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부 전투에서 힘 빼지 맙시다.
<주전장(主戰場)>은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와 비교해보면 제목에서부터 큰 차이를 보입니다. <낮은 목소리>(1995, 1997, 2000),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2009), <그리고 싶은 것>(2012), <눈길>(2015), <어폴로지>(2016), <귀향>(2016), <아이 캔 스피크>(2017), <허스토리>(2018), <김복동>(2019)까지. 한국에서 제작된 영화와 다큐는 당사자의 증언을 기반으로 하는 서사를 만들고 기록을 남기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가 왜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설득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토리와 서사를 넘어선 다음 단계에 대해 더 알 필요가 있습니다. <주전장>은 이 이야기들을 다룹니다.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영화에 '전쟁'이라는 제목을 붙이다니요. 이미 고무적입니다.
<주전장>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논쟁적 키워드를 하나씩 재조명합니다. 예를 들어 '200,000', '성노예', '강제징집', '사과', '책임' 등등 이런 단어들이죠. 키워드와 관련한 다양한 주장을 확인하고 여러 명의 인터뷰와 자료를 인용하여 해당 주장이 유효한지 확인합니다. 그래서 <주전장>에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스토리는 없지만, 사람들의 머리를 때리는 생각할 거리가 가득합니다.
이 영화를 강력하게 추천하는 이유는 각 측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주장이 '유효'한 지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위안부 문제에서 중요한 건, '일본군에 의해 위안소가 운영되었는지'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감독은 위안부 문제에서 밝혀내야 하는 명제가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핵심을 벗어난 논쟁이 많다는 걸 발견합니다. 위안부 문제를 부인하는 일본 측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증언을 번복하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위안부들은 자발적 매춘이었으며 정당하게 임금을 지급했기 때문에 성노예가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한국 측에서 말하는 위안부 숫자, 위안소의 위치 등이 증거가 없어 확인되지 않는 내용이라고 비웃고요. 이들은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위안부 피해자와 한국 정부의 주장은 모두 거짓이라고 얘기합니다.
일본의 주장이 본질을 흐트러뜨림에도 불구하고 한국 측에서도 비슷한 프레임의 방어를 합니다. 한국에서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주장은 위안부는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약 20만 명에 이르렀고, 모두가 자발적이지 않았고, 정당한 임금을 받지도 못했고, 노예와 마찬가지였으며, 많은 수가 미성년자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안부는 반드시 수가 많아야 하는 것도, 눈물 흘릴 만큼 비참한 스토리를 가져야 하는 것도, 놀랄 정도로 연령이 낮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확실하지 않거나 감정적인 스토리들은 오히려 일본 우익들에게 공격당할 지점을 제공합니다.
일본 우익은 일본군에 의해 위안소가 운영되었다는 증거 자료들이 잇따라 발견되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안부들의 증언 중 일부가 계속 번복되니 전체 증언이 유효하지 않다는 식으로 밀어붙입니다. 그러나 <주전장>은 여기서 묻습니다. 만일 일본의 주장 중 맞는 부분이 있다면 위안부는 '문제'가 안 되는가?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자면, 이 사실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일본군에 의해 위안소가 운영되었는가'입니다.
