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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Jun 10. 2019

해방 전 조선의 공산주의자

소설 『경성 트로이카』

국내에 공산당을 만들기위한 시도는 실패를 거듭했다. 일제강점기 삼엄한 경계와 감시는 조선 내에서 '공산주의자'로 활동한다는 것을 불가능에 가깝게 만들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은 3.1운동과 같은 전국적 운동의 계기를 만나지도 만들지도 못했다. 사회주의나 독립운동세력은 한반도 너머 무장투쟁 근거지를 마련하였으나, 이는 다양한 세력으로 산재되어 있는 형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기획했던 산발적이던 국내 파업 작업은 역전의 계기가 만들긴 역부족이었다.



대한민국은 국토가 좁고 인구가 도시에 밀집해 있다. 역사적·문화적·인종적 균질성이 매우 높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겨울이 너무 추워서 난방시설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정글도 넓은 산악지역도 없다. 북쪽은 철책으로 단절되었고 나머지는 바다로 가로막힌 사실상의 섬나라다. 중국과 베트남, 중남미와 달리 특정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항전을 벌일 수 없다. 중동 국가들처럼 인접국가에 무장투쟁 기지를 만들 수도 없다. 게다가 국가는 엄청난 규모의 상비군과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연속적·동시다발적·전국적 도시봉기'뿐이다.  -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14 55년의 기록』


1924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국제적 공산주의 운동의 양상도 변화했다. 스탈린은 국제적인 연대보다는 소련 중심의 일국사회주의 완성에 더 방점을 두었다. 1929년에는 세계가 공산화되어야 영구적인 혁명이 가능다고 주장한, 그의 정치적 숙적인 트로츠키를 국외로 추방시킨다. 이후 1943년 코민테른은 해체된다. 국제적 공산주의 운동의 종말이었다.


'경성 트로이카'라 불리었던 이재유, 김삼룡, 이현상은 가장 힘들었던 이 시기에 가장 치열한 투쟁을 벌였던 이상주의자들이었다. 『경성 트로이카』는 그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국내 공산주의 운동의 새로운 구심점



‘경성 트로이카’라는 자유롭고, 상하가 없는 위원회 방식의 민주적인 조직을 만들었다. ‘트로이카’는, 말 세 마리가 동등한 힘으로 마차를 끄는 러시아 특유의 삼두마차를 뜻한다.


경성트로이카의 활동은 한국 좌익활동의 원형이었다. 초기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6·10 만세운동이나 신간회 활동은 민족주의자와 협력한 공동의 활동었다. 그러나 12월테제로 인한 공산주의 운동 방향의 전환은 신간회의 해체와 민족주의와의 결별로 이어졌다. 이런 토양에서 활동을 시작한 경성트로이카는 '노동자 농민이 참여하는 대중조직'을 지향하며 비밀리에 조직활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는 이후 70,80년대 대학을 나온 이들이 공장으로 가 노동자들과 만나 운동했던 '위장취업'을 그대로 연상케 한다.


경성트로이카의 리더격인 이재유는 앞서 서울파의 리더였던 김사국과 여러 면에서 닮았다. 김사국은  국내 임시정부인 '한성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해 정치, 종교를 아우르는 전방위적인 접촉과 기민한 활동력을 보여줬었다. 이러한 활동폭과 범상치 않은 기재는 경성트로이카의 리더인 이재유에게도 그대로 나타났다. 특히 이재유는 구치소와 서대문형무소를 4번이나 탈옥(!)하면서 일제의 감시망을 벗어난 전설과 같은 인물이었다. 1936년 이재유가 경찰에 마지막으로 붙잡혔을 당시, 일제는 드디어 공산주의 운동의 뿌리를 뽑을 수 있게 되었다고 호외를 뿌리며 대서특필을 할 정도였다.


이재유의 체포를 알린 경성일보(1936)


또한 두 사람 모두 '국내'에서의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해외파의 알력이 거셌던 김사국의 시절에도, 해외파가 거의 소멸해버린 이재유의 시절에도, 두 사람을 국내에 남아 작지만 꾸준한 활동의 구심점으로 남았다. '조선의 공산주의 지도자'로 칭해졌던 박헌영 역시, 이재유와 함께 활동했던 이들이 만든 '경성콤그룹'에 동참했다. 그러나 김사국이 조선공산당에 끝까지 참여하지 못하고 명을 달리한 것처럼, 이재유 역시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 감옥에서 사망했다. 아쉬운 결말이었다.




동덕여고의 '세 여자'


(왼쪽부터) 동덕여고 동창생인 이순금, 이효정, 박진홍 ⓒ사회평론


경성트로이카는 저자 안재성씨가 '이효정' 여사를 만나는 일화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치 소설 『세 여자』 의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를 연상케하는 동덕여고 동문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은 동맹휴학으로 시작해 사회주의 운동가로 성장한 인물들다. 경성트로이카를 이룬 용맹했던 세명의 남자도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그들만큼이나 혁명에 일생을 바쳤던 세 명의 여자의 이야기도 강렬했다.


박진홍은 동덕여고에서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퇴학을 당한 뒤, 곧바로 공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할 만큼 열성적이었다. 이효정은 이재유가 경성트로이카를 비밀리에 운영하는데 중요한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이순금은 이재유가 감옥에 있을 때, 자신의 오빠 이관술과 함께 경성트로이카를 잇는 '경성콤그룹' 재건에 힘썼다. 세 사람 모두 이재유와 동지적 관계를 맺으며 경성 트로이카와 그 이후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해나갔다.




실패한 사람들


이재유의 검거, 경성콤그룹의 붕괴로 1930년 후반과 1940년대 시도되었던 국내 공산주의 운동은 자취를 감춘다. 광주에 숨어지내던 박헌영은 해방 이후에서야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창당을 선언하며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남한에는 미국이, 북한에는 소련이 들어오게 되면서 남한에서 활동하였던 국내 공산주의 세력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거나, 선택 당해야만 했다. 그들은 해방 이전 유일무이하게 국내에서 사회주의운동이 이어나간 세력이었으나 해방 이후 한반도의 정치세력화에 결국 실패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던 이유는, 내가 있는 곳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것을 못말리도록 추구한 그 '열정'에 있었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남의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닌, 내가 사는 이 곳에서 무언가를 시도했던 이들. 훗날 체 게바라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 했던 말이 어울리는 사람들이었다.


혁명가를 자처했던 이들은 '과거'보다도 '미래'를 위해 살았다. 주어진 세계보다도 만들어 갈 세계를 바라보았다. 오늘날 그들이 외쳤던 이상에는 현실이 된 것도 많다.(하루 8시간 근로제, 남녀 동등임금 및 작업조건 등) 그들은 실패한 혁명가였지만, 그 '이상'이 실패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글. 김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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