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민주주의를 조작하다>를 전자책으로 만들다
<데이터, 민주주의를 조작하다> 편집일기 마지막 글을 올린 게 3월인데 어느덧 9월이 되었다. 그 글의 마지막을 보니 다음에는 '신간 홍보'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가져올 것처럼 말했지만. 이미 시간도 많이 흘러버렸고 신간 홍보 이야기는 재미도 없어서 뛰어넘기로 했다. (김소피 대표님께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자면 늦어질 대로 늦어진 오힐데의 편집일기를 빨리 마무리 지으려는 수작은 아니다.)
오늘은 첫 도전이었던 전자책 제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데이터, 민주주의를 조작하다>를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이 책의 전자책을 직접 만들겠다며 선언했다. <나는 통일을 땡땡합니다>의 경우 페이지 번호가 중요하고 페이지를 넘나드는 형식이라 전자책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데이터, 민주주의를 조작하다>는 전자책으로 만드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평소 종이책만큼이나 전자책을 선호하는 나는 내 손으로 직접 전자책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우리가 '직접' 종이책을 만드는 것처럼 '직접' 전자책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전자책을 만들 줄 몰랐다. 하지만 뭐, 배우면 되니까. 힐데와소피가 사용하는 노션의 출판 페이지에는 '학습' 페이지가 있다. 책을 만들지 않는 시기에는 비수기고, 본격적으로 책 제작이 들어가는 시기에는 이 페이지들도 활발해진다. 모든 것을 외주로 돌릴 수는 없는 법! 외주로 돌리지 않고도 좋은 퀄리티를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부하는 것뿐이다.
교정/교열을 직접 하기 위해 맞춤법, 띄어쓰기 공부를 진지하게 시작했었는데 꽤나 재밌었다. 그러니 전자책도 그렇게 시작하면 되는 게 아닐까? 다행히 나는 원리와 규칙을 배우고 그걸 응용하고 적용하는 걸 좋아한다. 전자책도 왠지 그런 성질의 것일 듯했다. 책이 마무리가 되어가는 시점이 되면서 회의 때마다 전자책은 언제 만들면 되냐고 물었다. 종이책을 한 권이라도 더 팔기 위해서는 전자책을 늦게 올리는 것도 방법이었을지 모르나 나는 그저 전자책을 만들 생각에 신이 났었다. (이때의 배움으로 <어쩌다가 북한학> 전자책은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만들 것 같다, 하핫!)
무언가를 배우기로 마음먹었으면 선생님을 찾아야 한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배움의 가장 큰 지름길이다. 선생님을 찾는 공간은 책, 블로그, 강의 플랫폼, 유튜브.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는 여러 선생님들을 이런 공간에서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몇 번의 검색을 통해 가장 많이들 사용하는 시길(sigil)로 전자책을 만들기로 결심했고, 선생님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책이나 강의 플랫폼으로는 적당한 선생님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다양한 웹사이트의 검색창에서 'sigil 전자책 만들기'를 검색했고, 자신의 노하우와 경험을 나눠주는 여러 선생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일타강사보다는 원리를 설명해주는 선생님을 좋아한다. 예를 들어 기타를 처음 배울 때, "몇 번째 줄에 몇 번 플랫을 누르면 G코드야"라고 말해주는 선생님보다는 "G코드를 이렇게 잡는 이유는 플랫 한 칸이 반음씩 올라가기 때문에 각 줄에서 G코드의 구성인 솔-시-레 중 가까운 음을 누르기 때문이야"라고 말해 주는 선생님을 좋아한다. 그렇게 배우면 나 혼자서도 다른 코드들을 얼마든지 만들어 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더욱 흥미를 가지고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배우고자 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커리큘럼을 가진 선생님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전자책을 만드는 목적은 개인적으로 소장하거나 무료로 배포하는 것이 아니라 서점 플랫폼에 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전자책 제작과 동시에 서점 플랫폼마다 차이점을 짚어주는 선생님이 필요했다. 리디북스, 알라딘, yes24, 교보문고 등 내가 올려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정보를 알려줬으면 했다.
