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으로 흥하고 저물어버린 거리들
지난 번 글에서 로데오거리의 유래를 힘들게 밝혀낸 끝에 드디어 제가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게 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로데오거리의 유래를 먼저 읽어보고 와주세요!
https://brunch.co.kr/@hildeandsophie/38
경주에서 로데오거리를 만나고 나니 대체 한국에 로데오거리가 몇 개나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역시나 정리된 자료가 딱히 없어서 정확한 수치는 알기 어려웠구요. 그리고 이전에는 로데오거리라고 불렀으나 소리 소문 없이 개명을 한 경우가 많더라구요. 그래도 대충 다음 지도로 검색해보니 46개의 로데오거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한 번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데오거리는 생략했습니다. 그리고 로데오타운, 로데오패션거리 등 변형된 명칭도 몇 군데 있었습니다.)
(서울) 압구정, 문정동, 천호동, 목동, 가산, 건대, 연신내, 문래, 용답동, 창동
(경기) 수원역, 안정리, 산본, 덕이동, 안산중앙역, 평촌, 철산, 분당, 병점, 부천역, 중동, 상동, 서현역, 의정부, 호수공원, 광주
(인천) 구월동, 송도, 부평
(강원) 설악, 원주, 춘천, 강릉, 양구
(충북) 충주, 성서동
(충남) 서산, 쌍용동
(대전) 궁동, 서구
(대구) 북문, 동성로, 범어
(부산) 해운대
(경남) 진주
충분히 많아보이지만 제가 조사하지 못한 곳이 훨씬 많을 것 같네요. 한국에서 로데오거리는 어떤 이미지였을까요. 1990년대 기사를 찾아보니, 1990년 7월 8일 동아일보 기사에 '허영의 별천지 <로데오 거리> 원피스 3백만원 블라우스 150만원'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 정도 가격의 옷은 아무나 살 수 있는 건 아니죠. 이후에도 '보통여심 주눅드는 로데오거리', '허영전염병 번지는 사치특구'와 같은 강렬한 제목의 기사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 사람들의 기사 제목 뽑는 센스란) 지금은 압구정 로데오거리의 상권이 많이 죽었지만, 당시만 해도 비버리 힐즈의 로데오 드라이브처럼 명품이나 고급 패션 브랜드로 유명한, 시대의 패션을 이끄는 거리였습니다.
압구정 로데오거리가 성공한 이후 다른 지역에서도 상권을 형성하기 위해 로데오거리라는 이름을 차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각 지역에서 언제부터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지, 시민들 사이에서 부르기 시작했는지, 행정적으로 지정했는지까지 찾아보기는 어려웠지만 뒤이어 만들어진 로데오거리는 압구정의 로데오거리와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후죽순 생겨난 로데오거리들은 명품이나 고가의 물건을 팔기보다는 해당 지역의 경제적 수준을 반영하여 형성되었습니다. 기존의 만남의 광장(?)보다는 훨씬 발달한 쇼핑, 먹거리 밀집지였지만,
압구정 로데오거리만큼의 다른 지역 주민들이 찾아올 정도의 규모로 발전한 곳은 몇 군데 없었죠. 이후 로데오거리는 도심의 중심지이자 '쇼핑할 수 있는 거리'의 대명사 정도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친구한테 "로데오거리가 경주에도 있더라, 여전히 전국적으로 많나봐. 이제 사람들이 별로 안 와도 딱히 없앨 필요는 없는거겠지?" 얘기했더니.
"근데 생각해보니까. 로데오길 그거 망리단길, 샤로수길
같은 거랑 비슷한 현상 아니야?" 라고 말하더군요.
역시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기 위해서는 대화를 해야하나 봅니다. 얼핏 생각해보니 압구정 로데오거리처럼 닮고 싶은 거리명을 차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로데오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더 이상 외국에서 말을 빌려오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한국 내에도 '힙'한 거리들이 충분히 넘쳐나고 있으니까요. 경리단길을 차용한 망리단길, 봉리단길 그리고 가로수길을 차용한 샤로수길 등이 이에 해당되겠죠.
김주일의 논문을 인용해서 이런 현상을 설명해보려고 합니다. 저자는 "~리단길 현상의 사회적 공간적 특성 연구 - 인터넷 트렌드 데이터와 입지 여건 분석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리단길이라 불리는 공간의 특성과 배경을 연구했습니다. 경리단길은 이름이 좀 특이하죠. 원래 '회나무길'이 정식 명칭이었으나 육군경리본부가 위치해 있어 주민들 사이에서도 경리단길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이제 육군경리본부는 이 자리에 없지만, 여전히 그 명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저자는 SNS를 통해 분석을 시도합니다. SNS에 따르면 약 2007년부터 경리단길에 레스토랑, 카페, 문화 공간 등이 생기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고 해요. 그리고 해시태그로 검색을 해보니 약 26개 지역에서 -리단길을 사용한다고 발견했습니다.(제가 다음 지도를 통해 로데오거리를 찾아낸 게 굉장히 올드해보이네요....) 경리단길의 유사 명칭이 최초로 나타난 사례는 2015년 대구 대봉동의 봉리단길이었습니다. 재밌는 점은 동네 이름 일부에 -리단길을 붙이다보니 같은 이름이 등장한다는 건데요. 대전의 봉명동 그리고 김해의 봉황동도 봉리단길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봉리단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리가 무려 세 군데나 있다는 겁니다.
