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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Mar 26. 2021

당신의 구독과 좋아요는 돈이 됩니다 (1)

주의력을 사고파는 시대를 읽는 방법, 책 <주목하지 않을 권리>

유튜브의 구독과 좋아요, 블로그의 방문자, 인스타그램의 팔로워 숫자가 알게 모르게 '돈'으로 환산된다는 것은 요즘 시대의 상식입니다. 소위 누군가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이런 숫자들은 바로 광고주들에게는 매우 구미가 당기는 상품이기 때문이죠.


팀 우의 책 <주목하지 않을 권리>는 이런 '영향력'을 기반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주의력 상인(Attetion Merchant)의 역사를 짚어갑니다. 그 시작은 1833년 미국의 벤자민 데이의 <뉴욕 선New York Sun>이라는 최초의 1센트 신문에서부터 시작해,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인터넷, 스마트폰, 소셜미디어까지 이어지죠. 점점 사람들의 일상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 이런 미디어에 대한 저자의 시선은 비판적입니다. 대중매체와 인터넷의 발전이 가져온 엄청난 파급력과 영향력과 함께, 여태껏 주목받지 못한 부작용도 드러났기 때문이죠.


주의력을 처음으로 자원의 관점에서 접근한 <관심의 경제학>(2001)이 미국에서 첫 출간된 지 20년이 지났습니다. 이 책의 주장대로 '주의력'이야말로 오늘날 시장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자원이 되었습니다. 주의력, 즉 사람들의 관심이 오늘날 왜 가장 귀한 자원이자 상품이 되었을까요? 그 내막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이 짚어주는 역사를 잠시 살펴볼까 합니다.






충격적인 소식으로 눈길을 끌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정보가 공짜가 아닌 시절이 있었습니다. 정보를 얻고 싶으면 돈을 주고 책이나 신문, 잡지를 사야 했고, 아니면 적어도 자신의 발품을 팔아 직접 사람들을 만나거나 도서관을 뒤져야 했죠. 그만큼 정보는 정성이 필요하고 희귀한 것이었습니다.


1833년 뉴욕시의 대표적인 신문이었던 <모닝쿠리어앤드뉴욕인콰이어러>는 인구 30만 뉴욕시에서 겨우 2,600부 정도만 발행되었다고 합니다. 판매가 역시 그 당시로서는 그리 싸지 않은 6센트였고요. 대개의 신문은 뉴욕시의 정계나 엘리트층을 주로 대상으로 했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문을 읽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장에 운명적 남자, 벤자민 데이가 등장합니다. 그는 신문을 1센트라는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대신에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해서 광고로 돈을 버는 모델을 구상합니다. 이전 신문에도 광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신문사 매출의 일부분에 불과했었습니다. 벤자민이 구상은 더 큰 광고 시장을 만드는 것이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광고주들을 설득할만한 영향력, 즉 부수가 늘리기로 합니다.


1834년 300부로 소박하게 시작한 <뉴욕선>은 "모든 사람이 부담 없는 가격으로 하루의 모든 뉴스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광고에 유리한 매체를 제공하는 것"을 창간 취지로 삼았습니다. 이 신문의 첫 헤드라인은 어느 젊은 청년의 구슬픈 자살 이야기였습니다. 이후 흥미롭게도 <뉴욕선>은 현재 언론사에서 수습기자들을 경찰서를 돌리는 업무(일명 '사스 마와리')와 같은 보직을 만듭니다. 뉴욕 즉결심판소 전담기자로 채용된 조지 위스너는 주급 4달러를 받는 최초의 정규직 신문기자가 되었는데, 뉴욕 즉결심판소에는 뉴욕시의 각종 범죄 소식을 수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각종 범죄 소식과 이야기들로 <뉴욕선>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고 창간한 지 1년이 지난 발행부수가 5,000부를 넘어섭니다. 벤자민 데이의 실험이 성공한 겁니다. 이러자 <뉴욕선>의 성공으로 비슷한 사업모델을 추구하는 <모닝헤럴드>와 같은 후발주자가 등장합니다. <모닝헤럴드>는 뉴욕선의 공식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도 더욱 선정적인 소식을 담았습니다. 머리를 날아가버린 한 남자의 사고, 프랑스 단두대의 처형 묘사, 도끼에 목숨을 잃고 불이 붙은 침대 위에 남겨진 창녀의 살인 사건(29쪽)이 그런 이야기였죠.