많은 선생님들 사이를 헤매다가 아주 좋은 선생님 한 분을 발견했다. 실제 출판사 편집자이며 전자책을 만드는, 유튜브 채널명이자 실명인, 'Kwanghee Lee' 선생님이다. 전자책 제작을 배워야 하는 분이 있다면 강력 추천한다. 블로그나 유튜브에 시길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분들이 많지만, 실제 판매용으로 전자책을 만든다면 그리고 기초부터 심화적인 부분까지 차근차근 배우고 싶다면, Kwanghee Lee 선생님이 최고인 것 같다.
전자책을 만드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Kwanghee Lee 선생님 덕분이기도 했지만, 내가 전자책 제작법을 비교적 쉽게 익힐 수 있었던 건 무려 20년 전인 2000년대 초반에 만난 선생님들 덕분이었다. 그때의 그 배움들이 지금 전자책을 만드는 데 쓰일 줄 누가 알았겠나.
전자책은 디지털상에서 구현되기 때문에 당연히 웹상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HTML과 CSS에 대한 이해만 있다면 빨리 배울 수 있다. 나는 HTML과 CSS를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초등학생 시절부터 자유자재로 태그를 사용해왔던 역사가 있다.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 때, 학교에 컴퓨터실이 새겼다. 아주 큰 모니터가 45도 기울어진 채로 유리판 아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여담이지만 그때 컴퓨터 선생님은 리눅스를 아주 좋아했다. 우리는 당연히 윈도우 운영체제를 배웠지만. 컴퓨터 수업시간에는 여러 가지를 배웠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홈페이지를 만들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모'를 사용해서 만들기도 하고, 그냥 메모장에 태그를 써서 만들기도 했다. HTML 태그 몇 가지만 외워두면 인터넷 익스플로러 화면에 내가 만든 홈페이지를 띄울 수 있었다.
하지만 내 HTML 선생님은 컴퓨터 선생님이 아닌 H.O.T. 팬덤과 장미가족의 태그교실이었다. 당시에 HTML 태그를 쓸 수 있고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다면 인터넷 공간에서 더 자유롭게 놀 수 있었다. 홈페이지 제작뿐 아니라 당시 다음 카페나, 엔티카 등의 게시판 글쓰기 창은 지금처럼 텍스트만 쓰면 깔끔하게 올라가는 형태가 아니었다. HTML 편집기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아서 엔터를 친다고 해서 절대 줄이 바뀌지 않았다. 마법의 태그인 <br>이 반드시 필요했고 이미지의 경우도 첨부파일로 올릴 수 있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내 블로그나 다른 곳에 이미지를 올려둔 뒤에 인터넷 주소를 복사해서 반드시 <img src="">를 통해 업로드해야 했다. 원하는 대로 글을 올리기 위해서는 태그를 잘 알아야 했다. 장미가족의 태그교실과 장미가족의 포토샵교실에서는 그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때로 따라하고 싶은 형식이 있으면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눌러 웹페이지의 전체 태그를 보고 원하는 태그를 추출하기도 했다.
가장 결정적인 실습현장은, 오래전 사라진 인포메일(infomail)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인포메일이 지금의 스티비의 모태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는데. 인포메일은 세상 모든 정보를 모아 발송하는 정보메일 플랫폼이었다. 개인이 메일링을 개설할 수 있었고, 메일링을 신청한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메일을 보낼 수 있었다. 당연히 연예인 관련 정보를 다루는 메일링이 인기가 많아서, 좋은 글을 다루는 내 인포메일은 인기가 별로 없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대중에게 인기 있는 걸 참 안 한다.) 인포메일은 지금의 스티비처럼 클릭만으로 원하는 편집을 할 수 있는 형태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HTML 태그를 사용했기 때문에, 배경음악을 넣고 싶거나 배경화면을 깔고 싶거나 글시가 자동으로 위로 올라가도록 하거나 반짝반짝하는 효과를 넣고 싶다면 모두 태그로 해야 했다.
