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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Mar 18. 2019

21세기에 읽는, '20세기의 봄'

공산주의 여성운동가의 삶,  소설『세 여자』

책 세 여자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의아했다.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던 세 명의 여자가 있었다고? 그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라고?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공산주의자, 여성운동가, 거기다 실화.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근대사의 굵직한 사건과 장소에서 빠짐없이 역사의 증인으로, 역사를 만드는 일원으로 존재한 사람들. 호기심이 생겼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했다. 


지금 보아도 세 인물의 여정로는 인상적이다. 허정숙은 일본과 미국의 뉴욕뿐 아니라, 러시아의 모스크바 그리고 중국 곳곳을 누비었고 주세죽과 상해와 모스크바로, 고명자는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모스크바나 뉴욕으로 가는 데에 1,2달은 족히 걸렸다고 하니 이들의 여정은 짧으면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이 걸린 대여정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하나의 계기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거슬러 간다. 체결 당시 한국과 미국은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제3국인 청나라의 관리가 서로의 말을 통역해주는 웃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이 조약의 12조에 ‘(생략) 5년 후 양국 관민이 각각 언어에 익숙하게 되었을 때 만국공법의 통례상 공평하게 상의하여 상세한 통장조관 및 규칙에 관하여 재교섭한다’는 내용이 덧붙는다. 조선은 이 조약의 문구 때문이라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게 된다.


고종은 조선보다 개화를 먼저 한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으로 사절단과 유학생을 차례로 보낸다. 한국보다 30여 년(1854년 가나가와 조약) 더 빨리 미국과 조약을 맺고 메이지유신이라는 근대화를 감행하고 있었던 일본, 이미 빌딩 숲을 이룬 뉴욕을 보고 온 고종의 사절단 일행은 이제 조선에도 서양식 근대화는 피할 수 없는 과제임을 느끼고 돌아온다.


최초 유학생 유길준 - 조선 최초의 국비유학생이었던 유길준은 1881년에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으로 83년엔 보빙사로 미국을 다녀왔다. 미국 유학 후 유럽, 인도양, 동남아시아 등을 유랑하고 조선의 개화 방향을 논한 책이 ‘서유견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근대교육은 외국어뿐 아니라 곧 근대식 학문을 위한 학교의 설립과 유학으로 이어졌다. 불행하게도 조선의 근대교육 정책은 제대로 꽃을 피우기도 전에 일본과 강제병합되어 멈추지만, 1910년 후반에 이르러서는 1세대 유학생이라 할만한 남궁억, 안창호 같은 이들이 근대식 학교를 세우며 지식을 본격적으로 확산했다. 또한 서양 선교사들이 1910년까지 전국 각지에 세운 학교가 이미 700여 곳이 넘게 된다.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는 이런 학교에서 근대사상과 외국어를 배운 이른바 ‘신여성’이었다.



허정숙이 다녔던 '배화학당(1929년 전경)' 배화학당은 기독교 전파와 여성교육을 목적으로 ‘켐벨’ 여성선교사가 1898년 설립했다  -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덕성학원(덕성여대의 전신)을 창립한 차미리사가 허정숙이 배화학당을 수학할 당시 기숙사 사감이었다고 한다.  (링크: 허정숙의 스승. ‘차미리사’ 위키피디아


소설 속 고명자의 어머니는 모스크바에서 다녀온 자신의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외국말은 중인 천 것들이나 배운다 했는데 그것도 다 옛말이니라. 요새는 양반 자제들도 다 외국물 먹는 시대 아니더냐. 우리 명자가 제법이구나.”  『세 여자』 1권 208쪽


독립운동을 위해 떠난 이들 중에 해외에 학교를 세운 이도 적지 않았다. 국내의 감시와 탄압 때문에 국내 활동이 어렵자 독립운동가들은 만주나 연해주에는 조선어를 배우는 거나, 독립군으로 훈련되는 학교을 세우거나 군을 창설했다.




공산주의자의 등장


태생은 프로이센이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활동했고 세계인임을 자부했던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마지막 글귀는 이렇게 끝난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917년 레닌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자 다른 나라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물론, 사회의 변혁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흥분되는 소식이었다.


이어 1918년 세계 1차대전이 끝난 뒤 각 민족 스스로 의지에 따라서 그 운명을 결정하는 권리를 보장하자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주권을 가지지 못한 민족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나라의 3.1운동도 민족자결주의의 흐름 아래 한민족의 자립권이 국제사회에 인정받을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민족자결주의가 1차대전의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해당하는 정치적 수사였음이 밝혀지자, 점차 국제사회의 여론에 기대기보다는 3·1운동으로 확인된 민중의 힘을 활용하고 제국주의와 상대할 보다 강력한 변혁의 도구가 필요함을 인식한다. 그에 적합해 보이는 시대적 사상은 바로 ‘공산주의’였다.