<모닝헤럴드>의 추격 속에서 <뉴욕선>은 엄청난 가짜뉴스로 이목을 다시 한번 집중시킵니다. 남아프리카로 이주한 어느 천문학자를 인용하면서 달에는 박쥐인간과 같은 생명체가 산다고 보도한 것이죠. 이 이야기는 시리즈로 실렸는데, 사람들의 관심을 당연히 끌었고 이때 <뉴욕선>의 발행부수는 2만 부에 육박하게 됩니다.


1835년 8월 <뉴욕선>에 보도되었던 달에 사는 생명체 삽화 (Great Moon Hoax)




사실과 과학의 반격


당연히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사실과 허위를 제대로 구별하지 않는 언론은 물론이고, 이런 언론에 광고를 싣는 광고업자들도 문제적이었죠. 특히 제대로 된 의약 상식이 보급되지 않은 시대에서 말 그대로 '약장사'는 돈이 되었습니다.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홍보하는 광고들이 줄을 이었고, 독자들은 광고 문구에 혹해서 대거 약을 사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종의 시장 자정작용이 일어납니다. 1905년, <뉴욕선> 기자 새뮤얼 애덤스는 일반적인 기자가 아니라 탐사 전문 기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장광고로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있었던 당시 의약품 산업의 사기성을 고발하기로 합니다. 대표적으로 당시 리쿼존(Liquozone)이란 약품이 사실 고도로 희석된 황산에 색소를 가미한 용액에 지나지 않는다고 폭로하죠. 이러한 의약품의 사기성은 큰 사회적 문제로 인식됐고 미국 의회에서 식품의약품법(Food and Drugs Act)가 통과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 법 덕분에 기업가들은 상품에 거짓된 정보를 적어선 안 되며, 위험한 성분을 기재해야만 되었죠.
*이후 우리가 자주 듣는 미국의 식품의약품청인 FDA가 설립됩니다.



1900년대 살균제품으로 인기있었던 리쿼존 보존용기와 광고핀



이어서 1929년에는 세계 최초로 상품의 효능과 성분을 직접 실험하고 이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단체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당신이 지불한 돈의 가치>라는 광고업자들을 폭로하는 성격의 책을 낸 두 저자인 체이스와 슐링크가 <소비자리서치>를 설립한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실험한 제품의 대한 평가를 담은 회보를 정기적으로 발행했죠.


1830년대 <뉴욕선>을 시작으로 1900년대 리쿼존에 이르기까지 신문 산업과 광고업은 단순허위정보, 허위조작정보, 가짜뉴스 등을 적절히 이용해서 사람들의 주의를 사로잡고 시장을 넓혀왔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언론 내의 자정작용, 정부의 개입, 시민단체의 등장 등으로 공론장에서의 정보의 유통을 관리하는 제도도 발전했습니다. 덕분에 사업가와 광고업자에 대한 정부의 규제와 시민단체의 활동으로 이전처럼 과장된 광고로 사람들의 주의력 끄는 일은 어려워졌습니다. 시장에는 진짜 효능이 있는 제품이 조명받는 공정함도 일정 부분 갖출 수 있게 됐습니다.




광고업자의 반격 (1) 설득하지 않고 개종시킨다


하지만 제품에 엄청난 효과가 없다면, 시장에서 이전처럼 주목을 끌기에는 어려워졌습니다. 이즈음 새로운 전략이 등장합니다. 바로 '브랜딩'입니다. 1933년 경제학자인 에드워드 체임벌린은 <독점적 경쟁이론>에서 브랜딩 전략이란 '본질적인 가치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비이성적인 애착을 조성함으로써 해당 브랜드만큼 좋거나 그보다 나은 다른 브랜드와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드려는 계산적 시도'(123쪽)라고 평가했습니다.


늘어나는 규제와 경쟁 속에서 이제 광고는 사람들이 더욱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드는 로고나 문구, 이미지를 부각하는 광고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라디오나 텔레비전 등 미디어의 발전은 이러한 브랜딩 전략을 더욱 효과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듭니다.



