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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Apr 21. 2019

러시아의 조선인 공산주의자

책 『조선공산당평전』

1990년 동서독이 통일되고 이듬해 소련이 해체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대결에서 후자가 이겼다며 '역사의 종말'을 선언한다. 냉전체제가 끝났다. 하지만 한반도의 북한은 붕괴하지 않았다. 이 땅에 공산주의는 '적의 사상'으로 여전히 남았다.


그럼에도 시대는 바뀌었다. 냉전 시대에는 메카시즘으로 공산주의자를 배격했던 미국에서, 오늘날 떠오르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은 과감히 사회주의를 외친다. 미국 사회는 다양한 정치사상의 역동성을 품은, 냉전 이후의 사회로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사회주의'란 단어에 주춤한다. 그 사상이 가지는 논리 때문이 아니다. 남과 북의 경쟁으로 생긴 트라우마 때문에, 혹은 그 경쟁의 기억과 공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대경합의 시대에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마르크스의 이론과 레닌의 혁명은 그들을 추종한 공산주의 세계를 행복하게 만드는 대신에 반대편의 자본주의 세계를 더 인간답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었다.
(조선희, 『세 여자』 2권, 371-2쪽)



시대는 이제 '공산주의'를 이야기해도, 그 과거를 기억해도 위험하지 않다. 공산주의가 우리 사회에 남긴 긍정적 변화를 무조건 무시하고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일도 그만둬도 괜찮다. 이전 사회가 흑백논리의 양립불가의 선택이었다면, 오늘날 민주화 사회는 시대와 상황에 맞는 전략과 내용을 취사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다 유연해질 수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가 우리 사회에 남긴 변화를 보다 자세히, 그리고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시대에 산다.


'공산주의'를 다시 보기 위하여 읽은 책은 '조선공산당평전'이다. 학술서보다는 인문교양서다. 역사적 순서에 따라 충실히 적힌 책은 아니지만,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평가는 몰입감 있는 독서를 돕는다. 책은 조선공산당의 배경과 끝을 한 권에 담았다. 책 속에서 체 게바라와 레닌처럼 이상주의자였으면서 현실주의자였던 매력적인 혁명가들을 발견했다. 시대가 낳을 수 있었던 역사의 자식들이다.



최재형, 연해주 독립운동 활동의 대부


최재형은 러시아 사람이다. 러시아 이름은 표트르 세메노비치. 1870년 즈음 함경도 일대에는 이례적인 가뭄과 대흉년이 닥쳤다. 이때 러시아로 넘어간 한인이 수천 명을 넘었다. 최재형은 그 한인 중 한 명이었다.


최재형의 흥미로운 이력 중 하나는 러시아 원양 상선의 선원으로 떠났던 '세계여행'이다. 그는 약 7년 간 러시아 전역과 아프리카, 유럽 등을 항해하며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교양을 쌓았다. 이후 러시아로 귀화한 최재형은 자신의 러시아어 능력과 무역업을 바탕으로 사업을 성공적으로 키워냈다. 한인자치구 책임자로 선출되었고, 1986년에는 러시아 황제 니콜리아 2세에 대관식에 초청되는 등 러시아 한인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최재형은 러시아인으로서 충분히 잘 살 수 있었음에도 조선을 잊지 않았다. 그는 그가 획득한 재산과 명망을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한 지원으로 쓰는 데 아끼지 않았다. 1908년 연해주 지역의 최초의 무장조직이라 할 수 있는 동의회가 결성되었다. 이제껏 한인들 교육에 힘쓰며 학교를 세웠던 최재형은 이 조직에도 상당한 후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의회 군대는 조선 땅에 일본군을 공격하는 등의 성과도 올렸다. 일본이 러시아를 압력활동을 중단하였으나 최재형의 항일 투쟁 지원은 계속되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배후에도 최재형이 있었다. 최재형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국민회 기관지인 '대동공보'란 신문을 인수다. '대동공보'는 러시아 교민사회뿐 아니라 미국 교민사회와 국내까지 보내질 정도의 영향력을 지닌 신문이었다. 안중근은 이 신문에 이따금 기고하였으며, 후에 이 신문사 건물에서 이토 히로부미 거사를 기획하였다. 안중근이 사용한 권총은 최재형이 건넸다고 전해진다.


연해주는 무장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이동휘, 이상설, 신채호, 홍범도와 같은 사람들이 한일병탄 이후 연해주에서 활동한다. 특히 최재형은 '권업회'의 회장을 맡으며 독립운동의 재정적 지원과 후원을 계속했다. 권업회는 광복군 간부 양성을 위해 최초의 사관학교 대전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어 1914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주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일병탄과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일본의 영향력은 한반도를 넘어 만주와 연해주까지 서서히 확장됐다. 러시아의 정과 볼셰비키 사이의 내전에 일본은 시베리아 내 볼셰비키 소탕을 핑계로 본격적으로 군사 행동을 벌인다.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조선의 독립을 꾀하며 공산주의자의 길을 걸었던 최재형은 1920년 우수리스크에서 일본군에게 죽음을 맞았다. (4월 참변 링크)



최초의 조선인 볼셰비키, 김 알렉산드리아


김알렉산드리아는 1885년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며 활동한 통역가이자 번역가였다. 덕분에 김알렉산드리아는 러시아 정규학교에서 수학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그는 아버지 친구인 스탄케비치의 지원을 받는다. 이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범대학을 나왔으며, 대학에서 인기가 높던 사회주의 좌파사상에 영향을 받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사로 일하기도 했던 그는 엘리트 한인이었다.



