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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Dec 17. 2019

책이라 부르니 책이 되었다

책의 변천과 그 미래


지난번 아이패드와 전자책 관련 글을 쓴 후 책의 역사와 미래에 대해 더 알고 싶었는데, 좋은 책을 발견했다. 애머런스 보서크가 쓰고 노승영이 옮긴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 책> (마티, 2019)이다. 방대한 정보를 깔끔하고 맥락 있게 잘 정리한 이 책은, 책에 대해 아주 편협한 생각을 갖고 있던 나를 조용히 타일렀다.



책은 내용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내게 책은 정보와 내용을 담고 있는 물건이다. 사물로서의 책은 무게와 가독성만 좋으면 된다는 것이 내 지론. 19세기-20세기에는 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독서(또는 청취)에 이바지하는 물질적 자원이 없거나, 읽힐 수 있는(또는 청취될 수 있는) 환경 없이 텍스트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저자는 책을 쓰는 것이 물론 아니다. 그들은 텍스트를 쓰고, 그 텍스트는 씌어진-원고에 씌어지고 비석 등에 새겨진, 인쇄되거나 오늘날에는 정보화된-물건이 된[다].  로제 샤르티에와 굴리엘모 카발로 <읽는다는 것의 역사>" (p. 44)


1440년 경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책이 쏟아져 나왔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았다.(참고로 이 책에서는 당시 인쇄술에 대해서 꽤나 자세하게 다룬다. 이해하기 어려운 편이지만 굉장히 흥미롭다.) 책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건 19세기. 공교육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의 문화적-지적 소양을 키우는 수단으로 책이 등장했고 지식에 굶주린 독자층을 위해 출판업자들이 고전을 저렴한 가격으로 재출판하기 시작했다. 책은 더 이상 귀족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수요의 증가와 함께 인쇄와 관련된 각종 기술의 발달, 산업화로 인한 인쇄 비용 하락, 출판업자들의 가격 전쟁 등으로 책의 저가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인쇄술은 인쇄기 외에도 제지기, 연판 제작, 활자 주조, 식자, 제본기 등 여러 기술을 필요로 한다.)


20세기, 드디어 지금과 비슷한 잘 만든 평범한 책이 등장했다. 당시 책의 디자인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독일의 서체 디자이너 얀 치홀트(Jan Tschichold)는 1947년 펭귄 출판사의 페이퍼백(Paperback) 디자인을 시작했다. 치홀트는 가독성과 접근성을 중심으로 잘 만든 평범한 디자인이 책의 필수 요소라고 믿었다. 그에게 페이지와 타이포는 그저 텍스트를 위해 동원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얀 치홀트 외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디자이너들은 많았다. 비어트리스 워드는 자신의 책 <크리스털 잔: 인쇄는 보이지 않아야 한다>에서 책을 "과도한 장식과 으스대는 타이포그래피를 배격"하고 페이지를 텍스트를 담는, 투명한 그릇으로 표현했다.


얀 치홀트가 디자인한 펭귄 페이퍼백 시리즈


"20세기에 유행하던 책에 대한 관념 - 책은 사상, 아이디어, 이미지를 한 정신에서 다른 정신으로 전달하며 서체 디자이너, 책 디자이너, 인쇄업자, 출판업자의 임무는 이 아이디어를 최대한 투명하게 전달하는 것이다-"(p. 125)




아니, 내용이 책의 전부는 아니다. 


책의 내용에 대한 부분은 네 개의 챕터 중 하나일 뿐이다.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ch1. 사물로서의 책, "책은 휴대용 기록-저장 수단이다"

ch2. 내용으로서의 책, "책은 정신을 담는 투명한 그릇이다"

ch3. 아이디어로서의 책, "책은 실험과 유희의 장이자 예술 작품이다"

ch4. 인터페이스로서의 책, "책은 수용의 순간에 독자의 손과 눈과 귀와 마음에서 생겨난다"


