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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Aug 19. 2019

임산부 배려석을 둘러싼 도덕적 딜레마

"임산부예요?"

지하철을 타고 가는 중이었다. 객차 안은 한 두 사람만 서 있고 나머진 모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웠다. 내가 앉은자리는 임산부 배려석이 양 옆에 붙어있는 좌석 한가운데였다. 아주머니 한 분이 왼쪽 임산부 배려석에, 엄마와 같이 탄 학생이 오른쪽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었다. 맞은편 임산부 배려석은 비어있는 상태였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주말의 지하철이었다.


그러나 뒷칸에서 어떤 아저씨가 걸어 들어왔다. 아저씨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시더니 왼쪽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아주머니에게 대뜸,  "임산부예요?"라고 톡 쏘듯이 물어봤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아주머니는 아무 말도 못 하시다가, 아저씨가 다시, "임산부이냐고요?"라고 묻는 질문에.  "에구머니나. 임산부석이었네."라며 후다닥 일어나셨다. 아주머니를 기립시키는 데 성공한 아저씨는 다시 당당히 앞으로 걸어갔다. 내 오른쪽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학생은 아저씨가 오기 전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의를 실현(?)한 아저씨는 바쁜 걸음으로 다음 칸으로 사라졌다.


아저씨가 떠난 이후에도 일어난 아주머니는 많이 당황한 듯 보였다. 아주머니는 계속 자신이 의도하지 않게, 임산부 배려석 인지도 모르고 그 자리에 앉았다면서 크게 혼잣말을 하셨다. 누가 봐도 핑크색으로 덧 씌워진 임산부 배려석을 모른다고 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아주머니는 그 사실을 만회하려는 듯 더욱 유난을 떠셨다. 아주머니가 그 자리에 앉았을 심경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건너편에 앉았던 아주머니 중 한 분은, 당황해하는 아주머니에게 자기는 이제 내리니 이쪽에 앉으라고 다독였다. 아주머니는 괜찮다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직 대박이 남았다. 열차가 역에 정차하자 새로운 승객들이 객차 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비워져 있는 양쪽 임산부 배려석으로 승객들이 앉는 것이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서 호통을 들었던 아주머니는 다소 멍한 표정으로 배려석을 쳐다보았다. 이번엔 누구도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이 날 이후로 나는 임산부 배려석이 생각지 못한 갈등만 조장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다. 노약자석과 달리 임산부 배려석은 왠지 일반 좌석을 침범한 느낌이 있었다. 왜 임산부 배려석은 이렇게 도입되었을까. 그 경위와 이유를 아래 기사에서 찾아보았다.


문제는 노인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노약자석에서 임산부의 자리가 편안하게 확보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노약자석은 본디 노인과 교통약자를 위한 좌석으로 '장애인, 노약자, 임산부, 영유아 동반자'를 위한 좌석으로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약자석을 자연스럽게 '경로우대석'으로 여긴다. 정작 임신한 젊은 여성들이 이 자리에 앉을 엄두를 쉬이 내지 못한다.



지하철 임산부석 문제 어떻게 풀어야 하나?

여성이 임신을 하게 되면 신체적 정신적으로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들은 임신 기간 중 몸이 무거워지고 체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평소에 간단했던 일들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임신 기간 중 몸 관리를 잘못할 경우 유산이라는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임신부들은 일상생활에서 평소보다 더 많은 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승객이 가득한 지하철은 이것이 불가능한 공간이다. 인파에 떠밀려 제 한 몸 가누기도 힘든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임신부에게 착석은 매우 중요한 보호 방법이 된다.
기존에 임신부들은 지하철 객실에 빈 좌석이 없을 경우 가장자리에 마련된 노약자석을 이용하였다. 그런데 고령화가 진행되어 노인 비중이 늘어나다 보니 노약자석에 앉기 힘들다는 반응이 늘어났다. 특히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노인들에게 봉변을 당하거나 심지어 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올라오자, 임산부가 더욱더 노약자석을 기피하게 되었다. 노약자석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 지하철 임산부석 문제 어떻게 풀어야 하나?, 레일뉴스, 한우진(레일뉴스 칼럼니스트)




좌석의 공정한 분배와 임산부 배려석


지하철 좌석은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공공재다. 그러나 지하철 좌석은 한정적이다. 그러니 이 좌석을 어떻게 배분하는 것이 정의로운가에 대한 도덕적 문제가 떠오른다. 일단의 해답은 먼저 앉은 사람에게 권리는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규칙에는 '빠르게' 앉을 수 없는 사람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앉은 상태에서 지하철을 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늦게 탄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겠지만, 신체적 약함으로 손해 보는 사람들을 위한 세부규칙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노약자석의 도입이다.


