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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May 07. 2019

1920년대 조선의 공산주의자

책 『조선공산당평전』 (2)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사슬 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공산당선언』 중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의 마지막 구절에서 자기나라의 노동자와 시민이 아닌 만국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전 세계 혁명을 외쳤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만든 계급적 불평등은 국경에 의해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운동사는 바로 이 '국경 없는' 운동 전략으로 매력을 더한다. 그들은 '국제적인 연대'를 외치며 다른 나라의 정세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움직였다. 아르헨티나 출신이었던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을 일으켰고, 조선인 김산은 중국에서 공산 혁명을 꿈꿨다. 전화나 우편도 원활하지 않았던 시기에 전 세계의 공산주의자들이 지구 반대편 혹은 수백 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에 중앙을 두고, 그 곳에서 내려진 결정에 따르며 하부조직을 운영했다. 


세계화가 이루어진 오늘 날에도 이런 강한 소속감과 유대감을 가지는 조직활동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국제적 사회주의 운동은 러시아 공산당이 1919년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을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코민테른의 목표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무장군대를 포함하여 세계의 부르주아의 타도와 완전한 국가 철폐의 과도기적인 단계로서의 세계 소비에트 공화국을 창립을 위해" 싸우는 것이었다. 


코민테른은 다양한 환경과 지역에 벌어지는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제한된 지식과 교조적인 정책으로 항상 모든좋은 결과를 담보하진 못했다.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의 경우,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직의 정당성을 얻기 위한 상해파와 이르츠쿠츠파의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코민테른은 한 나라에는 하나의 공산당만 공식적으로 활동한다는 원칙(일국일당원칙)에 따라, '조선반도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주요무대를 국내로 옮기라 주문했다. '조선공산당'을 만들기 위한 대표는 이르쿠츠크파의 김재봉이 선택되었다. 그러나 이미 국내에도 공산주의 계열 조직이 결성되어 활동 중이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와 대립처럼, 국내파와 해외파 공산주의자들의 대립도 피할 수 없었다.




김사국과 서울파


김사국은 1892년 태어났다. 그의 행적은 몇몇은 알려졌으나 동기는 명확하지 않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한학을 배우기도 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피혁회사에서 일하며 조선인유학생들과 어울리며 대한흥학회 가담하기도 했다. 이어 서울에서 교사로 일하기도 했으며, 만주로 넘어가 중국어를 배우고 농업견습하기도 했다. 가늠할 수 없는 삶의 궤적처럼 그는 어디서나 비범했다.


김사국은 한성임시정부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한성임시정부는 국내에서, 13도의 국민대표가 모인 '국민대회'라는 절차를 통해 수립되었다.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형태를 취했다는 점에서 다른 임시정부보다 의미가 컸다. 그리하여 상해임시정부와 러시아의 대한국민회의 등을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명목상으로도 통합하는 정통성을 가질 수 있었다. 한성임시정부 수립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었던 김사국은 출옥 후에 조선노동대회에 간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1921년 1월 서울청년회를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사회주의자 길을 걸었다.



국내에는 김사국의 서울청년회, 이른바 서울파 외에도 김재봉 그룹(화요회),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는 북풍회, 상해파 등이 있었다. 이 중 서울파는 자신들 외에 모두가 똑같은 '해외파'이고 국내에서 일제와 민족주의자들을 상대로 교두보를 마련한 자신들이 국내 공산당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봤다. 서울파는 해외 파벌을 견제하기 위하여 고려공산동맹을 결성하고, 북풍회의 전국 순회강연회 뒷풀이에 곤봉을 들고 폭력을 감행하는 일을 벌이기도 했다(낙양관 사건). 또한 김사국은 자신들이 조직이 코민테른에 직접 승인을 받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일련의 작업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1924년 국내로 돌아 온 김사국은 모든 사회주의세력을 망라한 13인회를 통해 통일 조선공산당을 건설하기 위한 회합에 개최한다. 그러나 김사국은 김재봉 그룹에게 이르추르크파와의 결별을 선언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내거는 등 해외파가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해, 단일 공산당 합의는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서울파는 참여하지 않고 김재봉 그룹, 북풍회, 상해파를 중심으로 한 제1차 조선공산당이 설립된다.



조선공산당은 출발부터 허약했다. 국내에 가장 큰 조직 기반을 가지고 있는 서울파와 통일당을 건설하지 못한 탓이 컸다. 서울파의 북극성인 김사국이 고려총국 국내부, 곧 화요회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사국은 국내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지 않은 사회주의 조직들을 경멸했다.  -『조선공산당평전』, 283쪽


1926년 김사국은 폐결핵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40여 단체가 연합한 사회단체 연합장으로 치뤄졌으며,  천 여명의 군중이 참석했다고 한다. 김사국의 사망 이후 서울파와 해와파의 알력 싸움은 흐지부지해졌다. 제1차 조선공산당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의주에서 어처구니없이 조직이 발각되는 일이 벌어져 붕괴했다.


