이 "못 알아듣겠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네가 똑바로 설명하지 못했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대화 상대방에게는 나를 이해시킬 의무가 있다. 물론 내가 '대상 청자'가 아니라면, 즉 화자가 대화 상대로 의도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이해의 의무가 나에게 부여될 테지만. 노승영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아나키즘'이라고?>


이 작업을 시작하기 전 대상 청자를 정해두었었지만 이제 돌아보면 그렇게 분명하지는 않았다. 간혹 그 대상 청자가 내가 생각한 수준보다 높거나 낮은 부분이 보이면, 결국 청자에게 맞추기보다는 내 기준에 맞춰 의견을 밀어붙였다. 결국 기준은 청자가 아니라 나였던 셈이다. 나 혼자 만들었다면 내 맘대로 만들었겠지. 모두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책을 만드는 일은, 번역을 하는 일은 끝날 때까지 함께 만들어나가는 사람의 의견을 합의해가는 일이다.


대체로 고통스러운 순간이 이어졌지만 종종 단어를 어떻게 번역하냐에 머리를 모았는데 꽤나 뿌듯했던 번역이 있다. disinformationmisinformation을 번역하는 데서 애를 먹었다. 해외에서는 이미 두 개념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정해진 개념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disinformation은 '역정보'로, misinformation은 '오정보'로 번역을 하는데. 역정보와 오정보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전을 찾아봐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웠다. disinformation은 거칠게 설명하면 정보가 아닌 것을 의도적으로 정보로 만드는 것, misinformation은 잘못된 정보를 의심 없이 정보로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주 나오는 단어라서 반드시 동일한 단어로 번역해야만 했다. 생각나는 여러 단어들을 조합하고 후보를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몇 주를 씨름하던 우리는 disinformation은 '허위조작정보'로 misinformation은 '단순허위정보'로 결정했다. dis와 mis를 대구로 만들어 살리고 싶었지만 중요한 건 의미였다. 단어만으로도 조작된 허위정보와 의도치 않게 확산되는 단순한 허위정보가 구분되는 것 같았다. 만족스러웠다. 번역가의 일이란 언어 자체를 창조하는 일일 수도 있겠다.




번역 과정을 마치고 나서 매우 기뻤던 것은, 우리의 집요함이 의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읽기에 매끄러운 문장을 만들었다는 것이다.(역시 결론은 이렇게 나야 제맛!) 몇 달 동안 이 책이 담고 있는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관련된 자료들을 공유하는 시간들도 행복했다. 친구들과 누가 요즘 이런 활동을 하겠는가. 책 판권면에 우리 셋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걸 보니 성취감에 벅차기보다는 그냥 뜻 모를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정말 힘들었지만 두고두고 그때 너무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공유된 경험을 또 하나 갖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잘하고 있는 건 알겠는데, 이런 책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리지?



글. 오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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