그때 열심히 익히고 배웠던 기본 원리들은 지금도 내 머릿속 어딘가에 콕 박혀 있다. 학교 시험 때문에 외운 거였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을 리가 없다. 무엇이든 내가 좋아하는 활동과 연계될 때 가장 오래 기억에 남고, 오래오래 써먹을 수 있다. 몇 년 전부터 이런 기본 지식을 기반으로 CSS도 다른 코딩 언어도 배우려고 시도해 봤다. CSS의 경우, HTML 문서 안에서 사용할 수 있고 쉽게 말하면 이름을 부여해서 그 이름이 어떤 형식을 담고 있는지를 지정해 주는, 스타일의 느낌으로 이해하면 쉬울 것 같다. 배울 때면 재미는 있었지만 배울 이유가 명확하지 않으니 지속적으로 배우기는 어려웠다. 다른 언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언어들을 배우면서 어떤 원리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모두 그때 그 시절 HTML 선생님들 덕분이다. 잠시 이야기가 옆으로 샜지만 이 정도의 이해만 있다면 Kwanghee Lee 선생님의 강의를 따라가기 훨씬 쉬울 것 같고, 없더라도 설명해 주시니 괜찮다.
전자책을 만드는 데 걸린 기간은 총 3일. 밤을 새워서 만든 것도 아니니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선생님이 알려주신 대로 인디자인에서 출력한 스타일을 전자책 포맷에 맞도록 일괄 수정하는 방법이 가장 간단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시길 작업은 약간 '똑똑하게' 찾아 바꾸는 것이 핵심이었다. 하나씩 수정하고 태블릿으로 변경된 사항을 눈으로 확인할 때의 그 성취감이란. 일치된 타이틀 디자인, 적당한 본문의 디폴트 간격, 본문을 크게 방해하지 않는 각주 처리까지 하고 나니 출판사 직원에게 필요한 스킬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기분이었다.
전자책을 한 번 제작하고 나니, 마치 전자책 제작이 출판의 마무리 같은 기분도 든다. 나는 평소 종이책만큼이나 전자책도 선호한다. 내게 맞는 포맷으로 읽을 수 있어서 좋고, (너무 예쁘거나 불편한) 디자인에 홀리지 않고 내용에만 집중할 수 있고, 두꺼운 책도 가볍게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걸 좋아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아직까지는 출판사들이 종이책과 전자책 중 포맷을 선택하기보다는 종이책을 먼저 출간하고 전자책으로도 출간할지 선택한다. 하지만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계속 드는 생각은, 어떤 책은 전자책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싶다. kindle을 비롯해 출판사 없이도 전자책을 출판할 수 있는 플랫폼이 생겨나고 있고, 한국만 해도 전자책 구독서비스를 통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니까. 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책의 핵심이 내용 전달이라면 전자책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자책을 좀 더 선호하는 사람 중에는 자원을 활용해야 하는 종이책보다는 전자책이 기후위기에 덜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무와 잉크를 사용해야 하는 종이책과 전력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전자책 중 무엇이 기후위기에 더욱 악영향을 미치는가는 정확히 비교할 수 없다. 그러니 둘 중 어떤 포맷이 좋은지를 가지고 싸울 필요는 전혀 없다. 이전에는 전자책의 시대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생각해 보면 책을 읽는 인구가 줄어드는 마당에 전자책의 시대라는 것이 과연 도래할까. 종이책의 시대라도 잘 유지하면 다행인 게 아닐까.
힐데와소피도 웬만하면 종이책을 만들겠지만 기획에 따라 어떤 시리즈는 전자책으로만 만들려고 한다. 웹상에서 좋은 콘텐츠가 유랑할 수 있다면, 지금 시대에 그것만큼 기여하는 게 어디있을까. 하지만 <데이터, 민주주의를 조작하다>를 읽고 나면 좋은 데이터를 만든다고 해서 그것이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사람들에게 과연 닿기는 할지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홍보에 대한 고민으로 끝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람들에게 닿는 방법이 어려워도 우리는 계속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려고 한다. 그저 우리는 지금의 세대와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야 하는 이야기와 생각이 있으니 계속 책을 만들 뿐이다.
<힐데의 편집일기> 연재를 마칩니다. 길고 긴 호흡으로 이어오는 동안 함께 해주신 분들 모두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