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8시간, 아이를 돌봐주는 곳이 있다면
이제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친구들이 제법 된다. 나는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지만 친구들을 보면서 아이 키우는 게 물리적으로 얼마나 힘든지, 아무리 부부가 함께 한다 해도 아이 키우는 역할은 왜 엄마에게만 쏠리는지, 양가 부모님 도움 없이 맞벌이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게 가능한지, 과연 엄마들은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지 등. 너무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전반적인 과정은 대체로 두 명이 하지만, 아무리 같이 한다 해도 여전히 주양육자는 엄마가 된다. 아이에게 무엇을 먹이고 입혀야 할지, 자신이 하고 있는 양육 방법이 옳은지, 어떤 장난감과 책이 좋은지, 어느 센터에 어떤 교육이 있는지 등의 매일매일 일정 시간 이상을 투여하고 스트레스 받는 고민은 엄마들이 주로 하게 된다.
양육을 전담하며 여성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지방자치가 나서서 지원금도 주고, 돌봄도 지원하고, 경력단절여성 교육도 하지만 이는 큰 효과가 없다. 출산률은 계속 낮아지고 아이 키우는 여성들의 고민도 여전하다. 대체 왜 양육은 오롯이 여성의 몫이 되는가에 대해서는 페미니즘을 필두로 하는 여러 영역의 연구를 통해 식견과 이해를 넓혀갈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보다 더 중요한 건 직접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해결 방안이다. 여성들이 자신의 일과 삶을 이어가려면, 일을 하는 동안 아이에 대한 고민을 크게 하지 않으려면, 설령 퇴근했을 때 제2의 직장으로 가는 느낌을 받더라도 그것이 여성 혼자의 몫이 아니게 되려면, 그리고 수년이 지나 양육하는 삶이 어느정도 끝나도 계속 이어갈 자신의 삶을 가지려면,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여성은 양육을 전담으로 하는 사람으로 설정한다. 그 설정에서 가정의 경제적 수준과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있는지의 잣대로만 여성이 일을 해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가 결정된다고 본다. 보통 남편이 부인보다 잘 버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 또한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또다른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일과 양육 사이에서 개인이 무엇을 할지를 결정하는 데는 개인의 선호도 당연히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일을 하고 싶은지 아닌지, 하루종일 아이를 키우는 일에 집중하고 싶은지 아닌지에 대한 선호 말이다.
사람들은 되도록이면 일을 안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매체를 통해 보면 주식이나 부동산 등의 자산 투자로 돈을 벌고 일/노동은 되도록 빨리 끝내고 싶어하는 젊은 세대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은 잘 들리지 않지만 한때는 취업이 안되는 여성들이 결혼을 선택하는 '취집'이라는 말도 있었다. 아마 일이란 돈을 벌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텐데, 하지만 일은 돈을 얼마나 버는가와는 관계없이 자신이 삶을 살아가면서 하고자 하는 활동, 자신을 표현하기도 하고, 자신의 성취를 확인하기도 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또 다른 중요한 기준은 아이를 키우는 것이 할 만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딱 떨어지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점은 사실 자신이 제일 잘 알거라 생각한다. 친구들만 봐도 아이를 키우는 것에 자주 감격을 느끼며 상대적으로 잘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아이를 키우는 것이 시간이 흘러도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일이든 내가 다른 이보다 비교적 쉽게 혹은 노력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처럼 양육도 그런 종류의 일일 수 있다.
이 두가지 기준에 맞춰 표를 만들어보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각자의 선호와 더불어 가정의 경제적 수준,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있는지에 따라 선택이 달라진다. 개인의 선호와 의지가 있음에도 처한 환경에 따라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나뉜다. 아이를 키우면서 피할 수 없는 책임과 몫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환경과 상관없이 여성이 일을 하고 양육을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질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어쨌든 남성은 이런 선택지를 고민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니까.
