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 때 노회찬 의원의 강연을 듣고, 처음 '정당'이란 데를 가입했다. 노 의원이 말하는 북유럽 국가와 같은 사회민주주의가 내가 원하는 이상향과 다르지 않다 생각해서였다. 정치가 불편하고 위험하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나는 정치에 참여하고픈 사람이었다. 다만 그땐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이 빨리 변하고 동시에 기회주의적임을 몰랐다. 내가 가입한 정당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각종 사건과 잡음을 내면서 소멸되었다.
그래도 남은 것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운동권'이라 불리는 사람을 만났다. 레닌과 맑스, 그람시를 진지하게 읽는 사람을 만났다. 세상의 부조리에 맘껏 분노하며 세상을 어떻게든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정치를 논하는 사람이야 많지만, 정치적 행동을 하는 사람은 주변에 드물었다. 나는 이런 '정치적 인간'과 어울리는 일이 즐거웠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진보정당의 사람들은 무기력하고 나약해 보이기도 했다.
책 『세 여자』를 읽었다. 식민시대 공산주의자들에게서 깨끗한 열정을 느꼈다. 놀라웠다. 이후부터 일제강점기 시대 공산주의 운동가의 이야기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사상에도 나이를 매길 수 있다면, 1920년대 공산주의는 청년기 일터. 젊고, 유망하고, 혈기왕성했다. 사상은 세상을 바꾸고 있었고, 사상을 지향하는 이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조선의 많은 이들도 이 사상의 이상과 힘에 동조하며 조국 독립과 이상적 국가 건설을 꿈꿨다.
그러나 이 꿈과 열정이 어떻게 끝날지는 이제 안다. 다만 오늘 그 결말의 지점에 섰을 때, 눈에 띄는 이가 있다. 조봉암. 그는 공산주의 운동가였으면서 당시 공산주의운동의 모순을 비판한 인물이었다. 공산주의 운동과의 결별을 선언하고는 좌와 우가 아닌 제3의 길을 걷고자 했다. 반공 색채가 짙은 한국 정치 지형에서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영향력도 얻었다. 진보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이승만을 위협하는 라이벌에까지 올랐다.
조봉암, 공산주의자가 되다
조봉암은 1899년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났다. 1919년 전국적인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21세였다. 그는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항일독립운동가가 되기를 자처했다.
3·1운동은 나로 하여금 한 개의 한국 사람이 되게 하였고, 나를 붙잡아서 감옥으로 보내준 일본 놈은 나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서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애국 투사가 되게 한 공로자였다. 「내가 걸어온 길」
독립운동의 심지를 다졌지만 당장 무엇을 할지 몰랐던 조봉암은 일본으로 갔다. 도쿄에 도착한 그는 엿장사를 시작했고 중앙대학 전문부 정치과에 입학했다. 당시 일본에는 자유주의와 민본주의, 민주주의, 무정부주의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었다. 조봉암은 그 속에서 마음껏 사상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그는 무정부주의를 지향하는 흑도회에 몸 담았다가 이내 공산주의로 기울었다. 공산주의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깨달았고, 소비에트가 한국 독립을 적극적으로 원조한다는 이유에서였다.
1921년 코민테른에 의해 설립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식민지 피지배국 운동가를 체계적으로 교육하기 위한 기관으로 운영되었다. 중국의 덩샤오핑, 류샤오치, 베트남의 호찌민, 조선인으로는 조봉암, 주세죽, 허정숙, 김명시, 권오직, 김조이, 김준엽 같은 이들이 공부했다.
러시아에서는 1917년에 소비에트 혁명이 성공하였고, 그것을 영도하는 자가 레닌, 트로츠키 등인데 그들이 주장하는 주의가 볼셰비즘이고, 그 볼셰비키들은 국내에서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제국주의를 반대했고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을 반대하고 한국 독립을 적극적으로 원조한다는 것이며, 그 실증으로는 벌써 수십만 달러의 독립 원조 자금을 상하이 임시정부를 통해서 국내에 보냈다는 것이다. 「내가 걸어온 길」
그 뒤 조봉암은 박헌영, 김단야와 같은 조선의 핵심 공산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갔으며, 경성에 돌아와서는 신사상연구회, 북풍회, 화요회 등에서 활동했다. 이어 제1차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동맹을 창설을 사실상 담당했다. 그러나 그가 조선공산당을 코민테른에 정식 지부 승인받기 위해 갔던 길에, 신의주에서는 조직이 발각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후 조봉암은 국내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며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책임비서, 극동부 조선대표를 맡았다. 1933년 조봉암은 상해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된다. 딸과 부인과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그 길로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 간 복역해야 했다. 『조봉암과 진보당』을 저술한 정태영 작가는 조봉암이 이 기간 동안 코민테른의 노선에 회의를 느끼고 민족 노선의 색채를 더 띄게 되었다고 보았다.
