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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Feb 13. 2020

일잘갑에 대하여

일 잘하는 갑이 되는 방법 


외주가 넘쳐나는 연말. 갑과 통화하다가 속 뒤집는 소리를 하길래 거리에서 소리를 질렀다. 


갑질해도 괜찮으니 일잘갑이랑 일하고 싶다!!!!! 



일잘갑. 신조어는 아니고 내가 만든 말이다. 일 잘하는 갑. 흔히 '갑질'은 그 사람의 성품이 되먹지 못하거나 권력을 사용해 부당함을 줄 때 사용하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갑질은 어느정도 감안하겠으니, 그냥 갑이 일을 잘하면 좋겠다. 갑이 재수없고 못되고 눈치가 없더라도 일만 잘하면 감당할 수 있다. 어차피 갑을 관계라는 것이 일 때문에 발생하는 관계니까. 그런데 대체 어떻게해야 일 잘하는 '갑'을 만날 수 있을까. 그렇다. 그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이럴 때는 생각의 전환을 해보자. 일잘갑을 찾는 건 어려우니 내가 일잘갑이 되면 어떨까. 모두가 일잘갑이 되면 세상은 일잘갑으로 가득찰 것이고, 우리 모두 스트레스 받지 않고 일할 수 있지 않을까! 다들 본인이 평생 을인 줄 알지만, 잘 생각해봐라. 누구든 몇 년만 일해도 후배가 생기고, 일의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누구나 외주 혹은 하청을 쓰게 되어 있다. 현수막 하나를 의뢰해도 나는 갑이 된다!! 그러니 내가 먼저 일잘갑이 된다면 세상은 훨씬 평화로워질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일잘갑이 되겠다고 생각하면 일잘을(일 잘하는 을)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는 기분이 좀 더 낫다. 을은 갑을 위해서 일을 잘 해야한다고 생각하니 좀 자존심이 상하지만, 일잘갑은 세계평화와 인권 증진의 대의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을 잘 해보자. 우리 모두 일잘갑이 되어보자! 




일잘갑 조건1. 대체 당신은 누군가. 당신의 이름과 직함을 밝히자.


일잘갑의 시작은 당신이 누군지 정확히 말해주는 것부터 시작한다. 을과 처음 만날 때 회사명/이름/직함까지 모두 말해줄 필요가 있다. 시민단체 등 직함이 애매한 기관일 경우 호칭을 알려주면 좋다. 을은 호칭부터 실수할까봐 조심스럽다. 내 이름으로 직함을 말하는 게 쑥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것은 소통의 기본이다. 특히 만나서 명함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전화로 업무를 시작한다면 전자명함이나 문자로 이름/직함 정도는 남겨주는 것이 좋다. 듣기만 해서는 김지현인지 김지연인지 알 수가 없다. 이름과 직함을 모르면 이메일을 쓰고 회사로 전화하는 것부터 힘들어진다. 대체 누구를 찾아야 하는거냐구요. 갑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나면 을도 당연히 그렇게 소개하기 마련. 그리고 소통의 기본을 넘어서 통성명이 중요한 이유는 을에게는 갑이 당신 한 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을에게는 갑이 아주 많다. 그 갑들 중에 당신이 누군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일잘갑 조건2. 모든 것을 문서/글로 전달하자. 


업무지시는 카톡/전화보다는 이메일로 보내자. 

일잘갑의 기본은 정확한 업무지시다. 정확한 업무지시조차 어렵다면 적어도 글로 정리하여 지시하자. 그리고 갑을을 막론하고 제발 이메일 좀 잘 쓰자... 진짜 이건 기본 중 기본인데. 을은 이메일을 못 쓰면 무시와 괄시를 받지만, 갑이 이메일을 못 쓰면 도무지 일을 진행할 수가 없다. 최근에 서점에 갔더니 이메일 잘 쓰는 법에 관련한 책도 있더라. 책이라도 보고 배우자. 그리고 업무는 절대 카톡으로 주고받지 말자. 이메일이 '나는 업무를 지시했으니 이제 알아서 일을 해주시오' 라는 말을 담고 있다면, 카톡은 '내가 일을 줄테니 상시 대기하시오' 이런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화로 일을 전달할 경우 반드시 오해가 생긴다. 그러니 전화로 업무를 전달하더라도 확인을 위해 이메일을 남기는 것이 가장 오해가 적다. 


전달사항은 번호를 붙여라.

정말 싫은 이메일은 "A좀 해주시구요. B는 C처럼 해주세요. 아 그리고 A에서 이런이런 것도 필요해요."처럼 의식의 흐름대로 작성한 이메일이다. 한국말인데 해석까지 해야 한다. 내가 이걸 보고 무얼 알 수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는 순서와 항목을 나타내는 1부터 10까지의 숫자가 있다. 번호를 붙여서, '1. 불라불라불라 / 2. 랄라랄라랄라' 이렇게 정리해서 주면 좋다. 특히 첨부파일이 있을 경우 관련 첨부파일명과 번호를 맞춰서 전달해준다면, 을은 당신을 존경하게 된다. 