-리단길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붙게 됐을까요? 저자는 이를 약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눕니다.
예를 들어 봉리단길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생긴 거리명이라면, '망리단길'은 기사를 통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2016년 6월 망원시장 인근에 신규 상권이 들어오면서 이를 '망리단길'로 표현하는 기사와 함께 해시태그가 급증했거든요. 저자는 망리단길은 미디어 주도형, 경주의 황리단길의 경우 상인 주도형, 문리단길의 경우 공공 주도형으로 분류합니다. 그리고 기존의 명칭을 변경하여 -리단길이 사용되는경우도 있는데요. 인천광역시 부평의 경우 로데오거리, 문화의거리 인근의 주택 골목을 평리단길이라고 부르면서 상권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유명한 거리 이름을 비슷비슷하게 만들어서 사용하는 걸까요? 먼저 "도시문화가 나타내는 자기 복제적 특성"이라 얘기합니다. 해당 거리가 본래 갖고 있는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유명세를 타고 있는 원본의 이미지를 그대로 복제해왔다는 것이죠. 로데오거리가 확장된 데도 동일한 분석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네 이름 뒤에 -리단길, 로데오거리만 붙으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해당 거리의 이미지가 바로 떠오르니까요.
-리단길이 로데오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활성화되어가고 있는 인터넷, SNS 이용 행태" 때문입니다. SNS를 통한 홍보효과가 영향이 높아지다보닌 검색과 공유에 유리한 명칭이 필요해집니다. 즉, SNS 상에서 이미 높은 인지도를 확보한 '핫플레이스'의 이름을 차용해서 검색에 걸리게 만드는 거죠. 저자는 이 현상을 2000년대 초반, 접속률을 높이기 위해 비슷한 여러 도메인이 만들어졌던 현상과 비교하고 있어요. 모바일 환경과 검색 포털사이트가 등장하면서 도메인은 더 이상 의미가 없지만, '-리단길'과 같은 유사한 검색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이용자들의 검색과 공유를 유도합니다. 특히 SNS를 통해 소비 문화가 확산되는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 현상과 맞아떨어지면서 '검색어', '해시태그'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로데오거리와 -리단길, -로수길 모두 이미 성공한 거리의 이미지를 복제했다는 점에서는 유사합니다.
하지만 로데오거리가 중심지에 위치한 '대형 상권'을 의미했다면
-리단길은 기존의 중심지를 탈피한 접근성이 낮은 지역에 위치한
'소규모, 개성형 상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인터넷과 SNS의 활성화로 가능한 변화였습니다. 획일적인 기존의 상권을 대체하는 색다른 상권에 대한 소비자층의 요구와 SNS를 통해 장소를 미리 검색해보고 찾아갈 수 있는 시대적 환경이 맞물린 것이죠. 저자는 새로운 유형의 대안적인 상권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보고, 기존의 대도심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가 변화하면서 주변부의 새로운 장소를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는 다르게 절망적인 현상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런 대안적 상권의 소상공인들은 몇 년 전부터 이슈가 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다른 공간을 발굴하여 조금이라도 유명해지면 곧 임대료가 오르고, 다시 다른 장소를 물색해야만 하죠. 이미 경리단길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많은 가게가 문을 닫았습니다.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주에는 황리단길과 로데오거리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위치해있습니다. 황리단길은 발 디딜 새 없이 북적거리는 반면 로데오거리는 비어 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로데오거리가 중심 상권이었고, 로데오거리에 들어가지 못한 소규모 상인들이 건너편에 자리를 잡으면서 지금의 황리단길이 생겼습니다. 소규모 상인들이 해당 거리를 특색있게 꾸며가면서 황리단길이 유명해졌고, 경주 주민들 외에 타지역 관광객들도 늘어났습니다.
그러자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해 임대료가 올랐고,
황리단길을 살려냈던 소규모 상인들은
역으로 로데오거리 쪽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계속 발생하면 황리단길도 사라질 수 있겠죠.
대안 상권들은 젠트리피케이션 문제 외에도 다른 문제를 겪기도 합니다. 동네에서 소규모로 몇몇 가게가 장사를 시작했다가 유명해진 경우에는 기존 주거지와 가까워 소음 문제로 주민들과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SNS로 인해 낮은 접근성의 한계는 극복했지만, 결국 그 동네만의 특성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접근성이 낮기 때문에 다시 방문하는 일 없이 잊혀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대안은 있는 걸까요. 접근성이 높으면 임대료가 비싸고, 접근성이 낮은 곳에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도록 만들어 놓으면 임대료가 오르고, SNS 해시태그에 걸리지 않으면 홍보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새로운 이름을 붙여 유명해졌지만 결국 동네만의 특색이 없으면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아 로데오거리처럼 '이름'만 남게 될테고. 임대료를 걱정하거나 유명해진 상권의 이름을 복제하지 않아도, 각자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미래가 과연 올까요?
참고자료 :
김주일, "~리단길 현상의 사회적 공간적 특성 연구 - 인터넷 트렌드 데이터와 입지 여건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도시설계학회 지 도시설계," 『한국도시설계학회지 도시설계』, 20(3), 2019. 한국도시설계학회
*혹시 제가 미처 찾아내지 못한 로데오거리를 더 알고 계시면 댓글을 달아주세요!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
글. 오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