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출신 총리 메르켈이 남긴 독일 통일 31주년 기념 연설
10월 3일, 독일 총리 메르켈은 통일 31주년 기념 연설을 했다. 총리로서의 마지막 연설이었다. 동독 출신인 메르켈은 동독 출신인 걸 드러내는 편은 아니었다. 그는 늘 자신의 출신보다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총리임을 강조했고, 동독 출신 사람보다는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포용과 지지를 이야기했다. 그랬던 이가 마지막 연설에서 자신의 출신을 강조하며 자신이 들어왔던 이야기, 그리고 동독 출신들이 감수해야 했던 것들을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그것도 감정을 드러내면서 말이다.
지난해 말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이 CDU의 역사를 다룬 여러 논문을 모아 발행한 책의 한 구절에서 저를 언급한 내용입니다. '동독 시절 35년 이력이라는 필요 없는 짐(Ballast)을 가지고 전환기(장벽 붕괴 후)에 CDU에 들어온 그녀는 당연히 서독에서 초기부터 사회화된 CDU의 특성을 가질 수 없었다.' 독재와 억압적 국가 체제하에서의 35년 개인적인 삶, 동독 이력이 '필요 없는 짐'이라고요? [1]
누군가는 동독 출신이라는, 자신과 유사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어떤 삶을 짊어지고 있는지 말한 그의 발언이 꽤나 늦었다고 하지만, 총리라는 역할을 오랜 기간 무겁게 수행한 뒤이기 때문에 보다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이 늦은 발언을 통해 통일된 지 31년이 지났음에도 사회적으로 여전히 두 종류의 독일인이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의 발언을 통해 아주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통일이라는 두 국가의 통합을 우리는 얼마나 쉽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다.
한국에서는 남북의 통일을 이야기하기 위해 독일 통일을 이야기한다. 대체로 이런 맥락이다. "독일을 보자! 물론 동독 출신들이 경험한 적응과 차별의 어려움, 그리고 서독 출신들이 감당해야 했던 경제적인 손해가 있었지만, 이를 극복했을 때 얻게 된 결과는 어마어마하다! 동독 출신들은 억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찾았으며, 독일은 과거 역사 문제와 분단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경제 강대국으로 우뚝 섰다! 그러니 우리도 독일 통일을 통해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분석해서 미리 준비하자! 통일 후 겪게 될 어려움을 최소화하고 통일을 기회로 삼아 강대국으로 나아가자!"
그런데 나는 메르켈의 연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배우고 준비한다고 과연 그 고통이 감소할까. 준비하면 된다, 노력하면 된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지만, 통일 이후 한 명의 개인이 겪어야 하는 일은 절대 간단하지 않다. 이건 단순히 이민 가듯, 다른 정치경제체제의 국가에서 사는 일이 아니다. 분단과 전쟁이라는 역사 속에 체제경쟁과 군비경쟁이 심화되었던 두 국가의 통일은, 한 국가에게는 일종의 '패배'를 의미한다. (한국이 북한의 정치경제체제를 어떤 의미에서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 패배의 이미지는 그 국가 출신들에게 덧씌워질 수밖에 없고, 그들은 승리한 국가의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동독 출신은 민주화 운동을 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총선을 거쳐 서독으로의 편입이 결정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일종의 각오를 해야 했다.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은 설렜을지 모르나 지금까지 자신과 가족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자신의 경력은 어떻게 보전받을 수 있을지 의문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메르켈이 말한 대로 동독 출신들은 날마다 소속과 정체성을 새로 증명해야 하는, 학습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은 메르켈이 동독에서 살아온 35년의 삶을 ballast라고 표현했다. 이 단어는 무게에 비해 가치가 적은 화물, 쓸모없고 불필요한 짐을 의미한다. 동독에서 경험했던 좋은 경험과 나쁜 경험들을 모두 쓸모없는 짐처럼 취급받았고, 자신들의 경력을 잃어버렸고, 학습받고 훈련되어야 하는 사람으로 남았다. 마치 지금 한국 사회에 사는 북한이탈주민처럼 말이다. 우리는 북한이탈주민을 보며 똑같이 생각한다. 북한에서 배우고 경험한 것들은 쓸모없는 것이니, 한국 사회를 얼른 배워서 적응해야 한다고. 맞는 말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북한에서의 삶 또한 그들의 것이고 그들이 판단할 일이다. 이런 인식이 한국 사회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면, 그들은 새로운 체제와 삶의 방식에 적응해 나가야 하는 당연한 숙제와 더불어, 자신들을 부정하는 인식을 극복해야 하는 부가적인 숙제까지 받게 된다.
