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데오거리는 로데오경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
출장 차 경주를 방문한 저는 낯선 거리의 익숙한 이름 앞에서 잠깐 멈칫했습니다. '로데오거리'. 정말 오랜만에 만난 이름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추억 속 이름이었죠. 잠시 동안 로데오거리에 얽힌 추억들이 생각나면서 애틋한 마음에 빠졌지만 이내 20년 동안 묵혀둔 궁금증이 머리를 들었습니다. 로데오거리라는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고, 대체 한국에 로데오거리는 몇 개나 있는 걸까요. 그리고 경주 로데오거리에서 부천역 로데오거리의 향수를 느끼다니. 로데오거리는 왜 다 비슷하게 생긴 걸까요. 20년 묵힌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로데오거리의 유래를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뻔한 답일 거라 생각했지만, 엄청난 진실을 발견하고야 말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한국의 로데오거리 열풍은 압구정 로데오거리에서 시작됐습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유명 패션디자이너들이 명동에서 압구정으로 몰려들면서 패션 관련 상권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습니다. 이후 미용 관련 업종과 모델 학원들이 잇달아 들어왔고, 외국계 브랜드들이 국내에서의 성공을 가늠하기 위해 압구정에 파일럿 매장을 설치하면서 한국의 패션 문화를 선도하는 거리로 성장했죠. 이러한 거리의 특징은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가 밀집되어 있는 미국 비버리 힐즈(Beverley Hills)의 로데오 드라이브(Rodeo Drive)와 유사합니다. 즉, 로데오 드라이브를 본따 한국에서는 로데오거리라는 명칭을 만들어냅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구요.
그런데 왜 Rodeo Street가 아니라 Rodeo Drive일까요? 그리고 비버리 힐즈의 로데오 드라이브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걸까요? 한국어로 검색을 해보니 나무위키를 비롯한 여러 블로그에서 동일한 근거를 말하고 있더라구요.
(로데오거리는)테마거리의 명칭으로, 주로 젊은 소비층을 대상으로 한 상권들이 많이 들어서있는 번화가를 뜻한다. 어원은 동명의 경기인 로데오에서 유래되었는데, 2차 세계대전 이후 청년층 사이에서도 로데오가 인기를 끌자, 경기장 주변에 이들을 겨냥한 상설 할인매장이 등장해 거리를 형성한 것이 시초이다. 대표적인 해외의 로데오 거리로는 미국 LA 서쪽 베벌리힐스에 위치한 유명 패션 거리인 ‘로데오 드라이브’가 있다. 국내로의 유입은 1980년대 중반 명품 이미지를 내세운 서울 압구정동의 로데오거리를 시작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때 로데오의 ‘경기’는 빠지고 ‘거리’의 개념만 유입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https://namu.wiki/w/로데오거리
굉장히 그럴듯합니다. 그렇다면 비버리 힐즈가 대표적이라고 했으니 다른 도시에도 로데오 드라이브가 있겠네요? 그런데 찾아보니 그 수가 많지 않았고, 다른 도시에 위치한 로데오 드라이브도 비버리 힐즈의 로데오 드라이브를 론칭했다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즉, 로데오거리의 시초가 비버리 힐즈의 로데오 드라이브라는 얘긴데. 그렇다면 비버리 힐즈 주변 어딘가에서 로데오 경기가 열렸다는 걸까요? 의심스럽습니다.
의외로 답은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영어로 'Rodeo Drive'를 검색했습니다.
로데오 드라이브의 로데오는 투우 경기가 아닌, 'Rancho Rodeo de las Aguas'라는 스페인어로 된 비버리 힐즈의 옛 지명에서 유래했습니다.
스페인어로 rancho는 '목장', rodeo는 '둘러싸다', aguas는 '물'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영어로 'Ranch of the Gathering Waters', 물로 둘러싸인 목장이라는 뜻입니다. 콜드워터 협곡(Coldwater Canyon)과 베네딕트 협곡(Benedict Canyon)사이에 위치해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애초에 로데오 경기도 둘러싸다라는 의미의 rodeo와 연관이 있는 걸까요? 스페인어를 잘 하는 분께 물어보고 싶군요!)
질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비버리 힐즈는 미국에 있는 지역인데 왜 스페인어를 썼을까요? 여기에 답변하려면 꽤 옛날로 돌아가야 합니다. 18세기에는 현재 미국과 멕시코에 이르는 지역을 스페인이 지배하고 있었는데요. 1781년 "로스 뽀블라도레스(Los Pobladores)"라 불리는 44명의 정착민이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해당하는 새로운 지역을 발견하고 마을을 세웠습니다. 해당 정착민들은 스페인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고, 멕시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중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해당 지역은 멕시코의 알타 캘리포니아(Alta California)에 소속됩니다.
