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선을 넘는 표지 다지인

〈데이터, 민주주의를 조작하다〉표지 제작 일화

by 힐데와소피


지난 화(라기에는 무려 네 달 전의 글)에서 〈데이터, 민주주의를 조작하다〉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며 어마어마한 표지를 준비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눈길을 끌만한 표지를 만들어서 한 번이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보자는 포부였다. 처음 만들었던 책, 〈나는 통일을 땡땡합니다〉의 표지는 너무 편집자의 의도와 의미가 많이 들어가서 작가의 재량이 더 잘 발휘되게 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힙하고 눈에 띄는 표지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물론 그렇다고 시중에 일반 사회과학 책들처럼 진중하거나, 딱딱한 느낌을 주고 싶진 않았다. 반골 기질을 타고난 힐데와 소피 아닌가. 기왕에 다를 거 '눈에 띄게' 달라야 한다.


섭외하고 싶었던 몇몇 표지 디자이너들이 있었는데, 왠지 몇 달 전 먼저 인스타그램 DM으로 연락을 주셨던 S디자이너가 떠올랐다. 겨우 책 한 권 낸 출판사임에도 우리를 엄연한 '영업 대상'이라 생각하고 메시지를 주신 그분의 정성이 감탄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인스타에 올려놓은 S디자이너님의 포토폴리오 역시 마음에 들었다. 시중에 판매되는 책은 아니지만, 직접 책을 읽고 시안을 만드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래픽 디자인이란 호기심을 유발하는 무언가가 있으면 더욱 눈길이 가는 법.


메일로 제작을 의뢰하자 힐데의 마음에 쏙 드는 회신을 받았다. 길고양이의 문제를 살뜰히 챙기는 TMI정보와 함께, 일정과 표지 제작 의견 그리고 그 외 의견까지 별도의 단락을 나누어서 정리한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분 한 두 번 일한 솜씨가 아니다"라는 직감과 함께, 책을 읽으면서 이미지를 그려보겠다는 그 진중한 문구가 더없이 신뢰감을 주었다.


하지만 너무 기대가 큰 탓이었을까. S디자이너가 약속한 날짜의 시안 파일을 열어보았을 때, 흠칫하고야 말았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나 평범한 시안이었다. 원고를 보고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우리는 디자이너의 인스타그램의 포토폴리오 같은 "강렬하지만 세련되고 추상적이지만 직관적인" 시안을 원했다(물론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그림이지만 그럼에도 이상형은 늘 존재한다). 크나그 소령과 요룬까지 합세해서 시안을 보고 의견을 나누었지만, 결국 새로운 시안을 한 번 더 요청하자는 것으로 의견의 모아졌다. 그리고 우리의 의사를 보다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직접 그와 만나기로 했다.






그리하여 성사된 S디자이너와의 첫 미팅. 조심스럽게 지난 시안들이 왜 실망이었는지 의견을 전달했다. "저희는 이제 막 시작한 출판사이고, 정해진 틀이나 무엇에 대한 전문성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우리가 내는 책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고, 그렇다고 기존 출판사처럼 안전한 디자인을 원하진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달랐으면 합니다." 그러자 하얀 마스크 위로 이제야 당신들을 이해하겠다는 듯한 의미의 놀라움과 반가움의 눈빛이 읽혔다. S디자이너는 이제껏 일해 온 출판사 경우 대부분 과감한 시도보다는 안정적인 시안을 원했다며, 더 일찍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했다.


나도 저 말의 느낌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있다. 갑이나 상사에게 '진짜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는 말을 듣고 마음껏 했을 때 결과가 좋은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결국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아주 약간만 튀게 했을 때 결재가 떨어지곤 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을은 당연히 자동적으로 그 벗어나지 않는 선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한정한다. 이를 막고자 한 번 더 우리의 의사를 강조할 필요성을 느꼈다. "디자이너님이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만든! 그 인스타그램의 포트폴리오가 마음이 들었고, 그 정도의 과감함을 원한다!"라고. 완전히 새로운 시안을 요구하는 부탁이었지만, 다행히 그는 오히려 재밌겠다며 의지를 다졌다.




그렇게 네 번째 표지 시안이 왔다.


그리고 대망의 새로운 시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메일함을 열자마자, 강렬한 색채가 먼저 눈 안에 들어왔다. 그 어디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하고 도전적인 디자인. '좋다'는 기준은 모두 다르지만 힐데와소피, 그리고 크나그 소령과 요룬 모두 표지를 보고 '좋네'라고 말했다. 다들 다른 이유로, 다른 부분이 좋았겠지만 어쨌든 결론은 '통과'였다. 언젠가 힐데, 소피, 요룬, 크나그, 이 네 명을 모두 만족시키는 경우는 흔치 않음을 발견한 적이 있다.


이 네 명의 취향과 성격은 너무 달라서 평소엔 한 두 명이 누군가의 결정을 따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네 명이 '좋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은, 네 명이 원하는 <데이터, 민주주의를 조작하다>의 이상형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마음에 드는 시안이 나오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S디자이너가 표지를 구상하며 쓴 글을 메일과 함께 보내주셨는데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 표지에 실기로 결정했다. 제목과 부제의 위치와 폰트를 정하고, 표지의 재질, 색상을 함께 검토했다.


인류에게는 자연에서의 생존 그 이상을 향한 문명이라는 시스템의 탄생이 있었다. 그 이후, 몇몇에 의해 기록된 특정한 시점들을 통과해 결국에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의 발명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곳들은 주로 자연에서 발견 가능한 곡선의 모양이 아닌 여러 직선들의 중첩으로 구획돼 있으며, 그 안에는 다양해 보이나 실은 이분화된 모습에 불과한 군중들의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그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종국에는 마치 블랙홀처럼 인류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고도 남을 검은 무언가가 보이는 것이다.



과감하지 않으면 배울 수 없다.


책이라는 결과물이 중요한 만큼, 책을 만드는 것도 의미 있는 활동이다. 특히 책을 만드는 과정에 여러 사람들과 회사(디자인회사, 마케팅회사, 인쇄소 등)가 다양하게 협업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서로 너무 많은 욕심을 드러낼 경우에는 그 과정이 힘들 수 있지만, 함께 하는 이들이 욕심이 없다면 좋은 책이 나올 기회의 문은 더 좁아진다. 그래서 책을 만드는 일에 관여된 모든 이들이 '욕심'을 내는 환경이었으면 한다.


S디자이너와 몇 차례 미팅에서 우리는 그의 의욕적인 모습을 만났다. 그의 조심스러운 질문과 요청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그에게서 배울 건 더 많아졌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어려울 수 있겠지만"이라는 전제를 붙이면서 별색, 종이, 코팅 등 원하는 방식을 요청해왔다. 돈이 조금 더 드는 일이었지만 새로운 시도이자 배울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대부분 오케이했다(이렇게 배우지 어떻게 배우겠는가). 이제 책 한 권 낸 힐데와소피에게 S디자이너가 선배인 셈이었다.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면에서 현업 북다지이너의 업무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번만큼은 과감했기에 배운 것이 있었다. 어느덧 책이 인쇄소에 까지 갔다. 이제 책을 홍보할 시간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블랙라이브즈매터, 미국 대선, 소셜 딜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