아버지 친구 아들과 결혼했던 그는,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자의 길을 위해 우랄산맥으로 향한다. 시베리아 곳곳의 벌목장은 한인들에게 쉽게 얻을 수 있는 일자리였다. 그는 벌목장에서 한인과 러시아인 사이를 통역하며 오성묵 등과 함께 우랄노동자동맹을 조직하는데 참여한다. 그리고 그는 1916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한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나누어 지기 전의 정당이다. 거기서 그는 레닌을 만났으며 레닌과 협력하는 사이로 발전했다고 전해진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가 러시아 정권을 잡자 그는 하바롭스크의 소비에트 외무위원으로 임명된다. 그는 독일 간첩으로 누명을 받았던 이동휘를 구제하고, 이동휘·김립과 함께 1918년 한인사회당을 결성한다. 러시아 혁명 직후인 당시는 아직도 구체제를 옹호하는 세력이 다수 남아있었다. 한인들 내에서도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것보다 기존의 제정 러시아를 우호하는 이들이 있었다. 김알렉산드리아는 이동휘, 김립과 한인사회당을 조직하면서 한인사회와 연해주 지역 내에 볼셰비키 지지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제대로 된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김 알렉산드리아는 하바롭스크 아무르강에서 콜차크 장군이 이끄는 반혁명군에게 붙잡힌다. 그조선 8도를 상징하는 8걸음을 걸은 후 죽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한다. 그의 짧았만 강렬했던 일생은 이후 한인 공산주의자들,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1920년 상해에서 발행되었던 독립신문에서는 그에 대하여 '혁명사상으론 대한여자의 향도관(안내자), 사회주의로는 대한여자의 선봉장, 자유정신으론 대한여자의 고문관(顧問官), 해방투쟁으론 대한여자의 사표자(대표자)'라 칭송했다.



볼셰비키의 정통이 되고자 했던 이르쿠츠크의 한인들


3·1 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이동휘는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한다. 그즈음 이르쿠츠크에서는 전로한인공산당(All-Russian Korean Communisty Party)이 김철훈과 오하묵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이 조직은 주로 러시아 국적의 한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이동휘로 대표되는 한인사회당과는 달리, 조선의 독립보다는 국제적인 사회주의 활동과 소비에트 혁명정부 건설에 더 방점을 두었다. 1921년 5월 이동휘는 한인사회당에서 고려공산당으로 개명하는데, 이를 견제하기 위해 전로한인공산당 또 하나의 고려공산당을 이르쿠츠크에서 결성한다. '고려공산당'이란 같은 간판을 내걸었으나 구성원과 노선의 차이가 명확했던 두 세력은, 소련의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경쟁을 벌였고, 대립은 결국 자유시에서 유혈사건으로 확대된다.


1920년 최재형이 사망한 일본의 4월 참변 사태처럼, 일본군의 적군에 대한 공격은 거세어져 갔다. 연해주 지역 내 한인 독립군들은 블라디보스토크 북쪽에 위치한 자유시로 일단 후퇴하여 전열 가다듬기로 했다. 그러나 그곳에 모두 모이자 상해파로 분류되는 박일리아가 이끄는 사할린부대와 이르쿠츠크파로 분류되는 오하묵이 이끄는 자유보병대대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초반 우세를 점했던 박일리아는 자유보병대대를 무력으로 해제시켜버렸다. 이에 오하묵은 이르쿠츠크에 위치했던 국제공산당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로 가서 상황을 반전시킨다. 이르쿠츠크파와 가까웠던 동양비서부의 선택으로 박일리아를 지원한 극동공화국(러시아공산당이 극동문제 해결을 위해 임시로 세운 정부) 상부 세력은 모두 교체되었고, 이어 역으로 그의 군대에 해제를 요구했다. 박일리아는 그 명령을 반대했고, 결국 무력전투가 일어나고야 다. (자유시 참변 링크)


러시아 아무르주 스보보드니 시 남서쪽 소벳스키 마을 입구에 1921년 발생한 자유시 사건 표지석 설치. 독립군간 다툼으로 인한 비극이었으며,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 이라는 글자를 표지석에 넣었다. 출처 링크


두 세력의 갈등이 유혈사태로까지 번지자 러시아공산당에게도 문제로 떠올랐다. 코민테른은 이후 '한국위원회'로 두 세력이 알력 외에는 크게 노선적 차이가 없다며, 두 세력의 존재를 둘 다 인정다. 이어 한국위원화의 자유시 참변의 조사는 상해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후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서는 이르쿠츠크파의 우세였다.


엎치락 뒤치락을 반복하던 두 세력은 1922년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통합당대회에서도 합의에 이르지 못다. 결국 코민테른은 두 정당의 해산을 령한다. 그리고 조선 국내에 공산당을 조직할 것(이후 조선공산당)을 주하며, 블라디보스토크에 고려공산당 중앙총국을 설치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상해파가 탈퇴하면서 와해하게 된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글. 김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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