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와 번역가와 계약하기
책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계약이 필요하다. 첫째, 번역 에이전시를 통한 해외 출판사와의 출판 계약. 둘째, 번역가와의 계약. 나와 소피는 새로운 미션을 성사할 생각에 조금 들떠 있었다. 너무 아무것도 몰라서 걱정도 됐지만, 너무 아무것도 모르니 뭘 걱정해야 할지를 모르기도 했다.
우리가 접촉해야 할 출판사는 APress. 다른 출판사들이 하는 것처럼 번역 에이전시를 통해 접촉했다. 다행히 번역 에이전시와 소통한 건 처음이 아니었다. 작년에 출판사를 만드는 시점에 우리는 번역하고 싶은 책 두 권을 마음에 정해두었다. 하지만 두 권 모두 불발되었다. 한 권은 출판사가 책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를 보호하고 싶다는 이유로, 또 한 권은 사진첩이어서 번역을 해본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 당했다.
당시에 접촉했던 번역 에이전시가 매우 친절했던 기억이 있어서 다시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pdf파일과 함께 검토 후 연락을 달라는 메세지가 왔다. 책의 원본을 받아들자 신이 난 우리는 열심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꼼꼼히 읽지 않는 나와 꼼꼼히 읽는 것 같은 소피. 이미 우리는 번역을 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도 필요했다.
책을 봤을 때부터 우리는 번역가로 요룬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물론 요룬이 아니어도 세상에 이미 번역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많고 유명하고 검증된 번역가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번역가를 구하자니 비용 문제를 포함하여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먼저, 우리는 번역이 처음이었다. 사실 번역가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편집자의 의견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저자와는 대화를 하면서 직접 해결할 수 있지만 번역은 다르다. 직접 글을 쓴 사람은 저 바다 건너에 있고 번역가와 편집자는 그저 문장만 보면서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야 한다. 이건 아주 색다른 경험이 될 터였다. 그래서 사실 내가 경력이 없다는 사실이 걸렸다. 번역을 위한 소통을 해본 적 없는 편집자로서 번역가와 만나는 것이 조금 두렵기도 했다.
동시에 내가 원하는 번역가의 기준이 높기도 했다. 나는 기본이라고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번역가가 만약 꼼꼼하지 않다면? 몇 가지 문장을 건너 띈다면? 그리고 공부를 안 하고 글만 옮긴다면? 욕심은 끝도 없이 커져서 힐데와소피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책을 만들고 싶어하는지 알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도달했다. 이러니 계속 요룬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능력이 있지만 막상 각 잡고 번역 해본 적은 없는, 그런데 글은 꽤 잘 쓰고 집착할 정도로 성실한, 무엇보다 자신의 이해를 더하기 위해 자료를 찾고 공부를 하는 사람. 마지막으로 힐데와소피가 하는 일을 가장 잘 이해할 사람. 동시에 요룬에게도 제 살을 깎아 먹는 일은 아니었다.
원고를 보여줬다. 이 책은 상당히 많은 정보를 담고 있고 새로운 개념을 가르쳐준다. 지금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어떤 기본 개념과 방식을 설명하는 좋은 책이었다. 그리고 저자의 입장이 명확한 데다가 위트도 있다. 두껍지 않지만 사례도 풍부하다. 요룬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의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한 가지를 확인해야 했다. 양꼬치를 먹다가 물었다. 너도 정말로 하고 싶은 거냐고. 요룬과 나는 20년 지기라서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 뭘 원하는지 대충은 안다. 그리고 요룬은 대체로 명확하게 하고 싶다고 말하기 보다는 하면 좋고, 할 수 있고, 그걸 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고- 이런 방식으로 얘기한다. 그래서 더욱 물어봐야 했다. 너도 정말로 하고 싶은 거냐고. 요룬은 '그래'라는 뉘앙스 보다는 '그러자'라는 뉘앙스로 대답했다. 오케이 싸인이다. 이렇게 번역가를 구했고, 계약을 맺었다.
원고를 보던 중 에이전시에서 전화가 왔다. 정말 친절하게 계약 조건과 여러가지를 설명해 주었다. 주로 이런 업무는 소피 담당이다. 소피는 처음 하더라도 무엇을 물어봐야할지 알아보거나 부딪치면서 여러가지를 확인한다면, 나는 무언가를 처음 할 때는 그 업무를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배운다. 소피는 책을 통해서도 무언가를 잘 배운다면 나는 책보다는 직접 누군가를 만날 때 더 잘 배운다. 그래서 처음 하는 일이 있으면 은근슬쩍 소피가 해줬으면 한다. 소피가 하는 걸 보면서 배우면 다음에는 나도 할 수 있을 테니까.
계약 진행을 요청한 이후 일이 착착 진행되었다. 오퍼를 받고 우리가 원하는 조건도 제시하고. 최종 조건을 맞춘 후에 출판사와 최종 계약을 했다. 계약서가 우편으로 오고 가나 싶었는데, 요즘 영미권 저작사들은 환경을 보호하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전자서명을 한다고 했다. 편리하게 전자서명으로 계약을 완료하고 청구서를 받아 선인세와 에이전시 계약관리료를 납부하였다. 이제 한국에서 <Data versus Democracy>를 번역하여 출판할 권리는 출판사 힐데와소피에게 있다. 간혹 출판권, 저작권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출판사는 대중에게 유형의 책을 팔지만 사실 출판사의 일은 '권리'를 사고 파는 행위에 더욱 가깝다. 우리는 영어로 출판된 책의 문장들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새로운 형태의 책에 넣을 권리를 구매한 것이다. 문장들에게 새 옷을 입히고 새 집에 들여보내는 기분이랄까!
글. 오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