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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Mar 18. 2019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지않았던 여성들의 혁명을 위한 혁명

소설 『세 여자』

『세 여자』를 펼치자마자 유관순 언니가 떠올랐다. 나는 학생 때부터 유관순 언니를 기념하는 것을 유난히 불편해 했다. 이는 내가 기억하는 3.1 운동의 이미지가 '흰 옷 혹은 교복을 입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하며 거리를 덮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3.1 운동은 이런 느낌. © 독립기념관


3.1운동은 지역, 신분, 학력, 성별, 주도적인 운동가와 평범한 사람 등의 여러 구분을 떠나서 평등한 위치에서 모두가 독립을 외쳤던 사건. 누구나 독립을 외치고 함께 움직였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누군가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누군가는 독립운동에 회의적으로 변하고, 누군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지언정 다양한 사람들의 동시적 참여는 내게 설렘과 숙연함을 함께 가져다준다. 


그러다 보니 유관순 언니를 기억하라는 것, 그리고 유관순 언니뿐 아니라 특정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라는 교과서의 명령은 너무 불편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교과서가 골라준 이 사람을 특별히 기억해야 하다니. 이건 그 시절에 대한 기만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모두를 기억하면 가장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만일 내가 일제강점기 시절을 살았던 누군가를 특별하게 기억한다면 이는 목숨 바쳐 독립을 부르짖은 애국선열이어서가 아닌 다른 이유가 될 것이다.



그리고 『세 여자』에는 그 '다른 이유'를 가진 '세 여자'가 있었다


『세 여자』에는 제목처럼 세 여자가 등장한다. 세 여자는 당시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가담했었으며, 모스크바 등에서 유학한 이후, 조선공산당 창립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공산주의 계열의 여성독립운동가라니. 반골 기질이 다분한 나에게 『세 여자』는 마치 나를 유혹하는 '금단의 책'과 같이 느껴졌고 당연히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간 사람들은 독립이 오면(물론 절대 일제가 패망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떤 형태의 국가가 세워지리라 생각했을까. 고종의 장례일을 조선이 패망한 날로 여겼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립하면 '조선'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한반도 이남에 '대한민국'이 아닌 다른 형태의 나라가 들어선다는 게 감이 잘 안 잡히니까.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은 각 그룹의 성향에 맞게 독립 이후, 조선을 넘어선 사회를 상상하고 계획했다. 새로운 국가를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중 만주, 연해주, 상해, 동경, 모스크바 등을 무대 삼아 다녔던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공산주의 혁명을 꿈꿨다. 일제로부터 독립해 우리의 주권을 되찾은 다음, 소련처럼 계급이 해방되고 신분과 자본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 평등한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독립운동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이후 맞게 될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마음껏 상상하며 그 시기를 버티고 견뎠다.


여기까지는 다른 책에서도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세 여자』의 다른 점은 당시 공산주의 계열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혁명을 위해 해야만 했던 일상의 혁명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전국을 누비고, 동경, 만주, 모스크바, 미국을 돌며 학습하고 사랑하고 혁명했다. 그러나 당시 여성들은 지도부의 위치에 서는 것도, 경제적인 여건을 스스로 마련하는 것도 어려웠다. 콜론타이의 책처럼 자유롭게 사랑하고 연애하고자 했으나, 그때마다 사람들의 시선과 소문에 휩싸이곤 했다.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스스로 혁명가로 서기보다는 혁명가의 부인으로, 가정생활을 살피며, 동료들을 보살피는 자애로운 역할에 눌러앉아야 했다. 그나마 이 경우가 나았는지도 모르겠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은 어느 곳에서도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다.


여성들이 혁명을 한다는 것 자체가 혁명인 시대였다. 이들은 '계급을 해방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미래를 위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여성의 해방을 외치며, 온갖 제약이 많은 일상의 혁명'에 참여했다. 독립운동이라는 투쟁과 고된 억압과 더불어 동지인 남성들과 보내는 일상과도 싸워내야 했다. 이들이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조선은, 군주제의 왕조봉건사회일 뿐 아니라 가부장제와 유교 문화가 깊숙이 스며든 사회였다.


내게 세 여자는 교과서가 기억하라고 강요하는 '독립운동가'가 아닌 내가 선택한, 추억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세 여자』. 잊힌 혹은 반드시 기억하고 떠올려야만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한 번쯤, 아니 여러 번 만나고 싶은 매력적인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내가 그 시대를, 그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기억이 아니라, 추억일지도 모르겠다. 소설로 쓰인 그들의 삶을 읽는다는 건, 이미 그들을 만나본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그것이 소설의 생명력이며 힘이다. 지금도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혁명을 역사를 삶으로 살아온, 그곳에 그때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그들을 추억해 본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추억한다는 것은 그다음의 내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살아있는 힘이다.


『세 여자』는 1925년 당시 파격적인 단발머리를 하고 청계천에 발을 담그고 있는 세 여자의 사진 한 장이 시작이었다. 글을 마무리하는 이제서야 그녀들을 소개하려 한다. '이왕 한 번 사는 인생 이 언니처럼' 허정숙, '비운의 여주인공 st' 주세죽, '굳이 고된 삶을 선택한 엄친딸' 고명자. 이들의 삶을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내가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또 다른 '유관순 언니'를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당신들도 『세 여자』가 매력적이라 여겨지면 이들의 삶을 나와 함께 추억하시면 좋겠다.




글. 오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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