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평화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고민을 시작해야 할 때
지난 번 현 정부의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군비를 증강하는 모순적인 모습에 대한 글을 썼는데, 이어 오늘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 정말 평화적이었는지, 성찰해 보려고 한다.
지난글 >> 평화는 군사력으로 지켜지나요?
문재인 정부가 평화를 언급한 방식은 크게 “대화와 협력을 통한 평화”, “힘으로 지키는 평화”, “대북정책에서만 말하는 평화” 3가지였다고 생각한다.
먼저, “대화와 협력을 통한 평화”라는 말은 더 이상 시민들을 설득하지 못한다. 이제 시민들은 대화를 통해 남북 간 갈등을 극복하고 경제교류를 통해 평화적 공간을 구성할 수 있다는 기대가 낮다. 특히 2017년 북한의 핵무력 완성 선언 이후, 이전처럼 남북관계가 달라져 경제교류가 재개된다 해도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이어간 10년과 같은 시기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10년의 경색기를 통해 10년간의 경제교류가 정치적인 갈등 해결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과정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평화가 번영을 가져올 것이라는 슬로건만 말하고 남북관계 개선의 실제적인 효용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남북관계가 다시 경색된 상황에서도 그 전과 다름없이 일관되게 대화와 협력을 이야기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 구체적인 내용은 빠진 채 방향성만 남아 공허하다고 느끼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청년세대의 경우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에 대한 기대가 더욱 낮다. 2021년 통일평화연구원이 진행한 <통일인식조사>에 따르면 북한을 경계대상 혹은 적대대상으로 인식하는 비율은 19~29세 45.4%, 30대 37.8%, 40대 31.2%, 50대 29.6%에 60대 이상이 36.4%에 달한다. 6.25 전쟁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을 60대 이상에 비해서도 높다. 또한 북한 정권을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인식하는 비율은 19~29세가 67.9%, 30대가 64.1%, 40대가 64.8%, 50대가 65.8%, 60대 이상이 69%에 달한다. 이 정도면 대화와 협력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청년 세대는 북한과 교류를 했던 시기에 대한 기억이 없다. 지금의 청년 세대가 10대부터 접해온 북한에 대한 뉴스는 북한의 잦은 핵실험, 천안함 사건과 같은 군사적 도발이 대부분이다. 2018년 남북관계가 개선되었을 때 북한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전환되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북미정상회담 실패에 이어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를 겪으면서 이는 실패의 경험으로 남았다. 이후 북한에 대한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더욱 강화되었다.
청년들에게 분단상태는 문제가 아니라 디폴트다. 그리고 남북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개인적 이익이 명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는 군문제를 제외하고는 청년들이 겪거나 고민하는 문제들과 분단의 직접적 상관관계를 생각하기는 어렵다. 위와 같은 자료에서 청년들은 “통일은 개인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라는 질문에 매우이익+다소이익=21.6 % 별로아니다+전혀아니다=78.4%로 응답했다. 이는 남북관계가 가져올 이익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낮고 국가의 이익이 자신의 이익과 연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청년세대의 경향이 북한 문제에도 반영된다.
문재인 정부의 평화는 비핵화 협상이 어그러진 후 “힘으로 지키는 평화”만 남았다. 선언적 의미에서조차 종전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현 정부에서 말하는 평화는 전쟁을 끝내는 상태에 머물러 있고 이를 넘어서는 평화의 의미에 대한 고찰은 부족하다. 문재인 정부 들어 국방 예산은 연평균 6.7%씩, 총 12조가 증가했다. 2010-2017년 8년 사이 10조가 증가한 데 비하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편이다. GFP에 따르면 한국의 군사력은 세계 6위, 국방비는 전 세계에서 10번째로 높게 지출한다. 북한이 비핵화에 이른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군사력 증강을 지속한다면 이는 남북의 군비경쟁을 다시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한국의 급격한 군사력 증강은 남북관계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안보의 딜레마를 심화시킬 여지가 있다. 방산수출액의 경우 세계 9위에 이르고 있는데, 수출한 무기가 결국 어느 곳에서는 전쟁을 위해 폭력을 위해 사용된다고 생각하면 이 또한 평화를 추구하는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세계대전 이후 평화운동은 군축을 주요 주제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정부는 여전히 군사력으로 지키는 안보를 강하게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정부에서 말하는 평화는 남북관계 개선을 설명하는 수사적 의미에 머무른다고 보여진다.
문재인 정부는 늘 평화의 해법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말하지만, 한반도 평화 문제를 위해 남북관계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할수록 국민들은 한반도가 평화롭지 못한 이유를 분단문제로만 생각하게 된다. 그럴수록 평화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북한에 더욱 돌리게 되고 갈수록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화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한반도의 평화는 ‘비핵화’와 남북관계 개선만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분단 상황으로 인한 남북 간 갈등이 한국의 비평화적 상황을 추동한 요인이라 할 수는 있지만, 이제는 남북 간 갈등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한반도가 평화로워진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특히 일상의 비평화는 분단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 고령화, 성과주의, 불평등, 차별 등에서 발생한다. 대북정책이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과, 평화에 도달하기 위해 한국 사회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이제는 평화 개념을 더욱 구체화하고 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다 더 제도화/정책화 할 필요가 있다. 2000년대 이후 평화연구는 갈등 상황에 있던 국가가 종전선언을 하고 평화협정을 맺은 이후에도 왜 평화가 정착되지 않고 무너지는가에 대한 질문에 봉착해있다. 국제체제 안에서 그리고 국내정치상황 내에서 힘이란 늘 움직이며 국제질서의 재편에 따라 평화체제도 내외부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현 정부가 추구하는 전쟁의 위협을 제거하는 평화는 평화학자인 갈퉁(Johna Galtung)의 분류에 따라 소극적 평화라 말할 수도 있지만 소극적평화 또한 배타적으로 우리와 타자의 경계를 나누게 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신이 다시 군비증강과 평화체제 해체로 이어지도록 만든다. 결국 폭력적인 구조와 문화를 해결하는 적극적 평화의 상태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나와 타자의 경계 없이 모두가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면, 소극적 평화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평화는 비핵화를 한다고 해서, 북한과 경제교류를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지금은 남북관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이르고 있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남북관계라는 말을 평화로 대치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평화라는 말이 갖는 독자적인 의미가 있어야 하며 한국의,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남북관계 개선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의 국내외적인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글. 오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