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자발적으로 읽었던 책 중 기억에 남는 책들이 있다. 하나는 김영사에서 출간되었던 '앗! 시리즈'다. 초등학교에 있던 작은 독서실에서 발견하고는 모든 길은 로마로와 그럴싸한 그리스, 잉카가 이크이크와 같은 책을 재미나게 읽었다. 옛날 사람들은 사람을 제물로 바쳤었구나. 로마에는 목욕탕이 있었구나. 낯선 것도 있었고 지금은 너무 당연한 것도 있었다. 이원복 선생님이 쓰신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도 참 애정했던 책이었다. 왜 그렇게 세계사를 재밌어 했는지 모르겠다.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사실과 역사로 존재했던 전혀 다른 세계. 나는 이런 사실을 늘 흥미로웠다.
그 뒤로 고등학교 2학년 때쯤 학교 독서실에서 '체 게바라 평전'을 읽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도 읽었다. 아마 어디서 재밌다고 들었던 책들임이 분명한데, 두꺼운 이 책들을 포기하지 않고 읽었던 것을 보면. 책을 한 번 들면 끝까지 읽어야 한다라는 일종의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독서란 그런 것이라 배웠다. 뭘 시작하면 끝을 내야 한다고. 그러나 단순한 흥미나 호기심으로 시작한 책들의 주제는 그리 넓지 않았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사실 책보다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게임에 더 많았다. 세계사도 시험 과목으로 선택하고 나니, 흥미가 떨어지고 있었다. 세상은 원래 재미있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학창 시절 책 읽기의 경험은 비루했다. 세상은 재미없는 곳이었다.행여 한 권을 책을 집더라도, 한번 시작한 것 끝을 봐야한다는 알량한 자존심에 붙들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내가 아는 책의 세상은 학교의 '독서실'. 길쭉한 책장 서너 개가 모여있는 정도의 수준에 딱 머물러 있었다.
2단계, 교양을 위한 책 읽기
그러다 재수를 하게 됐다. 처음으로 시간이 널널해졌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은 남아있었지만, 나를 감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내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됐다. 이때부터 묻어뒀던 궁금증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영어 공부를 하는 이유가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CNN을 보고 이해할 줄 알고, 영어 원서를 읽을 줄 알아야 하는거 아닌가? 국어 공부를 하는 이유가 한국 문학의 역사를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토지'나 '광장' 같은 고전을 한 번 읽고 내 식대로 해석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진짜 공부의 본질을 위한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학창 시절에도 비슷한 고민을 가졌었지만 질문을 해결할 시간이 없었던 나는, 비로소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에서 처음 빌린 책들은 한국 문학들이었다. 처음엔 호기롭게 박경리의 토지도 빌렸으며, 토지를 포기하고는 채만식의 탁류, 심훈의 상록수도 읽어댔다. 컴팩트하게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범우사 문고 버전의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파이돈도 빌려왔다. 무슨 내용인지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저 내가 활자를 읽고 있고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러다가 동네 도서관에서 이런 나의 책 읽기 철학을 굳혀 줄 운명의 책을 만나게 됐다.아놀드 베넷의 '문학감상법'이다.
문학을 창조하는 사람은 세상의 불가사의한 흥미를 보고 느끼는 사람이다. 그리고 위대한 문학 창조자는 비전이 가장 넓고 감각이 가장 강력한 사람이다. 단편적인 통찰력이란 우발적이고 일시적이지만 저들 문학가의 인생은 세상이 따분한 곳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하나의 긴 황홀의 경지다. 세상이 따분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 무의미한 일일까? 어두운 터널에서 밝은 언덕으로 빠져나와 모든 감각이 민활해지고, 생의 참된 맛에 원기가 생기고, 가슴속에서 심장의 고동 소리를 느끼는 것이 정녕 무의미한 것일까? 이들 문학의 창조자는 우리를 그들과 동일한 경지에 도달하도록 만들어 주는 사람인 것이다.
고전은 문학에 강렬하고 영구적인 흥미를 가지고 있는 소수 사람들에게 쾌락을 주는 작품이다. 고전이란 그 소수인들이 쾌락의 감동을 항상 새롭게 하려는 열망에서 끊임없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끊임없는 재발견의 과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을 계속해 가는 것이다. 고전은 윤리적인 이유 때문에 생명을 존속해 가는 것이 아니다. 고전은 어떤 규준에 일치되기 때문에 존속하거나 또는 세상의 망각에도 죽지 않기 때문에 존속하는 것이 아니다.
고전이 존속하는 이유는 고전이 쾌락의 원천이기 때문이며, 또한 벌이 꽃을 잊지 못하듯 소수 정열적인 사람들이 고전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책이 옳기 때문에 ‘옳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말전도다. ‘옳은 책’이 옳은 것은 오로지 열렬한 소수가 그 책을 읽고 싶어 하기 때문에 옳은 것이다. 따라서 문학 취미에 있어서 가장 긴요한 것은 문학에 대한 열렬한 흥미라고 하겠다. 그것만 있으면 나머지 것은 다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현재 여러분이 고전에서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대단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러분의 흥미를 자극시켜 주기만 한다면 경험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경험을 갖게 되면 그 쾌락의 수단을 쓰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비밀 방법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뿐이다. 흥미를 지속만 시키면 여러분은 가장 강렬한 기쁨에 불가피하게 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물론 경험을 얻는 데 있어서도 현명한 방법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있을 수 있다. 퍼트니를 가는 데 베트남 그린을 경유해서 갈 수도 있고 모스크바를 경유해 갈 수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학 연구 초보자에게 극히 중요한 것은, 책 배후에는 인간이 있다는 관념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책은 바로 그 인간의 표현일 뿐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책이란 자기의 감정의 일부를 여러분에게 이야기해 주고 전달해 주려고 노력하는 그 인간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경험이 있는 연구자는 그 책을 보고 그 인간을 간파하고, 그 책을 통해 그 인간을 이해한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물론 당연하다. 그러나 초보자는 그 책과는 별도로 얻은 그 인간에 지식에 의해서 그 책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초보자는 곧 그 책을 어떤 인간성에 결부시키게 되고, 그러면 문학과 인생의 관련에 대한 본질적 개념을 더욱 강화시키게 될 것이다.
