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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Oct 21. 2019

청년에게, 청년을,  청년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나이가 적다고 새 세대는 아니다

2007년 <88만원 세대>를 시작으로, 청년을 중심으로 하는 세대론이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치 영역에서도 '청년'을 조명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논의가 활발해졌습니다. 기성세대가 설명하는 청년의 특징이 아닌, 청년들 스스로가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목소리를 담는 책들도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청년'이라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은 같은 시간대와 연령대를 살아가지만 상당히 개별화된 존재들입니다. 하나의 그룹으로 묶을 수 없을 만큼요. 그런데도 왜 우리는 굳이, 청년의 프레임에서 청년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청년'을 벗어나는 방법


저는 80년대 생이기 때문에 나이로 청년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제 주변의 친구들을 보니 저와 또래이거나 저보다 어려도 스스로를 청년이라 부르지 않고, 사회적으로도 청년이라 불리지 않는 친구들이 있더라고요. 누구일까요? 결혼한 친구들 혹은 아이를 낳은 친구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아직도 젊지!”, “청년 맞아!”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사실 물어보면 스스로를 청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들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정책은 청년 정책이 아닌 신혼부부 정책, 아동 정책입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 청년의 기준은 결혼인 것 같아요. 지금보다 결혼을 빨리 했던, 80년대 이전에 출생한 세대들은 상당수가 결혼을 하면서 독립을 했습니다. 학업과 취업 때문에 20대 초반에 지역을 옮기지 않는 한, 부모님 집에 살다가 결혼을 하면서 독립을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청년 세대는 결혼 전에 독립을 하거나, 결혼 연령이 늦어지면서 부모님과 너무 오랫동안 살고 있죠. 그러면서 청년의 시기가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없던 종류의 사람들이 생긴 거나 다름없습니다. 교회 내 청년부에서 여전도회 혹은 남전도회로 올라가는 기준을 보면 결혼입니다. 그래서 늘 나이가 찼음에도 결혼을 안 한 언니, 오빠들이 청년부에서 늘 소외되고 민망해하던 기억이 납니다.    

  

청년들이 결혼에 대한 인식이 이전과 달라졌다고들 하시죠. 결혼 연령이 점점 늦어지고 결혼을 안 하기로 선택하는 경우가 늘어나기 때문인데요.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 시대가 변해감에 따라 결혼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경우, 둘째, 사회적으로 결혼을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경우입니다. 보통 어른들은 청년들이 결혼에 대한 생각이 바뀜과 동시에 결혼을 하기 어려운 환경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조금 다릅니다. 모든 청년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혼에 대해 달라진 청년들의 인식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청년들을 보면 저는 간혹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이미 어떤 의미에서 평범하지 않다는 거구나.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사실 제가 평소에 만나는 청년들은 창업을 했거나 소위 말하는 보편적이지 않은 직업을 갖는 경우가 많아서 세상이 정말 크게 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그런데 소위 말하는 이쪽 청년들이 아닌 중고등학교 동창들, 동네 친구들만 봐도 저희 부모님 세대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제 또래 중에는 여전히 때가 됐다는 이유로 결혼하는 친구들도 많습니다. 결혼을 못 한 친구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서른을 넘었는데도 결혼을 못해서 불안해하기도 하죠.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머쓱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여전히 사회적으로 결혼을, 미숙한 단계의 청년들이 성숙된 단계인 어른으로 넘어가는 통과의례로 보기 때문인 것도 같아요. 청년은 유예 기간인 거죠.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기성세대들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도 스스로도 재생산합니다. 아는 언니가 그런 얘기를 해요. 나이가 마흔이 다 됐는데,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사니까 아직도 또래들이 “부모님이랑 살아? 아니면 자취해?” 이렇게 물어본다는 거예요. 언니가 부모님 집에서 나와서 산지가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사람들이 ‘자취’라고 한다고 어이가 없다고 얘길 하더라고요. 이전의 생각에서 많이 벗어났지만, 가족을 이뤄야 과업을 해낸다는 생각은 기성세대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제 또래도 동일하게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요즘 시대’에 맞게 변한 게 있다면, 자기가 결혼하는 남자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증명해내려 한다는 거예요. 페미니즘이 확산되는 시점에서 그들이 하는 최선의 생각은 ‘나는 누구나 인정할만한 남성과 결혼하는 거야’와 ‘내가 기성세대의 인식대로 결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거야’거든요. 결혼한 또래 친구들이 모두 맘 카페에서 정보를 얻는데, 다른 엄마들이 남편 욕을 하는 사람보다는, 남편이 이렇게 저렇게 해서 화가 났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저는 나쁜 사람일까요?, 아이가 이럴 때 너무 속상해서 소리를 질러버렸는데, 저는 나쁜 엄마겠죠? 라는 글을 올린다는 거예요. 제가 H.O.T. 팬인데, 작년에 H.O.T.가 16년 만에 콘서트를 했거든요. 아이가 있는 친구랑 갔는데, 그때도 맘 카페에 “남편이 가는 걸 허락해줬어요. 애는 남편이 봐준대요. 하루만 자유부인이 되기로 했어요. 우리 남편 정말 최고예요.” 이런 글이 얼마나 많이 올라왔는지 몰라요. 청년들이, 제 나이 또래 친구들이 더 자신을 많이 돌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생각보다 세상은 평범하게 돌아가는 기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못 본 척하는 '청년'