누군가는 '체제가 바뀌었으니 당연하지! 대신에 자유를 찾았잖아? 큰 그림을 봐야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인간은 자신의 환경이 바뀌는 것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금 기후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체제를 바꿀 생각은, 불편함을 감수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지구가 덜 위험해질 수 있다는 큰 그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자리를 잃어버릴 수도 있고, 세금을 많이 내야 할 수도 있고, 전기를 덜 써야 할 수도 있고, 권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복잡한 생각에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한다. 멸망을 향해가고 있어도 우리는 당장의 안온함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서독/동독 출신이라는 구분은 70-80년이 지나 동독에서 태어났던 사람들이 모두 사망하면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해결'된 게 아니라, 그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이 사라졌을 뿐이다. 일제강점기에 고통을 겪었던 분들 중 살아계신 분들이 점점 줄어들지만 우리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됐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경험은 어떤 형태로든 사회 속에 남아 있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서 어려움과 고통을 겪었던 과거의 이들에 대해서는 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이들을 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미래에 비슷한 어려움과 고통을 겪을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까지 잊어버린다.
대체 우리가 무슨 준비를 하면 우리와 그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경감시킬 수 있는 것일까. 만일 방법이 있다고 해도 그걸 준비할 수 있는 여력과 의지는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또 한 가지, 메르켈의 연설에서 통일은 기회가 아니라 책임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점은 통일을 기회라고 부르짖는 우리에게 성찰할 지점을 던져 준다. 메르켈은 통일이 자신들에게 전반적으로 더 많은 책임을 부여했다고 말한다. 통일은 자신들의 노력만이 아닌 공동의 노력으로 냉전을 극복한 배경, 그리고 다른 국가들의 신뢰와 지원, 헌신으로 이룰 수 있었다. 유럽과 독일은 냉전에서 벗어났지만 세계는 여전히 전쟁과 재난의 위험 속에 있고 국제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일이 있다. 메르켈은 통일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면 독일의 안보뿐만 아니라 이웃 지역의 안정에 대한 책임이 자신들에게도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독일이 이루어낸 모든 것은 일부의 노력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타인에 대한 책임감을 느낌으로써 공동선을 실천하고, 자유를 위해 일어섰던 동독 사람들이 자신의 삶으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결과라고 말한다.
우리나라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미래가 얼마나 정확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답이 우리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 우리가 서로의 말을 경청하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 차이점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통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방금 본 단편 영화에서 한 여성이 아주 훌륭하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문을 열고 그들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십시오." 이것이 독일 통일 31년의 교훈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생애와 경험,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존중이 필요합니다. [2]
우리는 통일이 기회라고만 가르친다. 우리가 강대국이 될 기회, 경제가 성장할 기회, 정체되어있는 한국 시장과 교통이 확대될 기회. 아니다. 통일은 남과 북 두 국가에게, 한반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국제사회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다. 이렇게 막중한 일을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 우리는 미래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에 대해 신중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지금처럼 종전선언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70년 넘게 이어져 온 군비경쟁을 심화시키는 현실에서는 그 책임을 어떻게 질 수 있을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통일이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통일을 말하는 사람들조차 그 책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통일은 그저 기회가 아닌, 책임이 따라오는 일이다.
[1] 이유진, "왜 이제야?" "눈물 난다"... 메르켈 연설에 놀란 독일, <오마이뉴스>, 21.10.19;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780728&SRS_CD=0000012215&fbclid=IwAR2M-EeTpMjLRbQa5Ki90Wr2c74I7AV_-9C-Qn9VIQ21SAFjS1k7AuH0iWU
[2] 구글 번역기의 힘을 빌려 번역해 보았다. 메르켈 연설 전문, 독일 연방공화국 홈페이지; https://www.bundesregierung.de/breg-de/suche/rede-von-bundeskanzlerin-merkel-anlaesslich-des-festakts-zum-tag-der-deutschen-einheit-am-3-oktober-2021-in-halle-saale-1964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