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졸데 카림의 '나와 타자들'
평화는 갈등을 전제로 합니다. 갈등이 없다면 평화롭습니다. 고로 남북관계에서도 ‘평화’란 말을 쓰지만, 우리는 자주 ‘내면의 평화’도 말합니다. 마음에도 갖가지 갈등과 번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사회가 평화롭다는 것은 갈등이 최소한인 상태를 뜻할 것입니다.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그 갈등이 무엇인지 먼저 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서부터 이야기는 갈라집니다. 누구는 친일세력과 민족세력의 갈등을, 누구는 친자본과 친노동을, 누구는 밀레니얼 세대와 386세대를, 누구는 한남과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때 우리사회는 적과 동지의 구별이 명확했습니다. 그러므로 각자의 목표도 명확했습니다. 언제 어디서 선을 그어야 하는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선을 긋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좌절감을 자주 목격합니다. 우리 편이라 생각했던 사람의 충격적인 배신, 적이라 생각했던 사람의 뜻밖의 발언. 당신이 뭐라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분노, 어떻게 주제넘게 그런 말을 하겠냐는 침묵. 이런 징후들에서 분명 우리사회는 그전에 있었던 명확함과는 다른 분위기에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저는 우리사회의 갈등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우리사회가 다원화된 사회로 체질적으로 변화하였다는 사실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 ‘이졸데 카림’은 그의 책에서 “우리는 다원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새로우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다. 비(非)다원화 사회, 즉 동질사회로 돌아갈 방법은 이제 없다.”라고 단언합니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고 인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은 말했습니다. 동질사회는 민족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라고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카림은 국가가 형성되기 위해 ‘민족’이라는 상상이 필요했고, 동질사회는 이를 기반으로 사회를 안정적으로 통합시켰다고 설명합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한반도로 상징되는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로 ‘민족’을 이해해왔기에 민족국가라는 표현이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만, 카림이 사는 유럽에는 다양한 민족과 분리되지 않은 영토로 동질사회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환경이었습니다. 그런 유럽에서 ‘민족이라는 잘 기능하는 허구’의 개념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대중을 결합하고, 사회를 하나로 만드는 유일한 정치 서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민주주의가 싹틀 수 있었습니다. 바로 현대 민주주의는 우리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어떤 직업을 가졌든 간에 ‘동등’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유럽과 미국사회는 이주민과 난민의 유입으로 인해 점차 ‘다원화’되어 왔습니다. 우리나라는 그에 비하면 적은 규모이지만, 무시하지 못할 비중을 차지하게 된 ‘외국인 노동자’, ‘결혼이주여성’, ‘조선족’, ‘북한이탈주민’들로 보이지 않게 다원화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다원화된 사회’라는 인식은 단순히 사회구성의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개념인 ‘동질성’과 ‘당연함’이 균열이 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도 포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림은 다원화가 외부적인 과정이며 ‘더하기’가 아니라, 그 사회 체질의 변화 그 자체라고 설명합니다.
다원화라는 변화는 두 차원에서 일어나는데, 하나는 우리가 사회에 속하는 방식의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이 두 변화를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바로 ‘개인주의’입니다.
카림은 개인주의를 시대에 따라 3개로 나눕니다. 1세대 개인주의는 180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는 모든 개인을 동등하게 만드는 ‘(개인의 특성이 무시되기에)모순된’ 개인주의였습니다. 자신의 구체적인 특징의 배제와 추상화를 통해서 개인은 ‘보편적인 개인’이 되었고, 민주사회의 시민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다 유럽에 1960년대 이르러서는 68혁명 등의 사회변화와 맞물려 개인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된다고 보는 2세대 개인주의가 등장합니다. 2세대 개인주의에서야 우리가 생각하는 개인의 특성과 주체성을 인정하는 개인주의, 주체 스스로가 정체성을 정의하는 개인주의를 뜻하게 됩니다.
그런데 3세대 개인주의는 1세대와 2세대와는 ‘다른’ 사회의 개인주의입니다. 카림은 “다원화는 3세대 개인주의를 의미한다”라는 명제를 가져옵니다. 1세대와 2세대가 동질사회를 전제로 한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이었다면, 3세대 개인주의는 어쩌면 다원화 그 자체, 그리고 다원화 사회에서 1세대와 2세대 개인주의가 공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이지요.
이 이야기를 우리나라로 가져와 본다면, 민주화 이전의 시기를 1세대 개인주의로, 그리고 민주화 이후의 시간을 2세대 개인주의로, 또 페미니즘이 주목받기 시작한 2010년대 후반기를 3세대 개인주의의 등장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서구 사회에 비하면 우리사회의 ‘다원성보다는 동질성이 강한 사회다’라고 여전히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워낙 동질성이 강한 사회였기 때문에 다원화에 대한 변화는 더욱 민감하게 느껴지는 지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점차 사회가 다원화되었다는 인식은 점차 가파르게 확산되는 느낌입니다.
다원화된 사회가 바람직하면서도 곤혹스러운 것은 이 변화는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미래를 예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북통일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외국인 노동자나 결혼이주여성 혹은 북한이탈주민의 존재는 잠시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우리는 한류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한류 안에 미국 흑인의 문화인 ‘랩과 힙합’, 일본 대중문화에서 착안했던 ‘아이돌’이 있었다는 것을 망각합니다. 다원화된 사회는 우리가 ‘우리의 것’이라고 여겼던 당연함에, 원래 그런 것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허무한 전망을 내놓습니다.
다원화된 사회는 과연 우리가 ‘공유’하는 것은 무엇인지 의문을 갖게 합니다. 카림은 페이르 로장발롱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 시대에 공존을 위한 핵심 질문은 “어떻게 동등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다를 수 있을까?”라고 말합니다.
다시 우리사회의 갈등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돌아간다면, 다원화된 시대의 갈등은 결코 하나로 규정할 수 없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형태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갈등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 간의 갈등이기 때문에 더욱 풀기 어렵습니다. 광화문 집회에 나서는 보수 기독교 성향의 어르신들, 광화문 광장에서 퀴어퍼레이드를 벌이는 LGBT는 결코 ‘합의’에 이를 수 없는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입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서로가 ‘공유’하는 것이 있다고 설득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설득을 과연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민주화가 만든 모순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는 개인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허락하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에 소속되었던 개인을 더 잘고 다양하게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남북의 ‘평화’보다도, 내면의 ‘평화’를 더욱 자주 이야기합니다. 내면의 평화는 나와 다른 타자와 잠시 멀리 떨어져, 혼자만의 자족감과 편안함을 느끼는 상태를 흔히 뜻합니다. 지금 사람들이 인식하는 평화는 타자와의 갈등의 해소가 아닌, 타자를 제외한 주체의 안락함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으며, 이는 앞으로 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다 할지라도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당위적으로 우리는 ‘타자와의 평화’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카림은 ‘긍정적인 함께가 아닌 오히려 부정적인 함께에 본질이 있는 새로운 방식의 전체’로서의 사회를 완전히 새롭게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이는 우리가 사회를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 ‘동질사회’와는 다른 ‘대안적 사회 개념’을 찾아야 한다는 제안입니다.
그것이 무엇일지 카림도, 저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카림이 설명한 앞서 ‘다원화된 사회’에 대한 이야기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가 제안하는 새로운 이야기에도 수긍이 갑니다. 우리가 이전까지는 ‘민족’이라는 허구의 개념으로 우리가 긍정적인 하나였다면,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새로운 허구의 이야기가 필요한 때가 언제고 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참고자료 : 나와 타자들, 이졸데 카림, 민음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