노약자석이 생기게 된 규칙은 롤즈의 정의론에서 나오는 '무지의 베일(the veil of ingnorance)'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개개인의 특성을 없애고 모두가 어떤 위치인지 알 수 없는 상태를 전제한다면, 합리적으로 모두에게 이로울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노인일 수도 있고, 걷기가 좀 불편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좌석이 더 필요한 사람에게 일정 부분을 양보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롭다고 판단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논리로 문제없이 노약자석은 받아들인다.  


그런데 임산부 배려석은 여기서 초점이 조금 달라진다. '임산부는 여성' 뿐이란 점을 들어 상대적으로 남성들의 좌석에 대한 권리를 빼앗는다고 여긴다. 임산부 배려석은 그래서 쉽게 젠더 이슈로 비화된다. 임산부 배려석 지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예 그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노약자석도 이미 존재하고, 필요하다면 임산부가 자발적으로 배려를 요청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에서처럼 임산부는 새롭게 지정된 교통 약자가 아니다. 기존에 우리 모두가 인정한 교통약자이지만, 그 권리가 잘 지켜지지 않아 새로운 규칙이 필요해진 것뿐이다.



임산부 배려석을 향한 불편한 속내를 보여주는 사진 (출처 불명)


그리고 유의할 것은 노약자석이나 임산부 배려석은 원래 연령이나 성별이 분류의 기준이 아니란 점이다. 직관적으로 노약자석은 '어르신'을 위한 자리, 임산부 배려석은 임신한 '여성'을 위한 자리로 보일 순 있다. 누구나 늙어가기에 '어르신'을 위한 자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만 절대 '여성'이 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임산부 배려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무지의 베일을 쓰더라도, 성별을 가리지 못한 셈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여성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그렇게 태어난 사람은 없다. 그 부분은 순전히 '우연'의 영역이다. 그러니 우리는 무지의 베일을 '성별'에도 씌워야 한다. 당신이 어떤 특정 성별로 오랫동안 살아왔겠지만, 앞으로 태어날 그 누구도 '성별'을 선택할 수 없다는 점(아마 당분간은)이 중요하다.


교통약자를 위한 배려와 양보가 '노인과 장애인'에게는 해당되어도 '임신한 여성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면 해당 여성을 위한 자리가 배치되어야 하는 것이 필요한 규칙이 된다. 임산부에게 자발적인 양보에 기대라고 한다면, 똑같은 논리로 노약자석도 굳이 필요하지 않다. 리고 대체 아프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모두 힘들고 피곤한 시대에.



호통 친 아저씨는 과연 잘했나


나는 그날 임산부석에 앉은 아주머니보다도 아저씨의 행동이 더 불편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이유는 임산부석은 '배려'석이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자발적인 의사로 의해 비워두는 자리이지. 누군가가 강압하여 일어서라 마라고 할 수 없는 자리인 것이다. 아저씨의 행동은 아주머니에게 수치심을 주었다. 아주머니가 그만큼의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문제였는가는 아마 의견이 나뉠 것이다. 당연히 수치심을 느껴야 하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양보문화에 더 좋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양보의 이유가, 아주머니의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인지 '트라우마'에 의한 것인지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도덕적 결과를 추구한다 할지라도, 그 동기가 무엇인지도 중요하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이를 '처벌'하기 위해서, 임산부 배려석에 자는 사람을 찍어 올리는 행위가 불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히려 그 행동은 임산부 배려석에 양보를 더 하자라는 마음보다는 어느샌가 찍힐 것 같은 '두려움'과 '분노'를 자아낸다. 아래 사진처럼 남성이 옆 자리가 비어있음에도 의도적으로 그 자리에 앉는 것은 충분히 얄밉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고발하고 응징하려 하는 태도도 정의로워 보이진 않는다.