참고: 해광 김사국의 삶과 민족해방운동, 전명석, 2002





조선공산당이 주도했던 6.10만세운동


100년 전 1919년, 3.1운동은 고종의 장례식을 기점으로 하여 폭발된 전국적인 차원의 민중 항일운동이었다. 7년 뒤 순종의 임종이 가까워 오자 민족운동가들은 3.1운동이 그랫듯 다시 한번의 전국적인 항일운동을 기획했다. 여기에 김재봉의 지명을 받았던 제2차 조선공산당의 강달영과 고려공산청년회 권오설, 김단야 등이 지도부로 참여하고, 천도교는 격문 인쇄와 지방 연락을 맡았다.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경성부에 7천여명의 군대를 집결시키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번 거사도 준비 단계에서 일제에 발각되고 말았다. 위조지폐범을 쫓던 경찰이 사회주의자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격문을 발견한 것이다. 사건을 추적하던 일제는 6.10만세운동의 주요 기획자였던 권오설을 찾았고, 운동을 3일 앞둔 6월 7일 그를 체포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걸로 보이는 권오설의 사진. 왼쪽 눈 부분에 얼룩졌다.


사실상 이번 만세운동의 리더격이었던 권오설이 체포되었지만, 거사 기획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만세운동을 그대로 실행하였다.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 날 2만 4천여명의 학생들이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하였고, 순종의 상여가 종로3가 단성사를 지날때는 중앙고보 학생 3백여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뿌렸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에 지역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참여하였다. 이 사건으로 서울에서는 210여명이, 전국적으로 1천여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붙잡혔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만큼의 파급력을 얻지 못하였으나, 학생들이 운동의 주체로 나선 최초의 운동이 됐다. 이 운동의 배경에는 사회주의 세력이 전국적으로 진행해 온 각종 연구회와 강연회 등 사업이 영향을 주었다.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를 이끈 권오설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지원하며 6.10만세운동을 함께 기획했다.




일본에서 온 공산주의자들


일본은 상해와 연해주에 버금가는 주요한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지었다. 재일한국인수는 1913년 3천 6백여명에서 1918년에는 2만 2천여명, 1937년에는 73만명에 이르도록 매년 급증하였다. 재일한국인은 일본에서 하층계급에 속하여, 일용직 생활에 취업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빈궁한 재일한인사회에서 다양한 급진사상이 주목받고 유행했다. 


1921년 겨울 도쿄에서 조선고학생동우회 회원이던 김약수, 박열, 김찬, 정태성을 중심으로 흑도회가 창립됐다. 이후 아나키즘 경향을 가진 박열이 이탈했고, 1922년 김약수, 송봉우를 중심으로 북성회를 창립했다. 북성회는 1923년 국내로 돌아와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전국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이 강연회 뒷풀이 자리에 앞절의 설명처럼 서울파의 난입 사건도 있었다. 1924년 김약수는 북성회의 국내지부 북풍회를 창립하며 국내에 남았지만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구금되었다. 일본에 남았던 회원 안광천, 박낙종, 하필원을 중심으로 일본의 북성회를 해산하고 일월회를 결성했다.


6.10만세운동 사건으로 권오설에 이어 강달영이 연달아 체포되자 제2차 조선공산당은 와해되었다. 이들이 떠나간 빈자리에 상해파이자 제3차 조선공산당 재건을 자임한 김철수가 일월회의 안광천과 손을 잡고자 했다. 안광천은 북풍회를 이끈 김약수와 달리 화요회와 서울파의 통합과 민족주의자와 같이 전선을 구축을 주장한 이른바 '통합론자'였다.


안광천은 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회 등이 연합한 사상운동단체인 '정우회'에 상임집행위원으로 일하며, 민족주의자와의 통일노선을 주장하는 '정우회선언'을 발표한다. 이는 조선공산당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자들들이 비타협 민족주의자들과 '신간회'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문에 게재된 정우회 선언


신간회는 1927년에 설립되어 한국의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로 활동하였고, 회원 규모가 4만에 이르기까지 확대되는 대중의 지지도 받았다. 그러나 점차 타협적인 노선으로 기우는 신간회 지도부에 대한 불만, 민족주의자와의 통일노선에 대한 회의론이 불거지면서 1931년 해체되었다. 김철수와 안광천으로 대표되는 제3차 조선공산당 역시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와해되고 말았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최백순,『조선공산당평전』, 서해문집

스칼라피노·이공식,『한국공산주의운동사』, 돌베개 


글. 김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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