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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Dec 02. 2019

일본이 전쟁을 멈춘 진짜 이유

하세가와 쓰요시, <종전의 설계자들>, 메디치미디어, 2019.

내용이 많지만 잘 정리된 것이 분명한, 두꺼운 책을 펼칠 때 드는 설렘이 있다. 히세가와 쓰요시의 <종전의 설계자들: 1945년 스탈린과 트루먼 그리고 일본의 항복>(한승동 역, 메디치미디어, 2019)이 그랬다. 이 책은 미국에서 2005년에 <Racing the Enemy>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되었고, 곧이어 일본에서 2006년, 2011년 두 차례 개정되어 <暗鬪(암투)>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종전의 설계자들>은 2011년 일본판을 번역한 책이다. 7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은 많은 양의 논의를 담고 있지만 친절하다. 각 단원을 시작하기 전, 연표를 제시하는데 초반에는 연도 별로 제시되던 연표가 곧 월 별로, 1945년 4월 이후부터는 일 별로 정리된다. 챕터별로 나뉜 일자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상세히 서술된다. 저자의 노력에 부응하며 나 역시 애플 펜슬과 아이패드를 들었다. 요점정리를 하면서 읽어야 하는 책을 만났을 때, 나는 펜과 종이 혹은 애플 펜슬과 아이패드를 든다.  아. 이 책을 다 읽은 뒤에 내가 알게 될 그 무엇이 너무 기대됐다. 이것이 바로 두꺼운 책을 읽는 기쁨 아닌가!



 언뜻 보기에도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의 문제제기와 가설은 뚜렷하다.
일본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때문에 항복했을까?



두 차례 원폭 피해를 경험한 일본은 더 이상 큰 피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항복을 선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저자는 새로운 가설을 주장한다. 바로 "소련의 참전"이 일본의 항복에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것이다. 책의 앞부분에서 해당 가설을 읽으며, 사실 나는 태평양전쟁에서 소련의 역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전 이후 한반도 북부 지역을 소련군이 주둔한 것을 떠올려보면, 태평양전쟁에서 역시 소련의 참전이 중요한 것이었을 텐데. 나는 왜 이 전쟁에서 소련의 역할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을까. 소련은 언제 참여한 거지? 이 지점이 가장 흥미로웠다. 내 질문을 풀어나가는 방향으로 책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1945년 8월 8일로 돌아가자.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참전을 알려오다.


8월 8일은 소련이 일본과 소련 간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소련 주재 사토 일본 대사에게 알려온 날짜다. 이후 8월 9일 0시 소련은 만주지역 침공을 시작했다. 8월 8일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의 7일 전, 그리고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8월 6일의 이틀 후였다. 지금 돌아보면 전쟁이 다 끝나가는 시점. 이 시점에 소련은 다급하게 참전했다.


소련이 참전한 이유를 이해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소련은 공산주의 혁명 이전부터 안전보장의 명목으로 계속 극동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1924년 집권한 스탈린이 극동지역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특히 스탈린이 신념이나 이데올로기보다 '지정학적 사고'에 의해 결정하고 움직였다고 강조한다. 스탈린이 점령하고자 한 문제의 땅은 일본열도 최상단 홋카이도와 맞닿아 있다. 사할린과 쿠릴열도다. 한 번쯤은 들어본 그곳!


쿠릴열도의 소유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은 아직도 분쟁 중이다.


당시 사할린과 쿠릴열도의 소유권은 어디에 있었을까. 먼저 사할린을 살펴보면, 일본이 에도 막부 시절부터 사할린을 점령한 역사가 있지만. 1875년 러-일 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맺으면서 사할린은 러시아의 영토로 귀속됐다. 이때 일본은 사할린을 내주면서 쿠릴열도를 소유하게 된다. 그런데 1905년 러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남부 사할린 지역을 가져오게 되고, 러시아 내전이 일어난 틈을 타서 1918년부터 1925년 사이 사할린 섬을 점령한다.


스탈린은 당연히 사할린과 쿠릴열도를 모두 러시아의 영토로 귀속시키고 싶어 했으며, 사실 홋카이도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를 위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해당 지역에 대한 권한을 가져야만 했다.


미국, 소련에게 사할린과 쿠릴열도에 대한 권한을 약속하다.


