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부엉이의 저슷두잇: 연구자의 일에 대하여
모든 자기 계발서에서 빠지지 않고 강조하는 '기록하고 메모하는 습관'. 연구자에게도 예외는 아니죠. 하루 종일 논문에 관한 생각을 하다 보면 그냥 스쳐 지나가버리는 생각들이 참 많아요. 저는 그걸 붙잡아 두기 위해 약간의 힌트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면 메모장을 열어 기록합니다. 흘러가는 걸 붙잡아내는 메모는 정말 중요하죠. <아무튼, 메모>라는 책의 저자인 정혜윤 PD는 메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혼자서 메모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는 사회적 존재다. 메모는 재료다. 메모는 준비다. 삶을 위한 예열 과정이다. 언젠가는 그중 가장 좋은 것은 삶으로 부화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메모할지 아무도 막지 못한다는 점이다. 67쪽.
여러분은 이 문단의 핵심 단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 생각에는 '언젠가는'입니다. 메모는 예열 과정일 뿐이에요. 메모는 '언젠가는' 부화해야 합니다. 메모한 그 순간만큼은 어마어마하게 중요하고, 놀라운, 내 연구를 구원할 수 있을만한 내용인 것 같죠! 그래서 우리의 메모장은 늘 단어와 단상으로 넘쳐납니다. 저는 이런 적도 있었어요. 꿈속에서 정말 괜찮은 연구 주제와 대략적인 목차를 정한 거예요. 일어나자마자 잠이 덜 깬 채로 더듬거려 핸드폰을 붙잡고 생각나는 대로 막 적어나갔죠. 그러고 나서 정신이 든 후에 메모를 제대로 봤는데 정말 별 내용 아니었어요... 정말 하찮은 내용이더라구요... 그때의 그 허무함이란. 이렇게 적어둔 메모의 80% 정도는 사실 별로 의미 없는 내용일 확률이 높습니다. 중요한 건 의미 있는 20%의 메모입니다. 메모를 정리해서 의미 없는 80%는 덜어내고, 의미 있는 20%를 부화시키는 것! 이것이 메모의 핵심입니다.
당연히 가장 중요한 건 그 메모를 반드시 다시 열어보는 것입니다. 열어보지 않으면 메모는 그냥 버려진 단어와 문장에 불과합니다. 주기적으로 반드시 메모를 확인하세요. 이미 여러분이 하고 있는 습관에 더해 루틴을 만드는 것도 방법입니다. 아침에 메일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면 이때 함께 메모를 확인하세요. 자기 전에 인스타 피드를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면 이때 함께 메모를 확인하세요. 자신의 메모를 확인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때까지 반복해야 합니다. 익숙해졌다면 매일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몰아서 보는 것 같네요.
두 번째로 삭제할 메모와 사용할 메모를 분류해야 합니다. 분류를 할 때는 반드시 자신만의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보관하는 메모의 기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새롭거나 영감을 줄 것. 둘째, 문장이 기가 막힐 것. 기준을 보면 잘 아시겠죠? 생각보다 남는 메모는 많지 않습니다. 살아남은 메모들은 어떻게 사용할까요? 만일 지금 당장 하고 있는 연구에 관련된 것이라면 바로 몸글에 적용하면 되겠지요. 하지만 딱히 사용할만한 데가 없다면 아래 방법을 사용하여 메모를 잘 보관해주세요!
먼저 살을 덧붙여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메모를 바탕으로 짧은 하나의 문단을 씁니다. 생각을 조금 더 진전시키는 것이죠. 그렇게 만들어진 글은 저만의 비밀 블로그에 업로드하거나, 임시글로 저장하거나, 메모장에 보관해둡니다. 이 메모는 나중에 다시 보고 점점 내용이 불어나겠죠? 연구와 관련된 메모라면 통통해졌을 때 잘 잡아먹으면 됩니다. 둘째, 글을 덧붙일만한 메모가 아니라면 관련 있는 메모들을 모아서 구조화를 시킵니다.(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업이기도 해요.)
구조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논문뿐 아니라 세상을 보는 데도 아주 중요한 방법이죠. 어떤 사람들은 굳이 그려내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이를 해내기도 합니다. 마치 BBC 드라마 <셜록>에 등장하는 기억의 궁전(mind palace or memory palace)처럼요. 셜록은 머릿속에 일정 공간을 구성하고 그 공간에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들을 차곡차곡 쌓아둡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면 아래 그림처럼 두 손을 곱게 모으고 눈을 감고 궁전을 헤매죠. 원하는 정보를 다시 찾아내기 위해서요! 제 친구 중에서도 기억력이 좋은 친구들은 공간을 상상하며 기억한대요. 책에 있는 표를 외우기 위해서 그 표가 있는 페이지를 기억해내는 그런 방식이죠. 하지만 저처럼 기억력이 좋지 않으시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합니다. 이때 필요한 건 '시각화'입니다. 머릿속으로 궁전을 떠올릴 수 없다면 펜을 들고 그려내야죠.
오늘은 구조화가 아닌 메모가 주제였으니 구조화의 방법에 관해서는 언젠가 다시 한번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요즘 바질을 키우고 있는데요. 메모하는 것이 바질 잎을 따는 것이라면, 분류하는 것은 상한 이파리와 먹을 수 있는 이파리를 구분하는 것. 바로 적용할만한 메모는 지금 당장 파스타에 넣는 것. 그리고 문장-문단으로 작성하거나 구조화하는 것은 나중에 다른 요리에 사용하도록 바질 페스토로 만들어두는 것. 이렇게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당연히 바질과 페스토 모두 넉넉할수록 좋겠죠? 여러분의 메모 중 좋은 것은 반드시 여러분의 연구를 빛나게 만들 거예요! 부엉!
글. 수리부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