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개혁 왜 필요한가.
법치주의란 합리적이며 평등한 법을 기준으로 사회를 다스리는 국가원리로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의 정치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법은 성문화 된 규칙일 뿐, 그 자체로 판단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법치주의가 공정하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법을 기준으로 상대를 기소하고, 변호하며 판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들의 판결에 힘을 실어주어야 하기에, 불가피하게 법조인들에게는 특정 권력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법조계는 시민들의 일상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권력 집단인 셈이지만, 시민들이 선출하지는 않는다.
특히 한국에서 검찰 혹은 법원이라고 말하면 범접할 수 없는 그들만의 권력을 갖고 있는 집단이라고 인식된다. 그렇다면 그 권력 집단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됐을까. 김두식 교수가 전작인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법조계가 어떻게 자신들만의 관계를 구축하며 엘리트집단으로 섰는가를 분석했다면. <법률가들>에서는 법조계의 기반과 뿌리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일제시대부터 해방 이후까지, 법조인들이 어떻게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고 권력을 유지해왔는지 분석한 이 책은 르포에 가깝다.
법조계의 뿌리를 추적하다 보면, 일제시대에서 정부 수립으로 넘어오는 1945년-1948년의 시기의 판검사 임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 때 법조인들이 어떻게 해방 후에도 그대로 기용됐는지, 그리고 부족한 수를 메우기 위해 나머지 인원을 어떻게 충당했는지를 1편에서 다루고자 한다. 아래 글을 읽기 전에 먼저 네 개의 법률가군을 기억하도록 하자. 아래에서 차차 설명하도록 하겠다.
제1법률가군: 일제시대 고등시험 사법과를 통과한 판검사
제2법률가군: 일제시대 조선변호사시험을 통과한 변호사
제3법률가군: 일제시대 법원의 서기 겸 통역사
제4법률가군: 일제시대 마지막 조선변호사시험 응시자(이법회)
한반도 최초의 법률가들을 추적하는 이 책을 읽다보면, 성경의 창세기를 읽는 기분이다. 누구의 아들, 그 아들이 누구와 결혼했고, 결혼한 이의 아버지는 누구이며, 사실 아버지들은 학교 동기이자, 시험 동기이며, 해방 후 어떤 위치를 갖게 되고, 그 아들의 아들은 후에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고... 굉장히 복잡한 가계도를 읽는 기분이다. 이들은 이미 일제시대부터 가족이고 이웃이며 사돈이고 동창의 관계이다. 일제시대부터 재력과 권력을 가진 이들만이 판검사 혹은 변호사를 뽑는 시험에 접근이 가능했다.
1937년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자들이 보여주는 해방 이전의 삶은 큰 차이가 없다. 부모의 직업은 면장, 변호사, 부농, 손꼽히는 친일파 등이어서 대부분 여유 있는 집안 출신들이다. (...) 학교 서열은 막연한 심리적 차별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차등을 가져왔다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자들은 그 정점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렸다. 물론 각자 나름의 고민은 있었다. 가족 중에 독립운동가가 있거나, 청년기에 사회주의로 경도되었던 사람도 여럿이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몸을 던져 본격적인 운동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잠시 급진적인 사상의 언저리를 맴돌던 이들도 예외 없이 미래가 보장된 길로 돌아왔다. 모든 걸 가진 사람들의 개인적 한계이자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식민지 조선사회의 주류세력이 가졌던 시대적 한계였다. 1945년 벼락처럼 해방이 찾아왔고 이들은 법조계의 중심을 이루는 첫 번째 인재군을 형성했다. 이들을 뛰어넘어 법조계를 움직일 세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pp. 102-103)*
당시 변호사는 '조선변호사시험'을 통해 판검사는 '고등시험 사법과'를 통해 선출했다. '고등시험 사법과'의 경우 시험을 보기 위해서도 자격이 필요했다. 일제시대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일본의 중학교 졸업 정도의 자격만 지닐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으로 유학을 가거나, 제국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고서는 해당 시험에 도전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고등시험 사법과를 졸업한다고 해서 바로 판검사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고 일제의 권력에 적극성을 보이는 이들에게만 사법관 시보로 임용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이후에 판사 혹은 검사로 임명되었다. 사법관 시보로 임용되지 못했거나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이들에게는 변호사 자격이 주어졌다. 그리고 합격한 이들 마저도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으며, 몇 안 되는 조선인들은 여유 있는 집안 출신이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허헌 변호사의 경우도 배경이 갖춰져 있었다. 허헌은 1908년 광무변호사법에 의거한 제1회 대한제국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대한제국이 직접 근대 법 체계를 갖춰가는 과정에 변호사가 되었다. 보성전문학교를 세운 이용익의 집에 맡겨져 1907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로 유학을 간다. 이를 통해 변호사 자격을 갖추고 1908년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이렇듯 허헌 또한 학업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배경이 있었다는 건 굳이 감출 일은 아니다.