그래서 저는 청년정책이 말하는 청년들이 좀 괴리감이 들어요. 제가 보는 ‘보편적인’ 청년은 때가 되면 평범하게 직장을 얻고 결혼하는 것이 꿈이거든요? 사실 건물주가 되어서 불로소득을 얻는 것이 가장 큰 꿈이기도 하죠. 그런데 청년정책에서 말하는 청년들은 가난하지만 남들과는 다른, 조금 튀는 개성이 있어야 하고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어야 하고 매우 노력해야 합니다. 정책뿐 아니라 언론이나 사회적으로도 이런 청년을 기본 값으로 두죠.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엄연히 말하면 모든 청년들이 꿈이 있거나, 그 꿈이 특별하지 않아요. 지금의 세대는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걸 할 수 없어서 좌절한 세대‘가 아니라, ’ 사실은 ‘특별한’ 꿈이 없는 세대‘ 에요.      


중고등학교 때 다들 희망 직업을 써서 내는데, 사실은  적어 낸 그 직업을 가질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자본과 계급의 문제인 것도 맞지만 공부든, 예술이든 상위 몇 퍼센트에 들지 않으면 하고 싶은 걸 할 수가 없어요. 그걸 할 수 있는 정원이 사회적으로 정해져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많은 수의 학생들은 악기를 배우고 싶어도 어차피 잘하는 사람이 넘쳐서 시도하다가 말거나, 고1 때 지금부터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면 고3 때 원하는 수능 점수를 얻을 수 있지만, 어차피 1-2등급 못 받을 거 그냥 시도도 하지 않거나 그래요.

      

물론 자본이 없고 계급이 낮아서 어릴 때부터 이를 배우지 못했으니 출발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데 출발점이 같다면, 어릴 때부터 시작한 학생이, 혹은 남들보다 잠을 덜 잔 학생이, 아니면 그런 능력을 조금이라도 타고난 학생이 결국 그 직업을 택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정원에 들 거예요. 그래서 학생들이 돈도 실력이라고 말해요. 어차피 기준은 돈이 아니면 능력이니까요. 그리고 돈으로는 어느 정도 능력을 살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어느 수준이 되면 그게 공정함일까요? 요즘 애들이 진짜 ‘노력’했냐를 엄청 따지지만, 사실 집중해서 노력하는 것 또한 환경이 되어야 배울 수 있는 일종의 습관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면 노력 운운하는 학생들도 조금은 가진 아이들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걸까요?      


최근에 계명대 최종렬 교수가 쓴 <복학왕의 사회학>이라는 책을 재밌게 읽었습니다. 지방대생이 갖고 있는 일종의 ‘결’을 다룬 책이에요. 만일 제가 서울에만 살았으면 이 책에 크게 공감을 못했지 싶어요. 운이 좋게도 최근에 2년 반 정도 대구에서 직장을 다녀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기회가 돼서 일하는 기간 내내 대학생들을 많이 만났어요. 대학 내내 취직을 준비하는 어떤 의미에서 평범한 학생들이었는데요. 경북대, 계명대, 영남대, 대구가톨릭대, 대구교대 학교의 학생들을 많이 만나면서 사업을 하다 보니 서울에 있는 학생들과 다른 마음가짐? 습관? 같은 걸 발견하게 됐습니다. 