일을 해야만 하거나 하고 싶은 상황이라면 부모들의 고민은 위 문장에 다다른다. 부모가 일을 하는 동안 아이를 봐줄 수 있는 곳이 있는가. 일반적으로 회사에서 일을 하는 시간으로 생각해 보자면 최소 8시간. 사실 점심시간과 출퇴근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10-11시간 동안 아이를 봐줄 곳, 사람이 필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로 갈수록 아이가 바깥에 있는 시간은 짧아진다. 즉, 양가 부모님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일을 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 아이를 돌보는 도우미를 고용한다 해도 비용이 만만치 않을 뿐더러 점점 다른 사람의 손에 아이를 맡기는 것이 두려워지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하루에 8시간은 일하는 여성에게만 필요한 시간은 아니다. 육아휴직 이후 회사로 돌아가거나, 새로 일을 구하려고 하는 여성에게는 이 시간이 더욱 필요하다. 여성이 일을 하지 않고 아이와 있는 시간은 사회적으로 그리고 업무적으로 단절되는 시간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몇년이 지난 뒤에 주어지는 경단녀 티오라던가 바리스타/제과제빵 수업같은 것이 아니다. 자신이 원래 하고자 하던 일을 이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마저도 주어지지 않는 지금은 여성들이 사회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뺏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전업으로 아이를 키우기로 결정한 여성에게도 개인적인 시간은 필요하다.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간 그 잠깐의 시간은 쉬는 시간이 아니라 가사일을 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자신을 돌보는 것은 보통 의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종종 엄마들을 의지가 부족한 사람처럼 말하는 걸 듣게 되는데 이런 사람들은 퇴근 후 혹은 주말을 자신이 대체 얼마나 알차게 쓰는지 돌아보길 바란다. 부모들이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좋은 양육이 가능하다.
누군가에게 집은 퇴근하고 돌아갈 곳이라면, 엄마들에게 집은 일을 하는 곳이다. 가사 분담이 안 되면 일을 다니더라도 퇴근하고 나서 다시 다른 직장에 출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이라는 새로운 기쁨을 맞이한 대가는 어떻게든 둘이 함께 나눠야 한다. 8시간은 양육 전담자, 맞벌이하는 부모, 아이를 혼자 키우는 상황에 놓인 한부모, 모두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기댈 마을이 없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 두 분 모두 일을 하셨다. 부모님이 바쁠 때면 동네 이집 저집에서 놀던 게 생각난다. 점심도 먹지 않고 오전에 마치던 초등학교 1학년 때는 늘 친구들과 함께 하교했다. 골목골목 자신들의 집이 있는 곳에서 헤어지며 밥 먹고 다시 보자고 인사했다. 나는 집에 와서 현관문에 딸린 조개구멍을 통해 엄마가 두고 간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고 유치원에 다녀온 동생과 같이 점심을 차려 먹었다. 가끔은 동생과 함께 친구 집에 가서 밥을 먹기도 했다. 밥을 먹고 나면 동네 친구들과 만나서 놀고 피아노 학원도 다녀왔다. 무슨 일이 있으면 집주인집 아주머니 문방구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거나 엄마에게 삐삐를 쳤다. 티비에서 만화를 하는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갔고, 숙제도 했다. 때로 엄마는 저녁 시간이 지나 들어오기도 했다. 그럴 때는 저녁도 챙겨 먹고 먼저 잠든 동생 옆에서 엄마아빠를 기다리며 티비를 틀어놓고 책을 봤다. 때로는 주인집 아주머니 집에서 밥을 먹기도 했다. 엄마아빠가 맞벌이를 하는 집은 비슷한 풍경이었다. 부모님은 일하러 가서 없었지만 우리 주변에는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도와줄 어른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사회가 아니다. 초등학교 1,2학년의 하교길은 어딘가 모르게 험난해졌고, 학교 갔다 돌아온 아이들은 갈 곳이 없다. 당연히 밥을 주거나 돌봐주는 동네 아주머니도 없다. 사회적인 안전망이 없는 상태에서 아이들은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그나마 부모가 번 돈으로 보내는 학원이 아이들을 돌봐준다. 그런데도 왜 어린이집은, 유치원은, 학교는, 그리고 이를 운영하는 국가는 제도를 바꾸거나 확대하지 않는걸까.