오래전 사물로서의 책이 발전하면서 우리가 지금 보는 '글'이라는 형태가 만들어졌다. 책이라는 사물이 없었다면 사실상 언어는 '글'로 발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0세기 전만 해도 글은 중얼거리면서 읽어야만 했다. 이는 글이 모두 '말하는 말'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소리 내지 않고 눈으로만 읽을 수 있는 글의 형태가 아니었다. 글이 띄어쓰기와 구두점 등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아랍의 학술 문헌을 번역하기 시작하면서였다. 그리고 아랍의 학술문헌이 유럽까지 전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코덱스(codex)'라는 책의 형태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코덱스는 페이지의 한쪽을 묶고 표지를 씌운 지금과 같은 책의 형태를 의미한다. '나무줄기'를 뜻하는 라틴어 카우덱스(caudex)에서 유래한, 로마인들이 납판 묶음을 가리키던 표현이다. 책이 아코디언이나 두루마리 형태가 아닌 간편한 형태, 동물 가죽이나 천처럼 무거운 소재가 아닌 종이로 만들어지면서 멀리 떨어진 사상가들끼리도 의견 교환을 활발히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물로서의 책이 자리를 잡으면서 책의 내용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그리고 20세기를 지나며 아이디어로서의 책이 등장했다. 아주 다양한 형태의 책, 실험적인 책이 나온다. 사물로서의 책이 잘 자리 잡았기 때문에, 다양한 소재의 페이지를 한쪽으로 묶어 코덱스의 형태로만 만들면, 텍스트를 담든 그림을 담든 사진을 담든 아이디어를 담든, 무엇이든 책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이 챕터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다가 최근에 아주 익숙해진 '아이디어로서의 책'이 떠올랐다. 바로 아이들이 읽는 책이다. 아이가 있는 친구 집 바닥에는 늘 책이 쌓여 있다. 그런데 이 책들은 '읽지 않아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책의 고래 그림을 통해 고래를 배우고, 부드러운 천을 만지면서 털의 감촉을 배운다. 책 속에 접혀 있는 종이를 열고 닫으면서 도구의 감각을 익히고 덤으로 토끼와 숨바꼭질도 할 수 있다. 책에서 나오는 노래와 소리를 들으며(놀라운 세이펜!) 춤을 춘다. 가장 저렴하고 재밌는 방법으로, 보드북이라 안전한 방법으로, 세상을 접하고 배울 수 있다. 나처럼 편협해진 어른은 다 잊어버렸지만 아이는 사물과 아이디어로서의 책을 몸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디어로서의 책의 모든 것, 세이펜!



독자는 사물로서의 책을 통해 사상과 생각을 주고받고, 내용으로서의 책을 통해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들고, 아이디어로서의 책을 통해 모든 감각을 동원해 세상을 만난다. 그리고 인터페이스로서의 책을 통해 책의 변화를 주도한다-는 걸 알게 됐다.



책은 사라지지 않는다, 쓰는 사람이 있다면.


인터페이스로서의 책에서는 전자책과 오디오북, 디지털 아카이브 등 사람들이 '이것도 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고 질문하는 형태의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이디어로서의 책'이 코덱스 형태에 담은 모든 것을 책이라 부르고 있다면, '인터페이스로서의 책'은 저자가 쓴 텍스트를 담은 모든 것을 책이라 부르고 있다. 심지어 전자책은 텍스트를 제외한 모든 것을 독자가 조정할 수 있다. 여백과 페이지, 타이포, 배경색, 심지어 읽는 방식(TTS)까지. 저자는 책이란 수용의 순간에 독자의 손과 눈과 귀와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하지만 책의 미래는 여기서 이미 한 단계 더 나아간 것 같다. 이제 독자는 책을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 텍스트를 직접 쓰기 시작했다. 


'인터페이스로서의 책'의 등장은 혼자서도 책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독자와 저자의 경계가 뚜렷했던 과거를 지나, 이제는 독자들이 저자로 직접 등장한다. 인터페이스로의 책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책은 완벽한 협업의 과정이었다. 저자, 편집자, 디자이너, 인쇄소, 제본소, 출판사, 유통업체, 서점 등 책을 만드는 과정, 그리고 책이 독자들에게 닿는 과정까지 많은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킨들은 출판사와 인쇄 과정 없이 디지털로 책을 출간하는 'kindle direct publishing'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지금, 여기 브런치에서도 누구나 혼자서 목차를 구성하여 '브런치 북'을 만들 수 있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연재되는 웹소설도 연재를 마치면 합본으로 묶어 내놓는다. 출판사를 통해 출간하지 않더라도 파라텍스트(paratext)*를 붙여 pdf 파일로 만든다. 이 뿐인가. 독립출판이 늘어나면서 ISBN을 붙이지 않고 자신의 글을 기록으로 남기고 인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책의 종말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엄연히 말하면 책을 읽는 독자가 사라지는 것을 염려한다. 독자가 사라지면 책의 시장가치가 떨어질 것이고 그러면 책을 쓰는 사람들도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책의 시장가치가 떨어져도 책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면 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돈이 되지 않아도 책을 쓰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다. 책을 내는 것이 쉽고 비용도 적게 드니까. 


그래서 나는 인터페이스로서의 책이 더욱 반갑다. 읽는 환경의 변화가 쓰는 환경의 변화를 가져왔고, 읽는 사람들을 쓰는 사람들로 만들었다. 그리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책을 쓸 확률은 낮지만, 책을 쓰는 사람이 책을 읽을 확률은 높다. 즉, 독자들이 늘어서 저자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많아지면 그만큼 독자가 확보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책의 시장이 줄어든다 해도 책은 살아남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출판사를 시작한 이유가 바로 이런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돈은 못 벌어도 책은 남는다!"




*파라텍스트(paratext): 표제지, 색인, 쪽, 표제, 표지, 쪽번호,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등, 텍스트 밖에서 책을 책으로 만들어주는, 본문을 보완한 텍스트. 



글. 오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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