소련 자국 중심의 코민테른 노선이 반드시 민족 노선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고, 그런 노선에 따라 충실히 투쟁하다 보니 투쟁의 성과보다 그에 따른 희생이 너무 크기도 했던 것이다. (중략) 조봉암이 생각한 당 밖으로부터의 투쟁은 코민테른 노선에 따라 소련을 사회주의 조국으로 삼는 조선공산당의 친소반미 계급 편향을 지양해가는 새로운 세력으로서 민족 주체 노선을 세우는 것이었다. 『조봉암과 진보당』, 81-82쪽
1924년 레닌이 사망한 이후, 전권을 장악한 스탈린은 세계 혁명 노선을 포기하고 일국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계획을 실시했다. 이는 자본주의 국가들,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도 동시에 꾀하는 것을 의미했다. 소비에트가 스스로 '강대국' 혹은 '제국'으로 설정하는 전략은 조봉암과 같은 민족주의 성향 공산주의 운동가에게는 당황스러운 변화였다.
우리 한국 청년의 대부분이 3·1운동 이후로 많이는 사회주의자가 되고 혹은 공산당을 조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한국 독립을 위한 사회주의고 한국 독립을 위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한국 민족을 버리고 한국 독립은 불고하고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생각한 일은 없습니다. (중략) 내 나라도 잊어버리고 내 민족도 생각지 않고 소련의 지시대로만 하는 것은 옳다고는 생각이 안 됩니다. 「나의 정치 백서」
조봉암, 중도주의자가 되다
1939년 출옥 이후 조봉암은 자신의 고향, 인천으로 돌아왔다. 코민테른의 노선 변화, 일본의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은 더 이상 유의미한 공산주의운동을 어렵게 했다. 1945년에는 갑작스러운 해방이 찾아왔다. 이후 남과 북에는 미국과 소련이 들어오게 되고, 조봉암은 여운형처럼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중도파의 세력이 필요하다고 뵜다.
그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인천 지부를 조직했다. 하지만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자들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잠식하기 시작했고, 이런 건국준비위원회는 결정적으로 미군정에게 부정 당했다. 조봉암은 ‘통합'이 아닌 '분리'의 정치를 시작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실망했고, 조선공산당 중앙당은 조봉암이 혁명활동을 포기하고 일제 당국 비호 하에 있다며 비난했다. 결국 1946년 조봉암은 조선공산당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1945년 8월 17일 YMCA건물에서 진행된 건국준비위원회 수립
5%밖에 안 되는 극좌극우 미소편향 정치집단들을 제압하고 95%의 국민을 대변하는 범민족적 정치조직을 창출하여, 불편부당한 미소협력 체제를 구축해서 조국의 통일독립을 성취할 주체를 이루겠다.
신탁통치 논란,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로 남북에서 좌우 이념 투쟁은 더욱 가열되었다. 중도파의 목소리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가운데, 조봉암은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다. 제3전선인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만들었고, 좌우합작파를 중심으로 한 '민족자주연맹'에 가입했다. 그러나 여전히 공산주의자란 이력은 문제시되었다. 김규식은 그와의 만남을 거부하기도 했다.
미국과 소련의 협상 포기 이후 한반도의 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었다. 유엔에서는 '남북한 동시 총선거'안을 상정했지만, 소련이 이를 반대했다. 결국 유엔소총회에서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감독할 수 있는 지역에서만의 총 선거, 즉 남한에서만의 총 선거안을 채택했다. 통일정부를 지향하는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만의 총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북한의 김일성·김원봉과의 남북 협상을 하려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운 뒤였다. 4명의 대표는 단독 정부 반대 성명을 발표하지만, 남한의 총선거는 예정대로 집행된 것이다.