그리고 1828년에는 로스앤젤레스 정착민이었던 낀테로스(Quinteros)가(家)의 후손인 마리아 리타 낀테로스 발데스 데 빌리아(María Rita Quinteros Valdez de Villa)와 남편인 스페인 사람 빈센테 페르난도 빌리아( Vicente Fernando Villa)가 지금의 비버리 힐즈라 부르는 지역을 처음 발견하고 'Rancho Rodeo de las Aguas' 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던 중 1846년 멕시코-미국 전쟁(Mexico-America War)이 발발하고 1848년 전쟁을 끝내면서 멕시코와 미국 간 맺은 과달루페-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에 의해 로스앤젤레스를 포함한 캘리포니아 지역은 미국으로 귀속됩니다. 멕시코가 아닌 미국에 귀속되다 보니 당시 시행령(California Land Act of 1851)을 통해 소유권을 증명하면 멕시코인들이 갖고 있던 땅을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증명하지 못할 경우 공유지(public domain)로 넘어가도록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낀테로스가의 후손인 마리아는 해당 지역의 소유권을 지켜냈습니다.
마리아의 소유지였던 'Rancho Rodeo de las Aguas'는 스페인과 멕시코를 거쳐 현재 미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해당 정보를 찾아보다가 'María Rita Quinteros Valdez de Villa'의 이름으로 되어있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발견했습니다.(https://www.facebook.com/RitaQuinterosValdez/) 낀테로스가의 올바른 역사를 알리고 싶어 개설했다고 해요. 이 페이지에서는 마리아를 'The Princess of Beverly Hills'라고 부르며, 해당 지역을 미국 정부로부터 지켜낸 귀족 출신의 패션 리더이자 멋진 라틴(Latin)여성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854년, 마리아는 소유했던 지역의 일부를 벤자민 D.윌슨(Benjamin D. Wilson)과 헨리 헨콕(Major Henry Hancock)에게 팔았습니다. 이후 "산타마리아(Town of Santa Maria)"로 불리는 도시로 개발되기 시작했고 1906년에는 'Amalgamated Oil Company'의 버튼 E.그린(Burton E. Green)이 석유를 찾아 개발하기 위해 해당 지역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석유는 못 찾았고 도시에 공급할 수 있는 물을 발견했죠.
그러자 버튼은 1906년에 'Rodeo Land and Water Company'로 회사명을 바꾼 뒤 해당 지역의 이름을 지금의 이름인 비버리 힐즈로 변경합니다
버튼은 땅을 쪼개고 집을 지어 팔기 시작하면서 이후 본격적으로 부동산 사업으로 뛰어들게 되구요. 1907년에는 옛 지명인 로데오를 딴 도로인 로데오 드라이브를 비롯하여 도로들을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본격적인 개발로 비버리 힐즈의 땅의 가치는 점점 상승했고, 로데오 드라이브는 각종 상점과 주유소, 뷰티샵, 서점 등이 위치한 비즈니스 상업지구로 성장했습니다.
로데오 드라이브의 아버지(the father of Rodeo Drive)라고 불리는 프레드 헤이먼(Fred Hayman)은 1967년, 로데오 드라이브에 최신 유행 부티끄인' Giorgio Beverly Hills'를 건설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1968년에는 알도 구찌(Aldo Gucci)가 로데오에 샵을 열었고 1969년에는 'Van Cleef & Arpels', 1970년에는 'Vidal Sassoon salon' 등 차례로 명품샵들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후 로데오 드라이브는 지역 내 비지니스 지구를 넘어서 국제적인 수준의 명품과 패션 산업을 선도하는 상업 지구로 명성을 높여 갑니다. 이후 비버리 힐즈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로데오 드라이브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한국에서는 '로데오거리'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이죠!
혹시라도 로데오 경기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더 찾아봤지만, 관련 정보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에 알려진 유래처럼 로데오 경기장 주변에 상업지구가 있었을 수는 있지만, 한국의 로데오거리는 비버리힐즈의 로데오 드라이브에서 유래한 거니까요. 사실 제가 찾은 것들은 깊숙하게 숨겨져 있는 정보들은 아니었습니다. 영어로 된 위키피디아와 비버리 힐즈의 홈페이지에서 금방 찾을 수 있었죠.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왜 그렇게 알고 있었을까요? 정확한 정보가 부재한 상태에서 누군가가 '로데오'라는 단어에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로데오경기를 사용해 추측했을 것이고, 부정확한 정보가 검증 없이 그대로 확산된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로데오거리의 유래를 찾아보며 스페인 식민지 시대, 멕시코-미국 전쟁, 골드러시 등 다양한 시대적인 배경까지 알게 되서 재밌기는 했지만, 정작 쓰고자 했던 글은 뒤로 미뤄졌네요.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편에서는 한국의 로데오거리를 보면서 생각한 단상들을 이야기해보도록 할게요!
다음화 보러가기>> https://brunch.co.kr/@hildeandsophie/40
참고자료:
http://gangnam.grandculture.net/Contents/Index?local=gangnam
https://en.wikipedia.org/wiki/Rancho_Rodeo_de_las_Aguas
https://en.wikipedia.org/wiki/California_Land_Act_of_1851
http://www.beverlyhills.org/citymanager/aboutbeverlyhills/historyofbeverlyhills/
글. 오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