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왜 이런 책을 읽어?”와 “그럴 거면 대학원에 가”라는 말을 꽤 자주 듣는 학사 칡부엉이입니다. 대학원에 갈 기회가 두어 차례 있었지만 운이 따르지 않아(혹은 운이 따라서) 자유부엉이 되었습니다. 아직 전공분야가 없다 보니 관심사가 넓고 얇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넓고 얇은 것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학자와 학사의 경계에 서서 보이는 것들을 전달해보려 합니다.
부엉이라면 좋아하는 철학자 한 두명은 있지 않나요?
독립출판계를 눈 여겨보고 있는 저는 어느 날 <일간 이슬아>라는 참신한 구독서비스를 알게 되었고, 어떻게 이렇게 메일링으로 돈을 버는가!에 감탄하며 열심히 검색했더랬습니다. 일간 이슬아 관련 뉴스를 찾다 보니 같이 많이 소개되는 <전기가오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마우스는 전기가오리가 나온 뉴스를 다 뒤져보고 있었고, 전기가오리 사이트 곳곳을 훑고 있었습니다. 전기가오리는 참 놀라운 모델입니다. 그래서 칡부엉이의 첫 번째 소식으로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전기가오리는 '철학 구몬'이란 별칭을 갖고 있습니다. 전기가오리는 구몬처럼 학습서 정기적 배송하며, 학습서의 설명문이 참 친절합니다. 특히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계속 밀린다는 점에서 구몬을 연상시킵니다.
전기가오리는 주로 영미 언어철학, 분석 형이상학, 페미니즘 철학을 다룹니다. 그중 웹에서 읽을 수 있지만 영어로 작성된 스탠퍼드 철학백과의 항목-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섹스와 젠더에 대한 페미니즘의 관점들, 고대 회의주의 같은 것-들을 번역해 소개합니다. 동물권에 대한 옹호와 같이 철학의 세부 주제를 다룬 논문을 번역하기도 합니다. 자세한 출판물 소개는 사이트를 참고해보세요.
전기가오리 소개 https://www.philo-electro-ray.org/blank-2
스탠퍼드 철학백과 공식 사이트
전기가오리의 흥미로운 점은 철학이라 하면 지루하고 딱딱하다는 편견을 깨고, 독자들에게 전기가오리의 구독이 소위 '힙'하다는 인상을 주는 데 성공했다는 점입니다. 현재 전기가오리는 4천여 명이 구독하는 서비스입니다. 대학교 출판사가 아니면 학술서적의 출간마저 어려운 현실을 보면, 전기가오리가 구축한 영역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매달 철학 관련 논문이 4천 부 이상은 나간다는 의미이니까요.
전기가오리의 참신함은 일단 책이 예쁜 데서 나옵니다. 전기가오리에서 출간되는 모든 도서들은 실험적인 인쇄와 제본 방식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형식을 넘어서 내용적인 면에서도 실험적입니다. 논문을 읽기 전에 설명하는 원고를 더한다던지(<설명 원고 읽고가세요>), 영어 텍스트 읽기를 돕기 위해 친절한 실습지를 더하기도 합니다(<영어 텍스트 읽기를 도와드립니다>). 가끔은 논문의 내용을 만화나 게임으로 승화시키기도 합니다. OOO작가가 참여한 <그치만 엄마, 배꼽티는 진짜 예쁘잖아요!>라는 논문을 만화로 재구성한 게임북이 대표적입니다.
출처: 전기가오리 홈페이지
전기가오리의 아쉬운 점을 꼽자면, 예쁜 디자인과 한글 번역을 뺀다면 서비스의 효용도가 많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이 두 가지 때문에 전기가오리가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실제 철학을 전공하는 부엉이라면 자기 주제에 맞는 논문을 어떻게든 찾아서 읽어야 할 테고, 그 논문이 전기가오리에 번역되어 있다면 유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공자가 아니고 단순히 흥미나 교양을 위한 학습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전기가오리의 출판물은 다소 좁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기가오리를 구독하는 1인이지만 매번 훑어보기만 할 뿐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전기가오리가 칡부엉이에게 준 영감은 "공부는 멋있는 것이구나"라는 깨달음입니다. 생각해보면 어떤 학문보다 철학이 '간지'와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기도 합니다. 한나 아렌트라던지, 라캉이라던지, 이름만 읊어도 뭔지 모를 포스 같은 것이 느껴지긴 하니까요. 다만 그들이 쓴 책들은 큰 마음을 먹고 읽어야 하는 무게감이 있습니다. 전기가오리는 '학습'이란 단어에 주목하면서, 이런 중압감을 자연스레 덜어 내었습니다. 짧은 텍스트와 잘 읽히는 문장으로 철학의 벽을 낮추려고 하고 있죠. 전기가오리의 시도 자체는 '철학한다'는 일종의 실천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전기가오리가 얼마만큼의 확장성과 지속성을 가지는 사업이 될 것인가는 지켜보고 싶은 지점입니다. 현재 1인 출판사로 운영되고 있는 전기가오리는 대표의 하드캐리와 여러 외주 파트너들이 협업하는 구조입니다만, 그만큼 대표에 의존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위험요소가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전기가오리에서 소개하는 논문과 학술적 활동이 실제적으로 전공 부엉이들에게 얼만큼의 효과를 주고 있는 지도 아직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전기가오리의 시도가 단순히 신박한 시도에서 더 나아가, 한국 철학계에 신선한 바람이 될지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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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칡부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