이 친구들은 해도 안 될 것 같은 건 일단 잘 시도해보지 않아요. 스스로를 굉장히 낮추고, 뭔가 자신을 굉장히 부끄러워합니다. 이 책에서는 그걸 ‘성찰적 겸연쩍음’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 단어를 듣고 무릎을 탁 쳤어요. 지방의 대학생들은 시도도 하지 않고 열심히 하지 않는 자신의 삶이 지금 사회의 기준에서 보기에 좀 부끄럽다는 걸 알고 겸연쩍은 태도를 보인다는 겁니다. 이 책에서는 김홍중이 생존 주의 세대의 에토스로 지적한 ‘성찰적 수치심’에 빗대어 ‘성찰적 겸연쩍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사실 서울에 살아도 공부를 잘해본 경험이 없는 학생들 중 다수가 비슷한 태도를 보이죠. 인터뷰에 한 학생이 이렇게 대답해요. “어떤 도전을 하면 그 도전을 위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드는데 전 아직 그런 도전을 하기에는 너무 게으른 것 같고 노력도 없을 것 같고 뭔가 도전을 해도 실패가 보이는 것 같아요.” 이런 청년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여기에 도전하고 노력하는 것이 낯섭니다. 뭔가 다른 청년들이 도전하는 모습을 보며 대단하다고 여기고요. 어차피 안 될 거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수입이 보장된 직업을 선택해서 사는 것이 익숙해요. 이들은 무난하게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계급이 낮고 자본이 없는 환경에서 태어나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사회는 선발이 필요합니다.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때는 무엇이 공정한 선발의 기준이 될까요? 청년들은 이런 고민까지 하면서 공정을 얘기하고 있는 걸까요?      




'청년'에게 도래할 미래


저는 사람들이 모른 척하는 어쩌면 이기적인, 시대에 뒤쳐진 청년들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기성세대들은 청년들이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내고 글을 쓰는 소수의 청년들도 우리는 다른 대안이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대다수의 청년들은 결국 ‘모두’가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오지 않는다면, 적어도 ‘나’와 ‘내 자녀’만이라도 안정적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이전 세대들의 노력이 사회를 많이 바꿔왔지만, 지난 세대가 가졌던 가난에 대한 두려움과 안정에 대한 염원이 그대로 대물림되어 우리 세대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 두려움과 염원을 바꾸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70년대생, X세대라 불렸던 파격적인 세대가 지금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본다면 그걸 극복하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도 못했는데 밀레니얼 세대라고 해서 별반 다를까요? 최근 칼럼에서 그런 문구를 봤습니다. ‘나이가 적다고 새 세대는 아니다.’ 너무 동감이 됐습니다.      


‘북한’과 ‘평화’에 관한 이슈만 봐도 그렇습니다. 청년들은 국가가 만들어 온 북한에 대한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시각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그 시각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다가도 북한이 미사일만 쏘면, 이내 ‘그럴 줄 알았다’라는 말을 내뱉습니다. 청년들이 통일을 바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청년들이 이전 세대가 가르쳐온 북한 정부를 악마화하고 흡수통일을 주장하던 시각에 저항하고, 배움을 통해 사유하여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이익’에 혹은 좁은 의미의 ‘우리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라면 이전 세대가 생각하는 방식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청년들은 자꾸 미래가 오지 않을 것처럼 지금의 어려움만을 호소하지만 그러다 보면 청년들이 기득권이 됐을 때, 많은 청년들이 손가락질하는 기성세대처럼 우리도 그저 내가 가진 것을 지키는 데만 힘을 쏟게 될 것입니다. 청년들은 내가 살고 싶은 사회가 어떤 곳인지, 그러기 위해 내가 지금 혹은 기득권이 될 때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지금부터 배우고,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시작한 청년들도 끊임없이 성찰해야 할 것이고, 오늘 소개한 이런 흐름 안에 있지 않은 청년들도 함께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시기를 보내는 사람을 ‘청년’이라 한다면, 저는 그제서야 ‘청년’ 담론에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 오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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