자율의 영역에 있는 양보의 가치를, 제도나 장치를 빌미로 강요하는 사람들은 너무 도구적인 것에만 매몰되어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임산부 배려석'을 지키는 것이 도덕이고 정의인 것이 아니라, '교통약자를 위한 배려와 양보'가 도덕이고 정의이기 때문이다. 임산부가 아니더라도 그 자리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앉을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임산부 배려석 외에는 앉을자리 없는 객차 안. 갑자기 어지럼증을 느끼는 사람은 앉을 곳이 필요한데, 객차 중 누구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규칙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규칙이 왜 필요했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왜 유독 '임산부 배려석'만 문제인가?


왜 그날 나는 호통치는 아저씨는 얄미워했으면서, 자연스럽게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버린 사람들에겐 불만을 갖지 않았을까? 나 역시도 은연중에 임산부 배려석은 특정 소수만을 위해 과도하게 낭비되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걸까? 지하철을 자주 타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비워있는 임산부 배려석이 아깝다는 생각을 품었을 것 같다. 왜 노약자석에는 불만을 가지지 않으면서, 임산부 배려석에는 유독 그런가?


위에서 말한 것처럼 '공정한 좌석 배분의 문제'가 '젠더 문제'로 비화된 점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불편한 지점이 있다. 노약자석은 객차 양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중간 좌석에 앉으면 양 옆으로 멀어진 노약자석은 잘 보이지 않는다. 노약자석의 이런 공간적 배치는 노약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 젊은 세대와 노령 세대와의 자연스럽게 구분 짓고 가시화한다. 당신이 노약자가 아니라면 그 자리에 누가 앉던, 앉지 않던 무신경해진다.


하지만 임산부 배려석은 보통 객차 중간에 배치되고 '선분홍색'으로 표시하여 명확히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눈에 띄 해서 임산부가 아니면 함부로 앉을 수 없게 만드는 장치인 셈인데, 동시에 그 빈자리를 더욱 크게 느끼게 한다. 어떤 객차에는 중간 좌석의 양옆으로 4개씩 임산부 배려석이 배치된 경우도 있다. 한 객차에 임산부 4명이 동시에 탈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될까? 이런 좌석의 배치가 사람들에게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더욱 불러일으키는 거라면, 보다 적정한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 좌석 배치를 고민해봐야 한다. 총 배려석의 숫자는 유지하되, 한량 당 임산부 배려석을 더 분산시키는 방향으로 말이다.  




노약자석이 늘어날수록 노약자는 앉을 곳이 없어진다?


천선영 교수는 지하철 노약자석이 공간적으로 분할되면서, "사회적 예의와 배려, 가치와 덕의 문제가 규범과 위반/일탈의 문제로 변환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노약자석이 '경로우대석'이란 인식으로 굳어져 그들 외에 젊은 사람, 즉 그 사람이 임산부라 할 지라도 은연중에 규범의 위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반면에 일반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노약자석을 핑계로 양보의 의무가 없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노약자석에는 노인들만 앉는 곳". "일반좌석에는 먼저 앉은 사람이 장땡 "이라는 암묵적인 규범은 좌석 공정하게 분배하는데 충분하지 않다.


결국 뻔한 이야기지만, 좌석의 개수나 배치의 조정보다 '교통약자'에게 인색한 우리의 양보문화를 지적하게 된다. 임산부든, 나이 드신 분들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자신의 자리에만 관심이 있던 우리들의 행동 말이다. 왜 자꾸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는 규칙들이 계속해서 생겨났을까. 이런 규제마저 없다면 자율적으로 양보하는 행동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한번쯤은 고개를 들어 내 앞에 누가 서 있는지 관찰해보자. 그리고 무작정 판단하지 말고, 무작정 비난하지 말고, 소통해보자. "여기 앉으실래요?"




참고자료:

천선영, 「'노약자석'을 통해서 읽는 공간의 일상 정치」, 2009


글. 김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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