1941년 12월 일본이 미국의 영토였던 진주만을 침공하면서 본격적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소련이 참전하여 만주지역에서 일본군의 발을 묶어주기를 바랐다. 1943년 11월 테헤란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 정상회담에서 소련은 독일 항복 이후 대일 전쟁 참여를 약속했다. 이에 대한 대가로 미국과 영국은 소련에게 다롄(대련), 남만주철도 소유 권한을 넘기고 남사할린과 쿠릴열도를 '반환'할 것을 약속했다. 이후 유럽에서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독일도 패전할 기미가 보이자, 1945년 2월에 영국, 미국, 소련은 얄타회담을 열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관리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스탈린은 루즈벨트가 약속했던 영토를 여전히 보장할 지 두려워했지만, 루즈벨트는 얄타밀약을 통해 남사할린을 소련에 '반환'하고 다롄에 대한 소련의 '우선적 이익' 옹호, 뤼순 조차권을 소련이 회복할수 있도록 한다. 남만주철도도 중국과 소련이 공동운영하되 소련의 우선적 이익을 보장하기로 했다. 그리고 쿠릴열도는 소련에게 '인도'하는 것으로 약속했다. 물론 대전제는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독일이 패전한 뒤 2-3개월 내에 참전할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의 영토를 침해하는 것이 될 수 있으므로 미국은 소련이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인 장제스의 동의를 얻을 것을 전제로 한다.


스탈린은 해당 회담 결과에 굉장히 만족하면서 기뻐했다. 스탈린은 이때부터 얄타밀약의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중국과의 협상을 우선적으로 둔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루즈벨트였는데, 루즈벨트는 비교적 소련에 우호적이었다. 소련 주재 미국 대사였던 해리먼은 폴란드 등 동유럽에서 세력을 확대하려 하는 소련의 의도와 움직임을 우려하고 경계했다. 그러나 1945년 4월 12일 루즈벨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이어받는다. 트루먼은 해리먼의 의견을 수용했으며, 소련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얄타회담에서.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



일본과 소련은 중립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1941년 4월 일본과 소련은 중립조약을 맺었다. 만주를 점령하고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에게 소련을 적으로 두는 건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소련이 독일과 전쟁에 돌입하자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은 독일도 소련도 적으로 둘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이에 일본은 소련과 서로의 전쟁에 중립을 지키고 서로의 영토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중립조약을 맺는다. 해당 조약은 5년 간 유효하고, 문제가 없을 시 5년간 자동연장되는 것이 조건이었다. 조약대로라면 해당 조약은 일차적으로 1946년까지 유효했다. 이에 일본은 독일과 소련 간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고, 소련도 태평양 지역에서 발발한 미국과 일본의 전쟁에 끼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은 혹시라도 소련이 참전할 것을 두려워하며 남사할린 영토 등을 들먹이며 소련의 이익을 보장하겠다고 설득해왔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이 소련에 제시한 조건에 비하면 일본이 제시한 조건은 굉장히 미약했다. 소련은 미국과 일본이 내밀어 온 협상안을 저울질하며 매우 전략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에도 종전을 주장하던 세력이 있었다.


일본 내부에서도 전쟁의 기세가 기울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1944년부터 종전 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천황의 입장, 내각의 입장, 군의 입장이 모두 달랐고. 각각에서도 다른 안이 나온다. 크게 '일격화평론'과 '화평론'으로 나눌 수 있다. '일격화평론'은 전쟁을 끝까지 버텨 정전협정을 맺으면 일본이 원하는 것을 최대한 보장 받을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반면 화평론은 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최소한으로 '국체호지, 황실의 안태'를 보장받고 종전을 하자는 입장이었다. 1945년 5월 11일 일본은 '최고전쟁지도회의'라는 조직을 만들어 종전을 의논하기 시작한다.


일본은 두 가지 면에서 종전을 의논했다. 먼저, 항복을 선택했을 경우 천황제를 어디까지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을지가 핵심적인 논의 사항이었다. 천황제 유지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국체호지'와 '황실의 안태'를 나눠서 이해해야 한다. '국체호지'가 천황이 통치하는 '절대통치론'을 의미한다면, '황실의 안태'는 말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천황의 존재, 황실의 존재를 보장받는 것을 말한다. 일본의 내각과 군은 천황이 통치하는 체제를 포기하더라도 '황실의 안태'를 지키면 된다는 주장과, '국체호지'도 당연히 수호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뉜다. 천황의 존재를 '신'의 위치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국체호지'를 포기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 등 연합군과 여론은 독일의 나치처럼 일본의 천황제를 바람직하지 않은 체제로 보고 천황제를 폐지하는 '무조건 항복'을 주장해왔다. 반면 일본 민족의 근원이 천황제인만큼 이를 건드릴 경우 후에 일본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오히려 나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소수의 입장도 있었다.


