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한 사람들의 사연이 나오는 방송을 보다가, 거울에 비친 내 표정을 살펴본다.
나는 왜 저분들의 삶이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 여겨왔을까.
왜 그들의 선택과 시간에 눈길조차 머물지 않았던 걸까.
얼마 전 지인의 한마디가 마음을 뒤흔들었다.
“결혼이라는 선택 앞에서 중요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상대가 이혼한 경험이 있어도 나는 상관하지 않아.”
그는 평소 이성적이고 차분한 사람이었기에 그 말이 더욱 깊이 와닿았다.
나는 왜 초혼인 사람만을 당연한 결혼 상대로 생각해 왔을까.
왜 이혼이나 자녀 유무는 말할 필요조차 없는 ‘자연스러운’ 탈락 조건이었을까.
그건 선택의 조건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태도였다는 것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다.
결혼정보회사 상담 영상을 본 적이 있다.
30대 후반의 여성이 초혼 남성을 원한다고 하자 상담사가 이렇게 물었다.
“왜 이혼한 사람은 안 되죠? 왜 아이가 있으면 안 되나요?”
표면적으로는 친절했지만 말투에 숨겨진 날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지금 본인이 그럴 조건을 따질 수 있는 사람인가요?’
그 문장은 질문이 아니라 판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장면이 불편했고 그 불편함이 어디서 오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조용히 영상을 꺼버렸다. 그 순간 어렴풋이 사람들이 ‘기본값’이라 부르는 기준이 얼마나 쉽게 타인의 삶을 축소하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고유한 이야기를 지우고 사람을 조건의 목록으로 바꿔버리는 방식의 폭력성. 그리고 나 또한 그 잣대를 내면화한 채 살아왔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나의 삶 역시 그 기본값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재수를 했고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고(심지어 재수를 해서 같은 대학 다른 과에 진학했다) 교원 임용 시험도 늦게 시작해서 늦게 합격했다. 그리고 싱글로 지내고 있는 지금까지 뒷말 많은 직장에서 여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홀로 내 삶을 감당해야 했다. 그래도 내 안에 스며든 염료들이 배고 빠지길 반복하며 쓰러졌다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던 그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빚었음을 알고 있다. 그렇게 쌓인 시간 위에 나만의 색과 분위기가 얹히며 고유한 이야기가 엮여갔다. 삶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이 삶은 목적을 향하고 있다는 감각. 결코 방향은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느낌 같은 것도. 그렇기에 기본값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삶은 선형적이고 선택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살다 보면 정말 별일이 다 생긴다. 그 별일 속에서 한 번이라도 고꾸라져 본 사람만이 타인의 사연 앞에 쉽게 입을 열지 않게 된다. 이 단순한 사실을 나는 기본값을 주장하기에 늦은 나이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이혼’이라는 단어 앞에서 더 이상 멈추지 않고 싶다. 그들의 삶에도 나와 같은 무게의 시간이 있고 그 안에 진심과 책임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누군가가 이혼 경험이 있는 이성을 소개받겠냐고 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두 사람의 삶이 엮일 때 진짜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어디를 향해 걸어가려는가' 하는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상처나 아픔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딛고 온몸으로 지나온 사람이라면 나는 오히려 그런 삶이 더 신뢰할 만하다고 느낄 것 같다. 내가 함께 살아가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굴곡진 시간을 숨기지 않고 말할 수 있고 내 삶 또한 존중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기본값이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존재하는 것은 각자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끝까지 품고 살아가려는 의지만이 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