크게는 두 가지 시험을 통해 그리고 다양한 경로로 일제시대 판사와 검사 및 변호사를 지낸 이들은 독립 이후에도 그 자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김두식은 책에서 '고등시험 사법과'를 통과한 이들을 제1법률가군, '조선변호사시험' 등을 통해 변호사 자격을 갖췄던 이들을 제2법률가군이라 칭한다.
일제가 패전하고 미군정이 한반도 이남에 들어오면서 치안 유지와 국가의 기능을 정상화하기 위해 많은 수의 판검사와 변호사가 필요해졌다. 패전 이후 일본인 법률가들은 대부분 일본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판검사는 고위직이었기에 한국에 남아있는 법조인들 또한 대부분 친일경력을 갖추고 있었다.
판검사가 되려면 단순한 법률지식뿐만 아니라 일제통치에 대한 충성심도 보여줘야 했다. 그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의 삶이 해방 이후 다양하게 갈린 것도 흥미롭다. 거칠게 평가하자면,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돌이킨 사람들은 예상한 것 이상의 불행을 맛보았고, 끝까지 개인의 안위만을 추구한 사람들은 기대한 것 이상의 영광을 누렸다. 전반적으로 그런 시대였고 어느 누구도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p. 38)
더 나아가 미군정은 영어를 할 수 있는 법조계 인사들을 필요로 했다. 일제시대 때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이들을 필요로 했듯이, 미군정도 마찬가지였다. 기존 법조인들 중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에, 법무부 장관을 비롯한 고위직에 법을 전공하지 않은 이들도 임명되기 시작했다.
고문단 조직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점령군에게 절실한 것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실무조력자였다. ... 김영희는 1902년 4월 6일 개성에서 태어나 1922년 연희전문 상과를 졸업하고 개성 송도고보 교사로 일하다가 도미해 1929년 미국 예일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물이었다. ... 1945년 10월 9일 우돌(Emery J. Woodall) 법무국장은 김영희 박사를 법무국장 보좌관에 임명했다. 조선인으로는 사법분야 최고위직이었다. 김영희 박사는 고등시험 사법과나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경력이 없어 변호사 자격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법학을 전공한 적이 없었다. 미군 입장에서는 법학을 전공했느냐보다 말이 통하는지가 훨씬 더 중요했다.(p. 182)
제1법률가군에 해당하는 판검사는 물론이고, 제2법률가군에 해당하는 변호사들도 판검사로 임용되었다. 이로도 모자르자 제3법률가군이라 칭하는 일제시대 법원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서기 겸 통역사들도 이 시기에 특정 자격시험을 거친 후 비교적 쉽게 판검사에 임명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고등시험 사법과 혹은 조선변호사시험을 준비하며 법원에서 경력을 쌓고 일을 배웠다. 이마저도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마지막으로 제4법률가군의 임용은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45년 8월 15일은 조선변호사시험 둘째 날이었다. 일본 황제의 패전 선언으로, 시험은 당연히 중단되었다. 그러자 응시자들은 '이법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응시한 경력만으로 합격증을 요구했으며, 합격증이 부여됐다. 이들은 변호사로 활동했을 뿐 아니라 각종 시험에서 필기를 면제받고 면접만으로 판검사로 임명됐다. 이들을 제4법률가군이라 부른다. 전두환 정권 시절 대법원장을 거친 유태흥도 이법회 출신이다.
이렇게 총 네 개의 법률가군을 통해 해방 이후 법조계가 형성된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획득한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와 자리를 안정시켜야만 했다. 한국 사회에 대한 대단한 악의와 포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고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고위층의' 직업을 가진 자로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도를 지니고, 격변하는 사회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나갔다. 법조계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열심히' 활동한 이들과, 권력을 목적에 두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역할을 그저 '충실히' 감당해온 이들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권력을 쌓아왔다. 법조인들이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그리고 시대가 그들에게 어떤 기회를 주고 앗아갔는지. 그 시대의 복잡한 맥락이 지금과 어떻게 맞닿아있는지는 2편에서 조금 더 살펴보려고 한다.
김두식, <법률가들>, 창비, 2018.
김두식, <법률가들>, 창비, 2018.김두식, <법률가들>, 창비, 2018.
글. 오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