대개 3.1 만세를 부르고 조선 땅을 뛰쳐나와 상해에서 조선의 미래를 도모해보겠다는 청년들이었다. 청년들은 공부하러 상해에 와서는 공산주의활동가가 되었다. 공산주의는 제국주의와 싸우고 식민지에서 독립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보였다. 거기선 모든 민족 모든 계급이 평등했고 혁명은 무산자계급과 식민지 민족을 동시에 해방시켜줄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혁명의 국제주의란 식민지 청년들에게 매혹적인 캐치프레이즈였다.  『세 여자』 1권, 39쪽


세 여자의 이야기는 1920년 상해에서 시작된다. 3·1 운동과 러시아 혁명, 그리고 세계 1차 대전의 폐막. 시대의 변화와 새로운 흐름을 직감한 청년인 임원근과 박헌영, 김단야, 그리고 허정숙과 주세죽은 공산주의를 공부하고 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 일하기로 뜻을 세운다.


상해에서 꿈을 키우던 청년들에게 변혁을 위한 실제 행동으로 가는 전기가 되는 사건은 *코민테른의 국내 운동 진입 과제였다. 당시 조선의 공산주의자는 여러 파벌로 나뉘며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정작 국내에서는 그 활동과 세력이 약했다. 박헌영과 김단야는 국내에 들어가자마자 구속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이 겪지만, 조선공산당은 1925년 서울에서 비밀리 창당에 성공한다.


혁명을 제일 먼저 성공한 러시아 공산당은 국제공산주의자의연합, 이른바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을 운영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공산당을 창립하고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담당했다. 각 국에서 공산주의 운동가들의 불필요한 정파 싸움을 막기 위해 나라마다 공산당 한 곳만 인정했다(일국일당원칙). 공식 인정된 공산당에게는 코민테른은 각 나라에 좌익단체들에게 공작금, 무기를 지원하거나 전문가들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6·10 만세운동을 기획하는 등 독립운동을 위한 많은 활동도 하였지만, 주요 시기마다 일제에 발각되어 번번이 와해되는 시련을 겪는다. 소설 속 세 여자,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는 물론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같은 사람도 계속되는 체포와 구금을 피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의 공산당 활동이 곤란을 거듭하자 허정숙, 최창익과 같이 몇몇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공산당과 함께 무장투쟁을 시도한다. 하지만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원칙’에 따라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의 공산당에 합류하거나 국내에서 활동해야 코민테른의 인정과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소설에서는 중국 연안에 중국공산당이 운영하는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한 허정숙은 거기서 모택동과 아래의 문답을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선생님, 조선 땅은 만주와 이웃해 있는데 중국 대륙에서 일본을 몰아낸다고 할 때 조선까지 포함시켜서 생각하는 겁니까?”  
“허정숙 학생이로군요”하고 모 주석은 서두를 뗐다. 
 “중국 땅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이지요. 그다음은 한국인들의 투쟁에 열렬한 지원을 보낼 것입니다. 식민지가 된 대만이나 몽골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여자』 1권 385,386쪽


일찍이 우리나라 공산주의운동가들은 조선인이지만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한 자도 많았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했지만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었을 뿐 조선인 공산주의자는 중국공산당 내에서 외부자이기도 했다.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 김산을 다룬 책, 님 웨일즈 『아리랑』 (1941).  님 웨일즈의 남편인 에드거 스노우는 중국의 공산주의자를 취재한 『중국의 붉은 별』을 냈다. 님 웨일즈도 중국공산당을 취재 중이었지만, 김산을 만나 그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그를 주제로 책을 쓰게 된다.




어제의 동지, 오늘의 적


이제 이곳에 혁명가는 사라지고 정치가들만 득실거리는 것이다.  『세 여자』 2권, 137쪽


갑작스런 해방으로 일본이 물러나고 그 권력의 자리는 커다란 공백으로 남았다. 복귀한 운동가와 혁명가들은 응당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고 보다 큰 힘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에 기여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서로가 만들고 싶은 나라의 상은 달랐다.


한반도의 주 건국세력인 우익세력과 좌익세력이 크게 맞부딪힌 두 가지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탁통치 찬반논쟁’과 ‘한국전쟁’일 것이다. (참고: 신탁통치 오보사건 링크)  신탁통치 찬반논쟁은 일본의 점령지 문제를 다룬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소련은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원한다는 결정되지 않은 내용을 기사로 낸 동아일보 오보로 발화되었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신탁통치의 결정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신탁통치의 실시 유무와 그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 내용이 발표된 것이 없었다. 좌파는 신탁통치의 찬성을, 우파는 신탁통치의 반대를, 여운형·안재홍과 같은 중도파는 정세를 기다려보자는 신중파 입장을 취했다. 좌우파의 의견 대립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결국 남북이 각자의 독립된 정부를 추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좌우익의 완전한 결별. 그리고 여운형과 같은 조정자들의 사망. 남북한의 각개 정부 수립.