저 또한 위안부 문제를 접할 때마다 조금은 불편했던 지점이 있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만일 위안부가 정말로 20만 명이었다면 위안부들의 사연은 20만 개가 있었을 겁니다. 누구에 의해 위안소로 가게 됐는지, 자발적이었는지 비자발적이었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갔는지 모르고 갔는지, 돈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생활이 안정적이었는지 불안정했는지, 위안소에서 웃을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등등 아주 많은 개인의 사연들이 있었을 거예요. 당연히 위안부들의 증언은 개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후에도 한국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신의 기억을 거의 지우고 살아야 했을 할머니들의 증언 또한 매번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잊으려 애썼던 몇십 년 전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이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모든 게 달라도 같은 게 하나 있다면, 모두가 일본군이 운영한 성 노예제도인 '위안부'로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우리가 모든 위안부들이 순진했고 비자발적이었기에 매 순간 눈물만 흘리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들을 모독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여성이라는 주체들을 나약하고 비참한 존재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위안부들이 위안소에서 어떻게 반응을 하고 행동을 했건, 중요한 건 '일본군이 위안소를 운영하고 위안부들에게 성폭력을 가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법은 잘 모르지만, 법정 공방에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면. 확실하지 않은 사실은 확실하지 않다고, 알기 어려운 사실은 알기 어렵다고,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는 사례는 특별한 사례라고 얘기할 수 있다면 문제의 본질을 다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우익은 '우리는 위안부 문제에 동의한 적도 없지만 너네가 그렇게 해달라고 해서 보상해줬잖아!'라고 주장합니다. 이제 <주전장>은 일본 정부가 '사과라 할 수 있는 사과'를 한 적이 없음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을 확인한 후 다음 질문을 던지죠.
"대체 왜 일본 정부는 왜 위안부 문제를 없는 셈 치려고 하는가?" 증거도 확실하고, 명확히 위법인 사례를 일본 정부는 왜 그렇게까지 없는 문제로 치는 걸까요. 감독이 주장하는 바는 직접 영화를 보고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약간의 스포일러를 하자면 일본 정부뿐 아니라 한국과 미국도 등장하고요, 한국을 귀엽게 여기는 일본 우익 인사도 등장합니다.
저는 일본의 우익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얻기 위해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를 정말로 믿는다고 느꼈습니다.
이익을 위해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런 자들이 일본의 기득권층이라는 사실이 무섭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위안부 문제는 우리의 역사를 정당하게 회복하는 과정이겠지만, 그들에게는 일본이 다음 단계로 가려하는 데 있어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이처럼 <주전장>은 위안부 문제의 논쟁 지점들을 정리하고 현재 일본 우익의 '속셈'까지 꿰뚫어 봤다는 데서 의미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쟁점을 소개하고 다큐멘터리 자체를 한 편의 르포처럼, 논문처럼 논리적으로 구성하여,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사유해보고 판단해볼 수 있는 기회도 던져줍니다.
일본 우익들은 자본과 자원을 동원하여 유튜브와 여러 인물을 통해 한국이 주장하는 위안부 문제에 전혀 근거가 없다고 미국에 선전합니다. 한일 간 혹은 한국의 떼쓰기 정도로 위안부 문제를 축소시키는 거죠. 하지만 <주전장>은 위안부 문제가 오히려 한일 간 문제를 넘어서는, 넘어서야 하는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미키 데자키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쟁점들을 명확히 비교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 문제가 왜 이렇게 한·일 간에 꽉 막힌 논의가 됐는지 그 맥락을 보여주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일본뿐 아니라 한국도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일간의 문제가 아닌 인권 문제입니다”
감독의 말처럼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 문제를 넘어서 인권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아래 그림은 위안부 문제를 해석하는 여러 입장이 중첩되어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서 넣어봤습니다. 그림에 1번부터 7번까지 표시해뒀는데요.
한국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는 건, 나와 같은 국가에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공감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국가적 자존심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 한일 관계가 다시 안 좋아지면서 5번의 관점으로 위안부 문제를 보는 시각이 많아지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도 됩니다. 5번의 입장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순수한 소녀'로 재현하고 일본과 역사 공방을 벌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사람에 따라 전략적으로 지금은 5번에 집중할 때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여러분은 어디에 위치해 있으신가요?
일본뿐 아니라 한국의 가부장제 문화도 위안부 여성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여성인권 문제이자 전쟁과 분쟁지역에서 희생되는, 여성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향후 일본의 적합한 사과와 배상으로 한일 간 역사 공방 카테고리가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2번, 6번, 7번의 사례로써 위안부 문제는 유효할 겁니다. 위안부 문제는 비단 한국의 경험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앞으로 더 나은 사람과 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충분히 고통스럽지만 풀어야 할 숙제로 두고두고 남을 것입니다.
글. 오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