준비된 문서로 업무를 전달하자. 

을과 처음으로 대면해서 회의를 할 경우 반드시 문서를 준비해서 들어가자. 아주 간단한 업무여도 마찬가지다. 회의 문서에는 사업명부터 사업개요, 기대효과, 얻고자 하는 결과물 등 을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정보를 주어야 한다. 을이 대체 이건 무슨 사업인가-를 골똘히 고민하게 한다면, 당신은 이미 일잘갑에서 탈락이다. 특히 결과물의 목표와 기대사항을 분명히 전달하고, 원하는 결과물의 샘플 혹은 이미지를 정확히 제시하자. 을에게 무시받고 싶지 않고, 최상의 결과물을 기대한다면 이를 정확히 해야 한다. 갑이 이 사업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면 을은 그 때부터 마음이 풀어지면서 포기하게 된다. '너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나도 대충하지 뭐....' 




일잘갑 조건3. 돈과 일정은 갑이 관리하는 것이다. 


비용/결과물/일의정도/수정횟수/기한 등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야기를 마치자. 일을 마치기 전에 위에 대한 가이드를 갑이 준다면 일은 감동하는 마음으로 편하게 일을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을은 무제한으로 일하지 않는다. 대체 어떤 결과물이 어느정도로 나오면 마무리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타임라인에 따라 해당 기한까지 을이 일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건 당연히 갑의 몫이다. 정확한 날짜에 정확한 일이 왔는지 확인하고, 을이 해당 사항을 못 지켰을 경우에는 당연히 불이익이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위의 이야기를 모두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스리슬쩍 업무와 조건을 추가하는 건 진짜 아니다. 진짜 돈 더 줄 거 아니면 진짜 그러는 거 아니다. "간단한 건데 추가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아니요. 




일잘갑 조건4. 갑의 핵심 역할은 정확한 피드백과 평가다. 


내부 교통정리를 마친 내용을 전달하자. 

당연한 얘기지만 갑에게도 갑이 있다. 을의 입장에서 당황스러운 건, 갑이 하라고 해서 한 일을 갑의 갑이 뒤집어 버릴 때다. "저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사장님이 별로라고 하시네요..."라는 말을 갑이 하면 을은 속이 뒤집어진다. 내부의 교통정리는 내부에서 해라. 나는 당신과 당신의 갑 중 누가 내 결과물을 싫어하는지 관심없다. 교통정리를 마치고 내게는 깔끔한 지시와 피드백만 주면 된다.  


피드백은 한 번에 하자. 

제발 카톡으로 10분에 하나씩 피드백 던지는 거 그런 거 하지 말자. 다시 위로 돌아가서 '전달사항은 번호를 붙여라'를 참고하자. 피드백은 한 번에 정리해서 줘야 한다. 그래야 을도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다. 내부 교통정리를 마치고 내용을 수합하여 분명한 피드백을 주도록 하자. 


결과물에 대한 선호와 그 이유를 명확히 전달하자. 

갑은 반드시 평가를 해야 한다. 좋은지, 싫은지. 어디까지 맘에 드는지, 어느 부분이 불편하지 제대로 표현하자. 숫자를 사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대체로 90%정도 만족스럽구요. 나머지는 이러이러한 내용만 수정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약간의 칭찬을 곁들이는 건 을이 끝까지 힘내게 하는 데도 좋은 효과를 준다. 하지만 평가에서 좋은 사람 같은 거 필요없다. 어차피 갑은 좋은 사람 안된다. 괜히 좋은 사람 하고 싶어서, 결과물이 별론데 "다 좋은데요.. 뭔가 싫은 건 아닌데... 그냥 뭐랄까. 이것만 수정?" 이런 피드백 좀 주지 말자. 정확한 단어로 정확히 표현하자. 갑도 을도 목표는 '일'이다. 




덧붙여서


일잘갑만 말하면 일을 못하는 을을 만나는 갑의 심정을 토로할 수 있으니 일잘갑과 일못갑 / 일잘을과 일못을의 관계를 상상하여 정리해봤다.  


일잘갑-일못을 : 상대가 일잘갑이 분명한데 일하는 것이 불편하다면 당신이 일못을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갑의 마음을 말해 뭐하나. 화병 난다. 

일잘갑-일잘을 : 아주 행복하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상대를 만난다면 절대 놓치지 말아라. 둘이 손 마주잡고 창업하자. 

일못갑-일못을 : 일이 잘 안되는 이유를 서로에게 돌린다. 상대가 일을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주변에 물어보고 자신을 성찰하자. "나 일 잘하니?" 주변에 진실된 사람이 있다면 솔직하게 얘기해 줄 거다. 

일못갑-일잘을 : 을이 일을 못하는 거라고 오해하는 갑이 을을 내쫓거나, 화병 난 을이 계약을 끊거나 자진퇴사한다. 


일을 하면서 행복한 관계를 바란다는게 얼마나 부질없는가. 그래도 일잘갑이 된다면 상황을 좀 더 낫게 만들 수 있다. 2020년에는 인류평화를 위해 내가 일잘갑이 되어보자. 





글. 오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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