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문제의 이면에 있는 것
친한 언니의 인스타 스토리에서 오찬호씨의 칼럼을 읽었다. 분명히 오늘은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 운동만 하고 게임을 하든 책을 읽든 놀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노트북을 꺼낼수밖에 없었다. 이 칼럼은 사회학자로서 멋지게 사회현상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어떤 현상을 보다 못해 토해내 버린 칼럼이다.
이 벽을 체험하고는 읽지도 않을 사람에게 책을 주는 일은 없었는데, 청소년용 도서가 나왔을 때 애들 친구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었다. 못마땅하게 여긴 부모가 이런 말을 면전에서 한 적이 있다. “솔직히 사회 관련 책을 읽을 필요가 있나요? 수능시험에 관련되니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그게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나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그때마다 마치 위산이 역류해서 식도까지 올라와 목구멍이 쓰라리는 기분이 든다.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문제'라고 여겨지는 다양한 상황들을 '돈 문제'라는 단어로 정리해 버린다. 실제로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어떤 문제에 대해 실컷 얘기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그래. 결국 돈이 문제지 돈이"로 마무리 짓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내뱉거나 그런 말을 들은 뒤에 마치 정화의식을 거치 듯 속으로 되뇌인다. '알잖아. 돈 문제가 전부는 아니라는 거.'
'돈 문제'라는 말은 익숙해도 '사회 문제'라는 말이 와닿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곧 사회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사회라는 것은 내 바깥에 저멀리 나와 상관없는 곳에 있다는 듯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는 사회 문제라는 말을 멀게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영감을 주는 책이 아니라면, 내가 모르는 사회문제에 관한 책이 아니라면 유난스럽게 사회 비판서를 찾아보지도 않는다. 나에게 사회란 내 행동과 생각이 영향을 미치는 나와 연결되어 있는 곳이며, 사회문제란 곧 내가 닿아있는 일상의 문제다. 간단히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나는 언젠가 남동생에 대한 가족들의 접근이 다르다는 것과 남학생과 여학생을 대하는 선생님의 태도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것이 우리 가족만의 문제였을까? 아니다. 이건 젠더문제다.
언젠가 친구들마다 사는 집의 모양과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것이 그 가족의 노력에 비례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다. 일종의 계급문제다.
우리 할아버지는 작은 요양원에서 10년 가까이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우리 가족이 불효한 것이었을까? 아니다. 일종의 노인문제다.
지방에 사는 사촌동생들의 무기력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저 그들이 무기력한 것일까? 아니다. 일종의 지방문제다.
오랜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 때 장애를 가진 친구를 우리가 어떻게 대했었는지 돌아보게 됐다. 어린 나이라면 누구나 그래도 되는 거였을까? 아니다. 이건 장애인에 대한 차별 문제다.
고등학교 때 성적이 좋지 않은 친구들은 학교에서 무시를 받았다. 무시하는 선생님만의 문제였을까? 아니다.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면 대우가 달라지는 사회문제다.
성적이 다른 30명의 학생을 한 교실에 몰아놓고 같은 수업을 받게 하고 등수를 매긴다. 공부를 안 하는 아이가 성적이 안 나오는 것은 당연한 걸까? 아니다. 이건 공교육문제다.
대학 시절 군대 간 선배가 적응이 너무 어렵다며 정기적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그 선배의 문제였을까? 아니다. 이건 징병제 문제다.
친구가 다니던 교회에서 성추행 사건이 일어났고 총회에서 이를 덮었다. 그 교회만의 문제였을까? 아니다. 이건 교회 내 성폭력 문제다.
후배들이 경력이 필요해서 인턴으로 입사하는데 자꾸 6개월만 일을 시킨다. 그 회사만의 문제일까? 아니다. 이건 노동문제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사회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문제라고 말한다. 왜 너가 겪는 문제를 너가 해결하지 않고 '남 탓, 사회 탓'을 하냐고 말한다. 그런가? 어쩌다가 일어나는 문제라면 정말 나만, 소수만 겪어야 하는 문제인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겪는다. 사회문제를 겪은 사람들이 사회에 다시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이 다시 사회문제가 되어 누군가가 다시 사회문제를 겪는다. 이것이 반복. 반복. 또 반복. 그렇게 사회문제는 강화루프에 들어가고 누구도 해결지점을 찾을 생각도 못한 채 굴러간다. 무수한 사회문제에 익숙해져 그것이 문제인지 모르는 채,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 무의미한 채 그렇게 움직인다.
물론 이럴 수도 있다. 나와 세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처럼 나와 세 다리 건너 있는 문제를 내 문제라고 인식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럴 경우는 '모르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듯 내가 알기 어려운 문제라고 말하면 안될까? 없는 문제라고 치부하지 말고. 그 사람에 대해 듣기만 해서 잘 모를 뿐이지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사회'라는 것도 '사회 문제'라는 것도 그렇다. 너무 커서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지언정 멀게 느껴질지언정 없는 문제, 무관한 문제가 아니다.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다 보면 그것들은 정말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내가 누군가에게서 사라져 버릴 거다.
‘경제적 자유인’이 되었다는, 되겠다는 사람들의 처방전을 봐라. 부동산, 주식, 가상통화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성공해서 베푼다는, 베풀 거라는 말의 비전을 봐라. 투자전략을 (비싼 금액에) 공유하겠다는 게 전부다. 이게 젊은 세대의 목표라는데, 그 끝이 궁금하다.
저렇게 사는 것이 너무 행복해 보인다고 혹은 부럽다고 말하던 기성 세대들의 중얼거림이 이제는 젊은 세대들의 외침이 되어버렸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는 결국 '돈 문제'라고 생각하며 그 이면에 숨겨진 다른 문제들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다른 존재를 인간답게 대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나를 인간답게 대해주는 다른 존재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버린 후에 그 끝에는 뭐가 있을지, 정말,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