두 번째로, 소련이 참전할 것인가에 대한 예측이 논의의 중심이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일본 내 대부분의 세력은 소련이 중립조약을 지키고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잘못 예단한 것이다. 소련의 참전에 대한 대비는 부족했고, 당시에 천황은 소련의 알선을 통한 종전 공작을 승인할 정도로 일본은 소련의 의중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소련은 8월에 만주 침공을 잠정적으로 결정한 상태였다.



마음이 바뀐 미국, 소련의 참전을 막아야 한다.


트루먼은 루즈벨트와 달리 소련의 참전을 막고자 했다. 소련은 7월 17일, 독일에서 열린 포츠담회담 전까지 중국과 협정을 맺지 못해 얄타밀약의 조건을 완성시키지 못했다. 당시 포츠담 회담에는 미국, 영국, 소련이 참여했다. 소련은 8월 15일 정도에 참전할 것이라 말하면서 연합군 측에서 참전을 다시 한번 요청해주기를 바랐지만, 미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만 트루먼은 '신무기' 개발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스탈린에게 살짝 흘린다. 트루먼은 동아시아에 소련이 개입할 경우, 상황이 복잡해질 것을 우려했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담은 포츠담 선언의 서명자에서 스탈린을 배제시켰다. 스탈린도 포츠담 회담에 참여했는데 말이다. 중국의 장제스와 영국의 처칠의 승인을 받은 포츠담 선언은 27일 일본에 전해졌다. 일본은 공식적으로 해당 선언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 스탈린의 서명이 없는 것을 보고, 소련과의 협의를 통해 보다 나은 종전 조건을 만드려 계획했다. 그리고 포츠담 선언으로 일본 국내 여론이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스즈키 총리는 비공식적으로 이 선언내용에 침묵할 것을 선택한다. 이러한 태도를 본 미국은 일본이 포츠담 선언에 대한 공식적인 거부 의사가 없었음에도, 일본이 '무조건 항복' 수용 의지가 없다고 해석한다. 이후 트루먼은 원폭사용을 승인했다.



포츠담회담에서. 왼쪽부터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


미국의 시간표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소련은 참전을 앞당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7월 30일 바실렙스키를 극동 총소련군 최고사령관에 임명하면서 전쟁을 비밀리에 준비시켰다. 트루먼은 31일, 원폭 투하 이후 발표할 성명의 원안을 승인했다. 트루먼은 소련이 참전하기 전 전쟁을 끝내는 것을 최우선에 뒀다. 트루먼이 원폭까지 사용한 원인이 무엇일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다. 트루먼은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해서는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혹은 연합군이 더 많은 피해를 입기 전에 전쟁을 빨리 마쳐야 한다고 생까했을까? 그러나 미국은 일본이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대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저자는 미국이 원자폭탄까지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원자폭탄을 사용해 항복 시기를 앞당겨, 소련의 참전을 막고자 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8월 6일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틀 뒤인 8월 8일 소련은 사토 대사에게 중립조약 파기와 전쟁을 선포하고 8월 9일 자정, 만주 지역에서 공격을 개시한다. 소련의 이같은 행동에 트루먼은 굉장히 당황했다. 이는 트루먼의 계획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소련의 참전은 일본이 종전을 결심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였다.


8월 6일 원자폭탄이 투하된 뒤, 일본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무기에 대해 국제법으로 대응하자는 입장, 전쟁을 종결하자는 입장 등 다양한 의견이 제기된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는 등의 본격적인 종전의지를 표명하지는 않았다. 히로시마에서 이미 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즉사하고, 도시의 80%가 붕괴됐지만 정부는 그것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트루먼도 원폭 피해정도에 대해서는 원폭이 터지고 일정 시간이 지나서야 보고를 받는다. 원자폭탄의 위력은 그의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나 원자폭탄에 무디게 반응했던 일본은 소련이 만주에서 공격을 개시했다는 소식에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천황은 즉각 포츠담 선언 수락을 통한 전쟁종결을 결의한다. 마지막까지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참모차장 가와베 도리시로는 "소련이 마침내 일어섰다! 내 판단은 틀렸다!"고 외쳤다.