이어진 한국전쟁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을 남겼다. 안타까운 것은 내부 정치와 권력다툼으로 인해 누명을 쓰거나 오해받아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적군과 아군으로 철저하게 나뉘어 심판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 심판은 피난을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족 중 한 명이 어느 쪽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희생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남과 북에는 독재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정권을 장악하고,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4·19 혁명으로 무너졌으나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다. 정권의 공고함을 위하여 반대파는 사라져야 했다. 그 사이 남과 북에서 수많은 운동가의 이름이 지워졌다.


소설의 주요 인물들도 이 시기에 이르러 안타까운 결말을 맞는다. 주세죽의 첫 남편인 박헌영은 북한에서 숙청되고 이어 김단야는 러시아 땅에서 누명을 쓰고 숙청 당한다. 주세죽 역시도 카자흐스탄으로 유형 생활을 하다 끝내 죽음을 맞는다. 허정숙은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무장투쟁을 함께 해 온 동지 최창익을 잃는다. 그리고 여운형의 수양딸이라 불리며 여운형을 돕던 고명자는 한국전쟁의 시기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다.




발견, 그리고 역사


처음 소설의 실마리가 된 것은 허정숙의 발견이었다. 냉전시대를 통과하면서 우리 세대에 독립운동은 김구뿐이었던 것처럼 신여성은 나혜석뿐이었는데 허정숙을 처음 알았을 때 놀라웠다. 『세 여자』2권, 373쪽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 그리고 박헌영, 김단야, 여운형…. 소설 세 여자는 우리 역사책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인물들을 조명했다. 작가에 표현에 따르면 이들은 ‘글로벌 엘리트’이자 동시에 ‘혁명이 직업이고 역사가 직장이었던 사람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 시대에 혁명과 역사를 위해 일생을 투자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못했다.


1910년, 세 여자는 글자를 깨치지 시작한 어여쁜 소녀들이었지만 어느 결에 공중 납치된 나라의 국민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우리 집 마당을 쑥밭으로 만들어버리고 구둣발로 내 침실을 휘젓고 다닌다면 일상은 이미 깨지고 생활은 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 여자와 남자들은 삶을 역사에 ‘올인’했다. 한겨울 영하 20도에 허술한 차림으로 서울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걸어서 갔다. 재산을 챙기기는커녕 있는 재산도 버렸고 애인과 가족도 버렸고 더 버릴 것이 없을 때는 목숨도 버렸다.  『세 여자』2권 370,371쪽


허정숙은 한국의 ‘콜란타이’라 불리며 주체적인 연애와 결혼생활을 하기로도 유명했다. 3번의 결혼과 이혼, 남편 성이 다른 아이들 셋을 키웠다. 이후 북한에서는 선전부 위원장을 맡는 등 요직에서 활동했고 1991년에 생을 마감해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에서도 성공적인 말년을 누렸다.


* 콜론타이 (1872~1952) 참고 링크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에서 여성해방을 꿈꾸고 이를 위해 이룬 이론가, 조직가였다.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 ‘신여성’ ‘공산주의와 가족’등의 책을 냈다.


허정숙의 삶에서 조선의 스트레오 타입의 여성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다. 진취적이고 주도적이고 자신만만한 여성. 남자의 말에 순응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좇는 여성. 사회 혁명뿐 아니라 바로 오늘, 일상에서의 혁명을 이야기했던 사람들. 허정숙의 발견과 주세죽, 고명자의 이야기는 여성운동가들(김명시, 차미리사와 같은 사람들)를 발견하게 하고 혁명의 역사를 돌아보게 했다.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된 지 벌써 30년이 흘렀다. 하지만 공산주의 여성운동가를 이제야 발견하고 그들의 이상이 새삼 놀랍게 느껴지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 안에 지워진 것, 망각된 것이 많다는 것일 게다. 조선희 작가의 소설 『세 여자』는 그들의 일생을 추적하면서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의 굵직한 근현대사를 빠짐없이 그렸다. 작가의 말처럼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은 ‘역사’였다. 


세 여자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한 마음은 자신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역사에 살아냈던 인물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그 역사의 아이러니에 대한 아쉬움과 설명하기 힘든 경외감으로 남았다.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으나 뛰어난 역사서를 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소설은 내게 역사란 무엇인가 하고 되묻게 했다. 그에 유시민 작가의 답변을 빌려본다.


이미 살다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제 마음에 어떤 것이 남아요. 여러분들도 역사에서 사람을 들여다보면 각자에게 남는 게 있을 거예요. 역사를 공부하면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과 별로 소중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눈이 생겨요. 저는 그걸 찾기 위해 역사를 공부해요. – 유시민 (링크)



글.김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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