출생률이 줄어든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어린이집, 유치원은 자리가 없다. 어린이집의 경우 통상 3-4시까지 아이를 봐주고, 4시부터 7시반까지는 연장반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모든 어린이집에서 연장반을 운영하는 것은 아니며, 연장반 교사도 충분히 고용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정교사가 돌아가며 연장반을 담당해야 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당연히 어린이집 교사에게 업무가 과중된다. 업무가 과중되어 받는 스트레스와 시간의 부족은 보육의 질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연장반 교사는 정규직이기는 하지만 보수가 정해져 있고 호봉이 책정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연장반 교사의 자격이 크게 다른 건 아니다. 연장반 교사도 정교사와 동일하게 보육자격증은 소지해야 한다. 이러한 차별 대우는 보육의 질을 떨어뜨릴 뿐이다.
유치원은 더 심각하다. 어렵사리 들어간다 해도 점심시간까지만 운영하며 그 후에는 방과후 교사가 보는 체제로 운영된다. 종일반이라고 해도 네시에 종료하기 때문에 사실상 그 이후에 아이를 데리고 갈 사람이 필요하다. 물론 종일반으로 모두를 받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대부분 맞벌이 부모들이 우선순위로 종일반을 들어가고 나면 양육자가 집에 있는 가정은 종일반에 들어가기 어려워진다. 유치원도 어린이집과 마찬가지로 정교사와 방과후 교사는 처우가 다르다.
초등학교는 더 만만치 않다. 1-2학년은 오전 수업만 마치면 집으로 가야 한다. 학생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교사들이 빽빽한 교실에서 아이들과 씨름하지 않고도 새로운 교육을 시도해볼 수 있거나 근무시간을 교대로 운영할 수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쉽지 않은가 보다. 여전히 학교의 행정이나 교육은 유연하지 않다. 나는 이것이 너무 비효율적으로 느껴진다. 시대는 변했는데 학교는 변하지 않는다.
하루에 8시간을 아이를 봐준다고 하더라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늘 편안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아이가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당장 어린이집을 보낼 수 없다. 그 아프다는 범주가 열이 펄펄 끓는 수준일 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콧물만 나도, 아이가 감기 기운만 있어도, 다른 친구들에게 전염시킬까봐 어린이집에 가지 못하기도 한다. 그럼 그 하루는 누가 아이를 봐줘야 할까. 집에 와서 아이를 긴급하게 돌봐주는 서비스도 있지만 세상이 갈수록 흉흉하고, 흉흉한 뉴스만 나오는 판에, 낯선 이의 손에 낯을 가릴 아이를 쉽게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도 이 정도의 수준은 부모가 감당해야 할 몫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연장반이나 종일반이 있는 어린이집, 유치원을 찾아서 대기나 추첨을 기다리고 당첨이 되어도 허겁지겁 달려가거나 조퇴해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지금의 수준에서. 다른 아이들은 모두 가고 내 아이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선생님께 미안해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이가 유치원에, 학교에 간지 3-4시간 만에 다시 집에 돌아오는 상황에서 부모는 일과 양육을 병행할 수 없다. 누구나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기고 일하러 가고, 일을 마친 뒤에 데리러 갈 수만 있다면, 그 시간만 제도적으로 국가가 보장해준다면 파편화된 경력단절여성 사업은 아마 필요도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돌봐줄 마을이 없다면 제도가 보완되어야 한다. 막연히 사람 좋음에 기대는 공동체가 더 이상 없는 상황에서 필요한 제도를 갖추고 보완하는 것. 그것이 사회가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닐까. 이번에 이재명 대선후보는 소확행공약으로 모든 초등학교에서 3시 하교와 7시까지 돌봄 교실을 내세웠다. 소확행공약이라기보다는 필수공약에 가까워야 한다. 의무교육은 아니지만 유치원을 보내고 싶은 부모들은 유치원을 보낼 수 있도록, 초등학교에서도 부모가 일하는 동안 돌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장애를 가진 특수아동들에게도 함께 적용되어야 하는데, 이 문제는 비장애아동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아이를 키우는 모든 부모들, 그리고 아이를 키우고 싶은 모든 부모들의 삶을 존중한다면 더 늦기 전에 사회가 아이를 키워야 한다.
글. 오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