1931년 코카콜라 광고. 코카콜라 덕분에 산타클로스는 빨간 옷을 입게 되었다.





광고업자의 반격 (2) 자꾸 볼수록 정 들어


산업의 성장만큼이나 광고 시장과 신문사도 커졌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교적 광고에서 자유로웠습니다. 19세기 대부분의 광고는 인쇄된 용지 위에 존재했습니다. 길거리에 포스터, 전단, 가판대에 신문에만 있었던 셈이니까요. 하지만 1900년대를 넘어서 등장한 라디오, 텔레비전은 이 상황을 완전히 바꿔버립니다.


흥미롭게도 라디오가 도입된 초기 1920년대에 사람들은 라디오가 광고에 효과적일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길거리가 아닌 일반 가정 안에서 광고를 '듣게' 한다는 것에 거부감도 있었죠. 때문에 라디오로 통해 무언가를 판다 해도 진지하게 사려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이후 등장했던 인터넷에도 똑같이 반복된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뒤집게 한 역사적 시리즈가 등장하는데, <아모스 앤 앤디Amos 'n' Andy>라는 라디오 시트콤입니다.



남부 출신의 두 명의 흑인인 아모스와 앤디가 조지아주에서 시카고로 이주하면서 겪는 에피소드를 담은 라디오 시트콤 시리즈. 백인 성우가 흑인을 연기했다.



<아모스 앤 앤디>는 인기는 그야말로 미국민의 '국민 방송'이 되었습니다. 지금에서 보면 인종차별적인 내용이지만, 라디오를 소유한 백인 중산층 가정에게는 그들의 생활을 코믹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모두가 즐겁게 들을 수 있는 방송이었던 거죠. 당시 청취율 측정 방법이 정확하진 않지만 몇몇 에피소드의 경우는 무려 4천만 명이 이 시트콤을 들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때 미국의 총인구가 1억 2천만 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라디오를 가진 미국인이라면 거의 전부 아모스 앤 앤디를 청취했다고 봐도 틀리지 않은 말이었던 셈입니다.


아모스 앤 앤디와 함께 언급되는 또 다른 역사적인 기록은 바로 '팹소던트 치약' 광고입니다. 펩소던트 치약은 아모스 앤 앤디에 주 광고업체였고, 이 시트콤이 끝날 때마다 "하루에 두 번 펩소던트 치약을 사용하세요."라는 문구가 나갔습니다. 펩소던트의 치약의 매출은 두 배 넘게 늘어나면서 라디오 광고가 우려와 달리 대단히 효과적임을 증명하죠.


라디오 이후 텔레비전의 등장은 더 큰 광고시장을 만들어냅니다. 특히 텔레비전은 가정에서 지내는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관심을 받으면서 더 각광을 받습니다. 미국의 1950년대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6천만에서 7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습니다. 1835년 2만 부의 <뉴욕선>에서 약 100년이 지난 후, 3천 배로 청중이 늘어난 것입니다.


지면 상의 광고는 아무리 오래 본다 하더라도 10분을 넘기기 힘들었을 테지만,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프로그램 사이사이 광고를 넣음으로써 시청자들이 광고에 더욱 자주, 오래 집중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브랜딩 전략과 아울러서 기업의 이미지를 소비자들에게 각인하는 일이 현실화된 것이죠.


"손이 가요 손이 가~"라는 역사적인 CM송의 주인공, 농심 <새우깡>




생산자와 수용자가 달랐던 시절


1834년 벤자민 데이는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콘텐츠를 저렴하게 공급하는 대신에 광고주에게 수익을 내는 사업모델을 고안했습니다. 그 이후 광고 산업의 기술과 매체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했지만, 벤자민 데이가 구상한 이 기본적인 모델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죠.


아직까지 시장은 물건을 파는 사람과 사람이 분명하게 나뉘어 있었습니다.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과 같은 매스미디어는 전문적인 직업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운영되었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람이었다기보다 콘텐츠를 소비하는데 그쳤습니다. 그러다 다시 한번 온 세상이 뒤바뀔 새로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 '인터넷'이죠인터넷의 등장 이후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한 경쟁이 이전보다 더욱 뜨거워집니다.   




 2편에서 계속




글/김소피

읽은 책/팀 우, <주목하지 않을 권리>, 안진환 옮김, 알키,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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