아놀드 베넷은 고전의 중요성과 책의 의미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독자들을 너무도 명쾌하게 해설해 주었다. 나는 이 글을 필사하는 것도 모자라, 지저분하게 필사된 내 글로 다시 읽고 또 읽었다.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은 그렇게나 싫어했으면서, 마음을 요동치게 만드는 이 문구에는 철저히 항복해버렸다. 나는 베넷처럼, 고전에서 쾌락을 느끼고 그 쾌락을 전수하고 싶은 소수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이런 경향은 더욱 짙어졌다. 거기다 대학 도서관의 책의 규모는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학교 독서실, 구립 도서관에서 마침내 다다른 대학 도서관은 도서관 전 4층에 빈틈없이 책들이 꽂혀있었고, 나는 그 책들을 보면서 인간 지성과 그 역사에 매일매일 감탄했다.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주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글을 써왔단 말인가. 책등만 봐도 황홀해지고 지적 영감으로 가득 차는 하루하루. 나는 나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고전을 부지런히 읽고 이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 읽기의 극적 전환을 이룬 것, 그리고 그 전환의 순간을 내가 명확하게 여전히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돌이켜봐도 내 인생에서 놀라운 지점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가 재밌고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3단계, 쓰기 위한 책 읽기
그러나 인간에겐 한계가 있는데 교양을 위한 책 읽기는 한계가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매번 그 사실을 통감해야 했고, 거기서 오는 괴리감에 무기력해지곤 했다. 점점 어려워지는 책들을 읽으면서 과연 내가 여기서 어떤 진실과 현실적 감각을 얻을 수 있는지 회의했다. 나를 다시 들뜨게 한 몇 권의 책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내 기억 속에 자리조차 갖지 못하고 사라진 책들 역시 많았다. 과연 내가 책을 읽는 건지, 책이 나를 읽는 건지 모르는 상황도 가끔 펼쳐졌다. 그럴 때면 나는 '책 읽기'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한계에 결국 굴복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실패감 끝에 떠오르던 결론은 책 속에서 답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답을 찾아야 한단 것이었다.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검증한 결론이었다. 책을 쓴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반증해주는 좋은 예시였다. 그들은 '나'를 찾아 책의 세계에 입성한 이들이었으므로.
그러나 책 읽기보다 더 적극적인 사고와 행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 '쓰기'다.자발적으로 쓴다는 것은 고문에 가까우므로 스스로가 내게 그런 벌을 내릴 일은 없었다. 쓰기가 '나'를 찾는데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면서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이유다. 그러니 나의 쓰는 일은 늘 강제적인 압박이나 청탁을 통해 이뤄졌다. 재밌는 점은 그런 강제적으로 고통스럽게 써 온 글들을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내가 된다는 점이었다.
나는 어디에 기고한 것,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마치 내가 나의 열혈 독자가 된 것처럼 찾아가 읽었다. 행여나 썼던 글의 내용이 까먹어 질세라 주기적으로 들어가 읽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다시 생각했고, 나란 사람의 빈틈을 찾아내며 아쉬워했다. 내 글은 나를 객관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그러다 요 근래부터 내가 아닌 세상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체화되지 않은 것들을 내 것처럼 말하려니 그만큼 곤욕스러운 것이 없었다. 그런데 쓰면서 읽은 것들은 그냥 읽은 경험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쓰기가 전제된 읽기는 나의 시선과 문제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쓰면서 읽은 것들은 나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에 살을 보태고, 가끔은 그것을 뒤흔드는 역할을 해주었다. 그저 읽으면서 좋은 문구를 맹목적으로 따오고 이해하려고 했던 것과는 달라야 했다.
그래서 며칠 전 내 머릿속에, 독서에는 3단계가 있겠구나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나의 지난 독서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흥미로써 읽었던 지난날과 교양을 얻기 위해 읽었던 지난날. 그리고 지금, 무언가를 쓰기 위해 읽는 오늘을 생각했다. 책 읽기의 목적이 달라지면서 내게 이뤄지는 변화도 곰곰이 생각했다. 과감히 독서의 가장 높은 단계는 '쓰기 위한 책 읽기'겠구나 란 판단이 섰다.
읽기, 그리고 쓰기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리고 그런 인간은 과연 다른 인간들보다 나은 인간인 건지는 확언할 수 없다. 그래도 읽고 쓰는 인간은 자기 이야기를 만들고 확인하는 완고한 인간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그리고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가끔은 당혹스러워도, 꽤 흥미로울 것이다. 마치 책 읽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