저자는 일본이 즉각 항복을 선언한 건
결정적으로 원자폭탄의 위력 때문이 아닌 소련의 참전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8월 9일에 즉각 최고전쟁지도회의와 각의 회의가 반복적으로 열어서 포츠담 선언의 '조건'을 어떻게 수용할지에 대해 긴박하게 논의했다. 해당 논쟁은 내부 분열에 가까웠다. 특히 일본군과 내각의 의견이 크게 갈렸고, 합의를 보기가 어렵자 내각은 비밀리에 천황을 면담하여 설득했다. 천황제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포츠담선언 수락 회답을 발신했고, 일본군의 반발을 우려해 군을 거치지 않고 연합군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의 안을 곧장 수락하기 어려웠고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번즈의 의견에 따라 아래의 내용을 추가하여 다시 회답한다. 제1항 “일본이 항복한 때로부터 천황과 일본 정부의 국가통치 권한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에 종속된다”, 제4항 “궁극적인 일본의 국가체제는 일본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한 의사에 따라 정해질 것” 해당 회답에 대해 천황은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한 의사'라는 표현에서 "국민이 황실을 지지한다면 황실의 안태(安泰)도 더욱 견고해질 것이므로 국민의 자유의사 표명을 통해 결정하는 것은 명백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언명"하며 이를 수용하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 일본은 천황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소련의 참전부터 8월 15일 방송을 통해 천황의 '성단'으로 항복을 선언하는 날까지 약 6일 간의 시간 동안 내각과 군은 혼란을 겪었다. 쉽게 종전을 수락하기 어려웠던 일본군 중 일부는 황궁을 점거하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포츠담선언에 따르면 종전은 일본군의 즉각 해체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쿠데타는 금방 진압되었고, 육군대장 아나미가 할복함으로써 일본군부는 해체되었다.


항복 방송을 녹음하는 천황



그러나 소련은 멈추지 않았다.


8월 11일 소련은 한반도 북부 청진까지 들어온다. 미국의 한반도 단독 점령은 불가능해졌다.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이후에도 소련은 계속 전진했다. 8월 11일 사할린 침공에 이어, 8월 15일에는 만주 중앙까지, 8월 18일부터는 쿠릴열도에 상륙하여 계속 영토를 점령해나갔다. 홋카이도 침공까지 계획했다. 소련의 추가 침공은 준비도 미비하고 급하게 이루어졌지만, 이미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뒤여서 일본은 제대로 방어할 수 없었다. 9월 2일 일본이 정전협정에 서명한 이후, 9월 5일이 되어서야 쿠릴열도에서 소련의 전진은 멈췄다. 전쟁은 그제서야 완전히 끝이 났다.






모든 참전국은 승리를 위해 가능한 많은 자원과 군인을 투입한다. 그리고 투입한 만큼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 상대적으로 다른 참전국에 비해 많은 것을 확보할 때까지 싸운다. 이 책은 전쟁에 대해 참전국 모두의 책임은 표명하되 일방적으로 한 국가의 '탓'은 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참전국이 어떤 자원을 투자하고 희생하면서까지 무엇을 보장받으려고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성공적인 종전 설계안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모든 참전국은 최대한 많은 것을 파괴해야 했고, 최소한의 것만 보장 받았다. 그리고 미군의 동아시아 주둔 문제, 러-일 간 쿠릴열도 분쟁, 분단체제로 인한 한반도의 갈등 등을 보면 그 전쟁은 포격을 멈췄을 뿐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듯 하다.


태평양전쟁 종결 드라마에는 영웅도 없고 악인도 없다. 이에 관여한 지도자들은 살아 있는 인간들이었다. 바꿔 말하면, 태평양전쟁은 각자의 욕망, 공포, 허영심, 분노, 편견을 지닌 채 결정을 내린 인간들의 드라마였다. 하나의 결정이 내려질 때마다 그 뒤의 결정을 위한 선택지가 좁혀졌다. (중략) 지도자들은 다른 결정을 내리고 다르게 종결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p. 518)



이 책은 어떤 장면에서도 전쟁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치열하고 긴박하게 상황을 그린다. 종전에 얽힌 일-미-중-소를 넘나드는 다양한 인물의 심리를 묘사할 정도의 자세한 고증과 다량의 문헌은 쫓아가기에도 버겁다. 그럼에도 매끄러운 번역이 이해를 돕는다. 저자의 주장에 반하는 다른 학자들의 의견도 소개하고 있어 다른 시각으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역사 상 가장 많은 피해를 주고받은 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 그 하루하루를 되짚으면서 알고 싶다면 강력 추천한다.




글. 오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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