이 때 조봉암은 총 선거 참여의 불가피성을 주장했다. 통일정부를 지향하는 세력들이 이제는 선거에 참여해 대표성을 확보해야 한다 말이다. 중도세력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보수세력이 의회의 다수를 차지할 것이 분명했다. 조봉암의 이 같은 주장은 당연히 좌우합작운동을 해온 이들에게 기회주의적으로 비춰졌다. 민주주의 독립전선은 와해되었고, 그는 민족자주연맹에서 강제 출당조치를 당했다. 좌에서는 우익이라 비난받고, 우에서는 좌익이라 비난받았다.
조봉암은 해방 정국을 맞아 박헌영의 대소 종속적 좌편향 노선으로부터 배격당하고, 또한 군정 종식 국면에서 '순수' 민족주의 노선의 비타협 세력으로부터도 배격당했지만 자신의 중앙 노선이 가야 할 현실적인 노선은 참여 속에서의 투쟁이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조봉암과 진보당』, 114쪽
'참여 속에서의 투쟁'의 성과는 있었다. 조봉암은 5·10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당시 다수당이었던 한민당을 견제하기 위한 '무소속구락부'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런 참여 속의 투쟁은 이승만 정부로도 나아갔다.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의 초대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였으며, 양곡매입법과 토지개혁법 등 일제 식민 잔재 해소와 농촌 근대화를 위한 토지개혁을 실시할 수 있었다.
1948년 8월 5일 첫 국무회의를 마친 대한민국 초대 내각. 앞줄 왼쪽부터 전진한·임영신·안호상·이인·이범석·이승만대통령·윤치영·김도연·조봉암·장택상. 뒷줄 왼쪽부터 윤석구·김동성·민희식·유진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조봉암, 진보주의자가 되다
6·25전쟁이 일어난 뒤, 이승만 정부의 무리한 행동과 전략은 도를 넘기 시작했다. 조봉암은 이승만을 대체하는 정치세력을 만들기 위해 움직였다. 그는 스스로 제2대,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진보당 추진 위원회 소속으로 나선 그의 선거 구호는 "이것 저것 다 보았다. 혁신 정치밖에 살 길 없다", "전쟁하지 맙시다!"였다. 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지만 조봉암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한 평화통일안을 주장했다. 우파 인사들에게는 상식적이지 않은 판단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이상 동족상잔의 피를 흘릴 수는 없다. 우리는 오직 피 흘리지 않는 통일만을 원한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파괴한 책임은 6.25의 죄과를 범한 북한 공산 집단에게 있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대한민국 정치권력을 획득해야 하며 그런 연후에 국제 정세의 진운에 발맞추어 제 우방과의 긴밀한 협조하에 유엔을 통한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조국 통일의 구체적 방안을 책정하려는 것이다. 민주주의 승리에 의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 이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다. 「진보당 정책 1.통일문제」
진보당 조봉암의 평화통일정책은 결국 국가보안법 위법의 빌미를 제공했다. 1958년 조봉암과 그 간부들은 양명산이라는 이를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정치자금을 제공받았으며, 평화통일을 위시한 적화통일을 지향한다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너무 빠르고 허술한 진행과 선고였다. 참여 속의 투쟁, 민주주의를 추구했지만, 자신의 시민으로서 권리는 결국 부정당하고 말았다. 한 때 어느 한쪽에 가담했다는 그의 역사가 그를 정의하고야 말았다.
조봉암, 무엇을 남겼는가?
무엇이 조봉암이 다른 길을 가게 하였는가? 나는 그가 끝까지 양보하지 않았던 가치가 '민주주의'에 있다고 생각한다. 조봉암은 사회주의 체제에서 벌어지는 반민주적인 형태에 늘 분노했고, 그것이 있는 한 공산주의 운동과의 자신의 타협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는 해방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도 조봉암은 법과 제도의 범위에서, 민주주의가 허락하는 정치의 영역에서 행동하고자 했다. 직감적으로 그는 민주주의와 법치가 함께여야 함을 알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 법치가 그를 죽이고야 말았다. 소크라테스 같은 결말이었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우매한 대중에 의한 민주주의를 거부했다면, 조봉암은 소수의 정치집단이 좌지우지하는 민주주의를 거부했다. 이 둘 모두 성숙하지 못한 민주주의였고, 그로 인해 부정의한 결과를 낳았다. 다행히 이 땅의 민주주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봉암은 21세기에 이르러 무죄로 복권되었다. 민주주의는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였지만 결국은 조금 앞으로 나아갔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믿을 수 있다. 이 '믿음'이야말로 조봉암과 수많은 이들이 남긴 유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