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데와소피가 아닌 '힐데와 소피'
세상에 대한 불만이 많아 ‘오힐데의 불만’을 연재하고 있지만, 불만을 갖는 대상의 끝에는 사실 내가 있다. 세상에 불만이 많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나와 세상이 불화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 불화의 탓이 비단 세상에만 있겠는가. 나에게도 문제가 있음을 알기에, 자연스레 내게도 불만이 든다.
오늘 나의 불만은 ‘활동’을 대하는 나의 태도다. 일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겠지만 그보다는 ‘구체적인 활동’에 대한 문제를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히어로 무비에서 ‘세상을 구하는 것’이 영웅의 일이라면, 구체적인 활동은 ‘빌런을 때리는 것’일 수도 있고, ‘응급상황에 놓인 시민을 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하는 전반적인 ‘일’의 방향성에는 불만이 없지만 그것을 위해 대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늘 딜레마에 빠져있다.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소피는 자주 묻는다. ‘힐데님은 하고 싶은 게 뭐예요?’ 이 질문을 들으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해야 하고 하는데, 돌이켜보니 근 2년간 나는 ‘힐데와소피’로서 ‘하고 싶은 것+해야 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것으로 생각해 왔던 것 같다. 하지만 ‘힐데와 소피’와 ‘힐데와소피’는 엄연히 다르다(띄어쓰기를 유념하길 바란다). ‘힐데와 소피’는 말 그대로 힐데와 소피라는 두 주체를 가리키지만, ‘힐데와소피’는 둘이 하나가 된 조직을 가리킨다. 힐데와소피를 하면서 여느 조직이 그렇듯 우리도 조직의 규모를 키우고, 활동 범위를 넓히고, 더 알려져야 할 필요를 느끼며 일해왔다. 그래서 그간 내가 하는 일, 혹은 내가 하고 싶은 은 곧 힐데와소피의 확장성과도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힐데와소피가 확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활동을 해야 할까. 물론 좋은 책을 많이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으나 책을 많이 파는 것과는 직결되지는 않는다. 결국 누구나 말하듯 인플루언서가 되든 아니면 네트워크 하는 사람을 늘리든 다양한 방식의 영업이 중요하다. 영업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그들과 일을 벌이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나에 대한 문제가 시작된다. 나는 나와 어떤 방식으로든 잘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관계하려고 노력하면, 문자 그대로 몸이 아프다. 배가 아프든, 체하든, 두통이 오든, 몸살이 오든 아프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몸이 아픈 것이니 마음이나 정신도 괜찮을 리 없다. 이걸 잘 견뎌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러나 사람을 안 만나고 살 수는 없으니 이 아픈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의미를 찾게 된다. 사회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야 내가 맞지 않는 사람들과 하는 일이 견뎌진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사회적 의미란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 즉 눈으로 이 일이 어떤 의미였는지 확인하는 수준에 가깝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변화가 보이는, 당장의 변화가 필요한 문제의식에 관심이 적은 편이다. 이는 일종의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실은 나는 그저 이 복잡한 세계에서 스스로 만족스러워할 수 있는 활동을 해내고 그 결과물을 던질 뿐이며, 이것이 의미 있는 변화로 이어지는지는 또 다른 세상의 몫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힐데와소피의 확장성을 위해서는 사람을 만나야 하고 사람을 만나면 의미를 찾아야 하는데, 사람을 만나면 몸이 아프니 의미라도 찾으려고 하는데, 의미를 찾기도 어렵고 있지도 않은 상황에 놓인다. 결국 돌고 돌아 애초에 무언가를 시도했던 나의 선택으로 되돌아와서는 다시 힐데와소피의 확장성을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묻게 된다. 끊을 수 없는 굴레다.
어려울 때는 초심으로 돌아가 보라고 했던가. 야심찬 힐데와소피 첫 책, 《나는 통일을 땡땡합니다》를 만들었을 때로 돌아가 보자. 당시 나는 내가 있던 조직의 확장성을 위해 통일교육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놈의 확장성!) 약 1년을 해보고는 통일교육을 하는 것은 조직의 확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소피가 내가 진행하던 통일교육을 책으로 만들어 보자고 한 제안에는 솔깃했다. 조직의 확장성을 위해 통일교육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그것을 접기로 했지만, 책으로 만들기 위해 기획하고 정리하고 글을 써내는 과정을 상상했을 때는 설렜다. 일회적인 강의보다 책이 더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막상 책을 만들려고 돌입해보니 그 자체는 길고 힘들었지만, 기획하고 정리하고 글을 써내는 과정이 힘들면서도 즐거웠다. 실로 책을 만들 때는 몸이 피곤할지언정 아프지 않았고, 일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 ‘활동’ 자체를 즐겼다.
그래서 이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굴레를 벗어나서, 나와 개연성이 있고 연계성이 있는 활동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힐데와소피’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살짝 낮춰서 ‘힐데와 소피’를 생각해 본다고 할까. 결국은 ‘힐데와소피의 확장과 직결되는 일을 찾기보다는 이와 분리하여 근본적으로 나에게 맞는 활동을 먼저 다시 한번 살펴보겠다’는 말인데, 이조차 이렇게 길게 글로 쓰고나서야 스스로 납득하고 마는 이 성격에도 불만이다. 이 불만의 끝은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